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87
제287화. 잊어버렸던 한 장
“어라?”
서류를 전달하러 온 마법사가 의아한 얼굴로 멈칫했다.
굳게 닫힌 집무실과 그 앞을 지키는 시종이라니. 새벽에도 불 꺼지는 일 없던 이안의 사무실이 비어있다는 뜻이로다.
오밤중에 어딜 가셨나? 다른 부서 방문? 마법사가 복도 가운데서 멈추자, 시종이 맞이하며 안내했다.
“잠시 외출하셨습니다.”
“외, 외출이라 하면 궁 밖으로?”
“예. 그렇습니다.”
“이런, 제길! 진작 알려주지!”
장관님이 궁 안에 없었다니!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야근 따위 개나 줘버리고 퇴근했었을 것이라.
아니지. 이제는 퇴근보다 도망이라는 말이 어울릴 터. 상사도 없는데 무엇 하러 수명 깎아가며 보고서를 만들어낸단 말인가?
마법사는 즉각적으로 몸을 돌려 복도를 뛰어나갔다. 로비에 모여 늘어져 있던 동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차댔다.
“뛰는 거 봐라. 체력 좋네. 낮에 놀았냐?”
“이안 장관님 궁 안에 없다! 퇴근하셨다!”
“미쳤나 봐. 헛소리도 정성껏…. 뭐!?”
“집무실 비어있으니까 확인해 보시든가.”
“장관님 오늘 외근 일정 없는데?”
“그러니까 퇴근이지. 나는 먼저 간다. 안녕.”
불과 아까 낮에만 해도 별말씀 없으셨는데? 마법사들은 짧은 순간 시선을 맞추었고,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당장 퇴근이다. 당장 집에 가서 숙면하리라. 업무가 남았다 한들, 상관없다. 집무실에 결재자가 없는데, 어쩌라고!
타다다닥!
히이잉!
마법사들이 본관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마차들이 줄지어 들어와 바로 앞에 멈췄다. 그리고 보이는 익숙한 얼굴.
“다들 뭐 해?”
“어? 무슨 일 있는감?”
베릭과 로만드로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내리는 이안이다. 다른 마차에서는 마법사 동료 몇몇 또한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아, 쟤들. 퇴근한 게 아니었구나.
“…문제가 있는 겐가?”
“오, 오셨습니까? 보고서를 서둘러 전해드리고 싶어서. 하하. 이리 마중 나와 버렸네요. 그, 어디 다녀오시나 봅니다.”
이안은 마법사들의 손이 비어있는 걸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저 모른 척, 그들을 지나쳐 지시했다.
“가져올 것이 있다면 가져오라. 내 기다리겠다. 오늘은 특히나 늦게 잘 것 같으니, 언제든지. 외근한 자들은 해산하도록.”
“예. 장관님. 내일, 아니, 아침에 뵙겠습니다.”
“수고했다.”
도망치려던 마법사들은 이안의 뒤를 따라 다시 마법부로 잡혀 들어왔고, 일행은 집무실에 당도했다.
끼이익.
문 닫히자마자, 멀쩡히 서 있던 로만드로가 고꾸라져 소파에 머리를 박아댔다. 신음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며.
“이안, 이거 어찌하나? 안 그래도 찾기 어려운 자였는데, 이제는 더더욱 경계하여 몸을 숨길 것이네.”
“황궁까지 추격에 가담했다는 걸 알아버렸습니다. 아마 이른 시일 내로 바리엘을 떠나겠지요. 국경수비대에 더더욱 주시하라 전언하는 게 좋겠어요.”
이안 역시 겉옷을 벗으며 아쉬움을 표했다.
마법으로 세운 보호막도 무용지물. 마법사가 하늘을 감시하고, 병사들이 골목을 뒤집었으나 놓치고 말았다. 어둠이 제 몸의 일부인 것처럼, 어찌 그리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는지, 원.
“베릭. 아침에 보았을 때는 기어 다녔다고 하였나?”
“응? 어어. 다리 없으니까.”
로만드로 위에 쓰러져서 장난치던 베릭이 대꾸했다. 무게를 있는 힘껏 실어서 눌러대는 모습이다. 로만드로가 저리 비키라며 발버둥 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밤에는 기동에 변화가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까 베릭한테 밤에 보자 했겠지. 혹시나 무슨 일 생기면 도망가려고. 아이고, 좀 비켜봐라! 이놈아!”
비밀이라는 위험한 유혹을 몸에 지닌 자였다. 그런 자가 어찌 이제껏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좀 알 듯했다.
시간이 좀 있었더라면 정보를 얻어 준비할 수 있었을 터인데. 로만드로가 베릭의 볼을 좌우로 늘어트리며 타박했다.
“진작, 응? 진작 말했으면!”
“으어어. 안 까먹은 게 어딘데요!”
그래. 까먹지 않고 이른 게 어딘가 싶다. 이안이 미간을 지그시 누르며 피곤한 낯을 보이자, 베릭이 찬찬히 살폈다. 오랜만에 외출해서 그런 것인가? 어째 평소보다 더욱 힘들어 보였다.
“이안아, 너 괜찮아?”
“…무엇이?”
“안색이 허연데. 할매가 뭔 짓 했어?”
“그러고 보니, 대화가 길더군. 이안, 무슨 얘길 했나?”
로만드로까지 합세하여 이안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너무 가깝다며, 이안이 손을 내저었지만 말이다.
“…버고스의 선왕 비밀을 알아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관계가 굉장히 불안정했던 것 같더군요.”
“현 다몬 왕의 선대를 말하는 겐가?”
“그렇습니다. 다몬 왕 외, 숨겨진 핏줄이 곳곳에 숨어있는 듯합니다. 아마 그걸 알아내고자, 왕이 집시를 찾으려 하지 않았나 싶어요.”
적당한 진실과 침묵이 만나면 거짓이 만들어지는 법. 이안은 버고스 왕의 회귀 사실을 잘라내고, 단편적인 것만 전해주었다.
아는 자가 늘어날수록 새어나갈 구멍이 많아지는 것이라. 이것은 이안만 알고 있는 편이 나았다.
‘미래에 대한 정보는 그자가 더욱 선명하고, 확실할 터.’
그는 같은 시대를 두 번 살고 있으니까. 아무리 이안이 백 년 후의 사람이라도 불리한 지점은 존재했다.
다만, 이제부터는 상대가 누군지 알게 됐으니.
그 자체로 균형이 맞춰졌다.
“다몬 왕의 도착 예정일이 언제였지요?”
“본 임명식 사흘 전이니, 잠시만.”
로만드로는 달력을 통해 날짜를 헤아렸다.
앞으로 보름 조금 안 되게 남은 시간. 3국의 지도자들이 같은 기간 동안 머무를 것이니, 개인적으로 접근하기는 어려울 터.
이안은 무언가를 깊이 고민하는 것처럼 턱을 괸 채 침묵했다.
“3국의 동맹 말입니다.”
“응? 그게 왜?”
“누가 먼저 제안했을 것 같습니까?”
바리엘이 혼란스러운 와중, 기회를 틈타 저들끼리 뭉치자 먼저 제안한 게 누구인지를 묻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루스웨나가 아닐까 싶지. 하이만을 통하여 다른 나라보다 소식 접하는 게 빠르지 않았겠나? 중간에 사절단이 황궁을 방문하기도 하였고.”
전체적인 가능성으로 본다면, 그것이 맞다. 하지만 버고스의 왕이 회귀자라는 걸 안 이상 그를 배제할 수가 없었다.
두 번의 반복된 삶 속에서, 지금이 동맹을 맺기 적기라는 것을 판단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금이 바리엘의 위기라는 방증이요.
“…손님맞이를 단단히 하는 게 좋겠습니다.”
“물론이지. 황궁의 모두가 그리하고 있다네.”
똑똑.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로만드로가 문을 열어주었다. 도망치려다 실패한 마법사가 보고서를 잔뜩 든 채 온 것이라.
로만드로가 문 앞에 서서 그와 대화하자, 베릭이 슬쩍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안.”
“그래.”
“너, 할매한테 비밀 줬지?”
무엇을 주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다. 하지만 이제는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몸. 이안은 서류를 정리하며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너 자는 사이에 맛난 것을 많이 먹었다 하였어.”
“뻥치네. 비밀 먹히면 말 못 한다고, 진 저하님이 그랬거든?”
“알면서 묻는단 말인가? 생각보다 더 대단하구나.”
“나도 비밀 주고, 재밌는 거 듣고 싶다. 근데 할매가 그러는데, 나는 비밀이 없대. 그래서 묻는다. 너 혹시, 내가 식당에서 고기 훔쳐먹은 거 알고 있어?”
“한두 번이 아닌데, 언제를 말하는 거지?”
베릭은 되었다며 심드렁하게 널브러졌다.
집시 생포를 위한 밤 나들이가 마무리되는 시간. 베릭은 그대로 잠들었고, 이안을 돕던 로만드로 역시 옆방으로 가 쓰러졌다.
이안만이 적막을 음악 삼아, 남은 서류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새벽 동이 터오자, 아주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스윽.
이안은 하던 것을 멈추고 문 쪽을 바라봤다. 문 앞에 멈추어 선 것 같은데, 시간이 시간인지라 망설이는 듯하다. 마법사라면 저럴 리 없지. 이안은 진이 일어날 시간이라는 걸 깨닫고 먼저 일렀다.
“…저하이십니까?”
“이안 경.”
“들어오십시오. 일찍 일어나셨군요.”
기침하자마자 바로 온 것인지, 편한 옷차림이었다. 진은 고개를 슬쩍 들이밀며 안타깝게 웃었다.
“설마 안 잔 것이요?”
“오늘은 오후 일정이 여유 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안은 가까이 오라며 의자에서 몸을 틀어 아이를 맞이했다. 혹 자다 깨신 것이라면, 책을 읽어드리겠노라. 다정히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이었다.
“밤중 집시를 잡으러 간다고 하지 않았나? 어찌 되었는지 궁금해서. 버고스의 왕이 신경 쓰는 자이니, 나 또한 신경이 쓰이네.”
아. 황제의 자질을 갖춘 아이라. 신경 쓰여 잠을 설친 것이로구나.
이안은 삐쳐나온 진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며 쓴웃음을 지었다. 면구스러움을 달리 표할 길이 없다며.
“송구하옵니다. 집시가 참으로 비범하여, 놓치고 말았습니다. 아마 얼마 안에 바리엘을 벗어날 듯한데, 국경수비대가 마지막 기회이지 않을까 싶어요.”
“신비로운 자이긴 했어. 별다른 소득은 없었고?”
이안은 로만드로와 베릭에게 일러주었던 것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아이의 벽안이 이안에게 단단히 고정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진은 이안을 깊게 들여다보고 싶었다. 저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그가 보는 것은 무엇이며, 또한 무엇을 보고 싶은지. 궁금하여 생각을 곱씹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또 의문스러웠다.
“왜 그러십니까, 저하?”
“…이안 경.”
아이는 조심스럽게 웃으며 그를 불렀다. 새벽과 꼭 닮아있는 나지막한 목소리다.
“마법부 별채 건설을 진행하려는 의도가 따로 있소?”
뜻밖의 질문에 이안이 멈칫했다. 그는 아이와 시선을 바로 맞춘 다음, 되물었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낸 연유가 있을 터.
“하문하시는 연유를 먼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마법사의 수는 줄었고, 마법부는 더욱이 넓어졌네. 별채가 있어야 하는 이유가 모호하니, 그대의 행동이 의아하여 그렇네. 이안 경의 자금으로 진행하는 것이라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경은 필요 없는 것에 시간과 노력을 쓸 것 같지 않아서.”
진은 주의했지만, 그 아래 침전된 반대의 기색을 숨길 순 없었다. 이안은 잠시 놀란 것처럼 눈썹을 들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이어보라는 듯이.
“그리고 정원에 있는 나무들이 요정의 축복을 받았다 하더라고. 베어냈다가 엄한 일이 일어날까 봐, 내 조금 걱정스럽네.”
걱정스러우십니까? 그렇다면 하지 않겠습니다.
진은 이안이 그리 말해주길 바랐다. 그러면 진 역시 이리 말해줄 것이니.
아니. 그저 모두를 설득하는 게 좋겠다는 의미라.
“저하. 그것은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소문이옵니다.”
“…그런가?”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안의 대답은 기대와 달랐다. 다정하되 뭔가 겉도는 느낌. 내가 반대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하는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아이는 잘 참아냈다.
아직은 아니다. 이안의 대답이 어떤 것이든, 스스로 문제가 없을 때가 적기였으니. 어린 사자의 발톱이 움찔거렸다.
“알겠네. 인제 그만 쉬시게나. 또 쓰러질까 봐 마음이 안 좋아.”
진은 이안의 손을 꽉 붙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서로에게 섞여들며, 새벽의 찬기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안이 화답하듯 아이를 안아주었다.
“마음을 편히 하십시오. 저하. 저하의 평안이 모두의 평안입니다.”
아이가 싱긋 웃으며 집무실을 나섰고, 이안은 아직 따뜻한 제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진이 의구심과 반발심을 품어내기 시작했다. 대견하면서도 미묘한 감정. 그는 따뜻한 손으로 테이블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하이만 사건 때부터 제기된 경계. 가라앉았다가 갑자기 발발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계기가 있나?’
아이는 정원의 나무를 언급하였다. 이는 별채 건설 반대파의 주요 주장 중 하나. 이안의 반대편에 있는 자가 일러준 게 분명했다.
바르사베인가?
아니면…….
‘그런데 종이 하나는 저하가 태워 버렸어. 반이라도 구해볼까 했는데,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버렸더라고.’
저가 태웠던 종이의 흔적을 보다가, 이안은 문득 오래전 필리아의 말을 떠올렸다.
게일이 변절자를 넘겨줄 때, 협박하기 위해 한 장을 날려 버렸다고 하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