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85
제285화. 비밀을 거래할 시간
달빛이 휘황한 밤. 거리를 내달리던 작은 마차가 대로변 한가운데서 멈추었다.
반질반질한 돌 위로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 인기척이라고는 저 멀리, 비틀거리는 부랑자의 발소리밖에 없다.
이안은 랜턴 불빛을 조절하며 지시했다.
“여기서부터 걸어갈 것이다.”
“준비하겠습니다.”
“범상치 않은 집시니, 단단히 하라.”
회유하여 함께 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집시의 특성상 어려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강제성을 부여하여 잡아두는 수밖에.
티모시, 더 나아가 버고스 왕국과의 관계에서 그녀의 존재는 바리엘에 우위를 선사해 줄 터. 이안은 가볍게 고갯짓하며 골목을 살폈다.
“이곳과 저곳은 특히 길이 복잡하다. 아예 보호막으로 막아두고.”
“예. 이안 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관이 당부를 거듭하니, 부하들은 더더욱 정신을 바로 잡았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지도를 확인한 다음, 각자 맡은 골목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이안의 명이 없다면, 쥐새끼 한 마리도 허락할 수 없다는 듯, 결연하게.
“가자. 이안아, 오늘 달 예쁘다.”
반면, 베릭은 밤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천하태평이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단편적인 기억을 더듬어,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이라.
“베릭, 반달이 뜨는 날, 확실한 거지? 어찌 이리 조용하단 말인가? 아무도 안 보이는데.”
“거참, 맞다니까요. 로만드로 님은 사람을 그렇게 못 믿어서 어찌 살아?”
“사람을 못 믿는 게 아니라, 너를…….”
“쉬이.”
갑작스러운 이안의 신호에 두 사람이 멈칫했다.
이안의 시선이 닿은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 용도를 알 수 없는 적재물이었다. 천으로 덮혀 있는 지라, 어둠 속에서 경계를 쉬이 구분할 수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뜬 로만드로는 그 옆, 무언가 꿈틀거리는 걸 발견했다.
“헉.”
사르르, 희미하게 반짝이는 수정구슬. 공원에서 보았던 그것이다! 로만드로는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며 연신 이안에게 속닥거렸다.
“맞네. 그때 저하와 함께 보았던 그 집시가 맞아. 수정구슬이 특이하여 인상 깊어.”
“거기, 무엇들 하는가? 다리 없는 노인보고 오가라는 건 아니겠지?”
이안은 고갯짓하며 랜턴을 왼손으로 쥐었다. 신호였다. 집시를 만났으니, 다들 긴장하라는.
베릭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 킬킬거렸다.
“할매, 안녕. 오래 기다렸어?”
“기다리기는. 그저 내 밤에 네가 온 것이지.”
“말하는 것 보니까 역시 멀쩡하네. 봐봐, 로만드로 님. 나 사고 안 쳤다고요.”
로만드로는 대꾸 대신, 예의 있게 모자 벗으며 고갯짓했다. 그걸 본 집시가 아주 흥미롭다는 탄성을 곱씹었다.
“흐음. 일전에 공원에서 보았던 신사 아니신가?”
“또 봅니다.”
“어찌하여 존대를 하시어? 그날의 신사와 지금의 내가 무엇 다르다고.”
첫 만남은 우연이요, 두 번째 만남은 인연 그리고 세 번째 만남은 필연이라는 말이 있지 않나? 게다가 집시는 운명을 숭배하는 자. 로만드로를 다시 만난 것이 예사로운 일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재밌군. 재밌어.”
“할매. 진짜 재밌는 건 내가 따로 데리고 왔어. 다행인지 모르겠는데, 이안도 할매 만나고 싶어하더라.”
집시의 시선이 아래에서 위로 훑어 올라갔다. 고급스러운 가죽 구두, 단정한 바짓단과 코트, 살랑거리는 금빛 머리칼. 그리고 이안의 압생트 눈과 마주한 순간.
스윽.
집시는 저도 모르게 몸을 바짝 숙여 움직였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느릿하게.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홀린 듯이. 그녀는 팔로 기어 나와 이안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다.
단 걸 찾아다니는 눈먼 개미가 이런 기분일까? 한참을 돌고 돌아 진득하고 달콤한 것을 눈앞에 둔다면, 그 속을 헤집고, 헤엄치고, 헤매고 싶을 것이라.
집시는 가슴 깊이 올라오는 환희를 만끽하며 손을 뻗었다.
“반갑네.”
“오호, 세상에. 세상에.”
“이안 히엘로, 마법부 장관이다.”
“그래, 그래에. 내 살면서 자네 같은 자는 또 처음 본다. 버고스의 왕조차 그대와 같은 맛을 내지는 못해. 이럴 수가. 저 시정잡배 같은 것이 참으로 기특한 일을 해내었구나.”
시정잡배? 가만있다 욕 얻어먹은 베릭이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 하였으나, 로만드로가 재빨리 저지했다.
집시가 이안에게 굉장한 호감을 보이고 있다. 이만하면 일이 수월하게 풀릴 것이라. 괜히 초를 칠 수는 없지. 로만드로는 베릭의 입을 틀어막은 채, 다섯 걸음 뒤로 물러나 주었다.
“이안 히엘로라고?”
“그렇다.”
“이런! 이보게, 자네의 진짜 이름이 있을 터인데? 그것 또한 굉장한 비밀이라. 내게 일러주어. 응? 그렇다면 그대가 원하는 걸 일러주리라.”
진짜 이름, 그것은 이안 베로시온.
하지만 이안은 싱긋 웃으며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시선을 더더욱 자세히 맞추자, 집시는 없는 다리에까지 전율이 뻗는 기분을 느꼈다.
“집시. 그대의 이름은?”
“없다. 나는 비밀을 먹는 자다.”
“그렇군. 그렇다면, 혹 알고 있는가? 버고스 왕국의 왕이 그대를 찾고 있다는 걸.”
“어디 버고스 왕만 그러겠는가? 세상엔 내 배를 가르고 싶어 하는 자가 셀 수 없어. 이 안에는 수천 명의 목소리가 들어있다네.”
…배를 갈라야 하나? 집시의 말에 이안이 잠시 멈칫거렸다. 그걸 알아챈 노인이 장난스레 덧붙였다.
“그대도 내 배를 가르고 싶은가 보군. 하지만 어찌하여 내가 아직도 살아있는지를 명심하시게.”
그녀가 죽으면, 수천 명의 목소리가 터져 나와 귀를 먹게 할 것이며, 케케묵은 사념들이 정신을 미치게 할 것이라.
비밀들은 주인을 되찾아가는 대신, 세상으로 나아가 혼돈을 만들 터. 자세한 것까지는 알 턱이 없었지만, 이안은 세상의 이치를 알고 있었다.
“명심할 것도 없다. 스스로 저를 해치라 꾀는 것들은 독을 가진 것들이니.”
“올바른 이치외다! 하하하!”
“하나 묻겠다. 혹, 내가 무언가의 비밀을 알고자 한다면, 방도가 없는가? 그대는 비밀을 ‘먹어’ 없애는 자라, 그리된 것은 영원히 사라지는 것인지.”
노인이 가까이 다가오라며 손짓했다. 이안이 조심스레 상체를 숙이자, 그녀는 소맷단을 붙잡으며 속삭였다.
이는, 아주 아주 맛있는 비밀을 가진 자에게만 일러주는 특별한 것이었다.
“오래된 것은 소화되어 사라진다. 작은 것들은 더더욱 빠르게 사라지지. 나조차도 어쩔 수 없긴 하다만, 남아있는 것은 되새길 수 있어. 하지만 그만큼 나는 허해져 괴롭다. 그를 대신 채울 수 있는, 아니, 그보다 더하게 풍요로운 비밀을 내어주면 내 그대를 도와주마.”
“…어지간히 굶주린 자로다.”
“그대가 할 말은 아니지. 비밀이 많은 자들은 필연적으로 결핍되어 있더군. 그대는 무엇이 부족한가? 하여, 무엇으로 채우고자 하는가?”
집시의 물음에 이안이 침묵했다.
이안의 부족한 것, 그러니까 원하여 채우고자 하는 것. 그것은 집시의 비밀과 같이 형태가 없고, 보다 본질적이며, 동시에 확고했다.
하지만…….
“비밀이다.”
“아하하! 군침이 돈다, 군침이 돌아.”
집시에게 일러줄 수는 없지. 이제부터 말하는 모든 것이 거래에 사용되는 재화와 같으니까.
이안이 싱긋 웃으며 대꾸하자, 노인은 거의 자지러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텅 빈 거리에 달빛이 환하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안은 로만드로에게 더 뒤로 물러나라는 듯 손짓했다. 비밀을 거래할 시간이다.
“자자, 그 전에 하나 더 일러두겠어.”
집시는 수정구슬을 끼고 의미심장하게 문질러댔다. 그녀의 손짓에 따라 구슬 속의 우주가 나선을 만들며 움직였다. 마치, 인간들의 운명이 맞물려서 휘몰아치듯.
“내가 비밀을 되새겨 토해내면, 그 주인은 그걸 입 밖으로 낼 수 있으니, 비밀이 새어나갔다는 걸 알아챌 것이다. 또한, 처음 먹었던 것처럼 온전치 않아. 시일이 오래 지났을수록 형태만 남아있지. 그래도 상관없다면, 어디 한번 나눠보세. 자네의 비밀과 내 뱃속의 비밀을.”
이안이 거래에 응하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 순간이었다. 문득 깨달았다. 어째서 버고스의 왕이 집시를 찾아다니는지.
‘비밀이 누설되면, 당사자가 알게 된다. 그래서 버고스의 왕이 이리 찾아 나서는 것인가? 누구에게 누설하였는지 알아보고, 완전히 묻어버리기 위해? 아니면 새어나가기 전에 미리 처리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 우선 들을 수 있는 것은 다 들은 다음, 전체적으로 짐작하는 게 낫겠다.’
“왜 그러는가?”
“그대가 오래 산 것이 신기하여서.”
솔직히, 진의 말만 전해 들었을 때는 비밀이 완전히 전소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런 식이라면 참으로 존재 자체가 위태로운 자 아닌가?
집시는 킬킬거리며 수정구슬을 끌어안았다.
“무슨 소리. 무릇 무언가를 먹으면 소화되기까지 시간 걸리는 건 당연한 일. 그것이 단단하고, 크기가 크다면 더더욱 오래 걸리지. 그 후에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맞다. 나는 거짓말 하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아무에게나 이런 제안을 하는 것 같은가?”
그만큼 이안이 가진 비밀이 탐난다는 뜻이었다. 뱃속을 게워내고 그걸 다 채울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비밀이.
이안은 넌지시 마음 구석의 비밀을 꺼냈다. 너무 오래 자리하고 있어서, 어느 순간 은연중에 잊고 있었던 그것.
“…나는 함께하는 자들에게 숨기고 있는 게 많다.”
“네가 내어줄 수 있는 비밀의 밑바닥이 보여. 위의 것만 잘라준다 한들 내 배는 차지 않으니, 부디 모든 걸 드러내라.”
숨기고 있는 것 자체가 비밀이지만, 그 결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게 그녀에게는 식사였으니. 성찬이 있다는 걸 알면서 곁다리만 맛볼 수는 없었다. 집시는 가만있어 보라며 손짓했다.
“배고픈 자가 친절을 베풀 수밖에. 내 먼저 조금 내어주마. 자아, 무엇을 원한다고 하였지? 버고스의 왕들?”
“우선은 ‘죽은’ 선왕의 것들부터.”
집시와의 거래를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죽은 자의 비밀을 먼저 청하였다. 그녀는 선심 쓴다는 듯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사아악.
수정구슬이 발한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로브를 걷었다. 한쪽 볼 옆으로 틈이 나 있었다. 진의 묘사대로 아가미 같기도 하다.
노인은 씨익 웃더니, 고개를 살짝 쳐들고 비밀을 꺼냈다. 볼 옆의 틈이 조금씩 움직였다. 저것은, 비밀을 토해내는 입인 것이라.
“버고스의 이전… 왕과 왕비는… 서로를 증오했다. 그것이 남달라 시도 때도 없이 …의 죽음을 그릴 정도였지. 그 시작은…….”
음성이 희미하고 가늘어서 알아듣기 쉽지 않다. 이안이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가까이했으나, 드문드문 끊어지는 것들이 상당했다. 이전 세대의 비밀이니, 이미 반 이상 녹아내린 게 분명하다.
‘과거 자료를 확인하였을 때, 왕과 왕비의 사이에 관한 특별한 언질은 찾기 어려웠다. 대외적으로는 그래도 문제가 없게끔 하였다는 것이로다.’
“현 왕이 태어나면서부터였다. 총명하고, 흠잡을 것 없는 자식이었으나… 이상하게 아이가 자라면서 문제가 발발하였지. 시간이 지날수록 왕과 왕비는 각자 다른 연인에게서 자식을 보았고, 그들은… 버고스 곳곳에 은밀히 숨어들었다. 존재는 다음과 같다…….”
버고스의 숨겨진 왕실 핏줄이로다. 이안은 그녀가 흘리는 음성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새기듯 들었다. 이것이 현 왕이 알고자 하는 것일까? 어디선가 송곳니를 숨기고 있는 제 형제들을 찾아내고자?
사아악.
집시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의 희끄무레한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듯했다. 수정구슬의 그것처럼. 우주의 그것처럼.
“버고스의 왕은 이걸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내게 일러주었지.”
집시는 이안에게 바짝 다가와 아가미만 벙긋거렸다. 이제는 네가 값을 낼 차례라.
이안은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비밀을 꺼냈다.
“…나는 이안 히엘로가 아니다. 백 년 후의 바리엘에서 온 이안 베로시온.”
“왕과 왕비를 이간질한 것은 자신이라. 그들 사이의 증오는 자신이 불어 일으킨 것이니.”
“…나는 황제였다.”
“자신이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