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89
제289화. 어린 사자
“집중 좀 해봐. 했던 소리 계속 하잖아.”
“마음처럼 되나? 몇날 며칠 자지도 못했는데.”
“불만 사항 있으면 이안 님한테 직접 말하시고.”
“누가 불만이래? 그나저나 행정부로 갔던 애들 아직 안 왔어? 연락 좀 돌려봐, 여기 바빠 죽겠구먼!”
“비키라고, 아오! 여기 보고서 본 사람?”
“그걸 왜 우리한테 찾아? 이거 도장은 어디갔어?”
“웃기고 있네, 진짜!”
쿠웅! 쿵!
황궁 바깥만큼이나, 안쪽도 정신없는 분위기였다. 특히 행정부와 마법부는 시장바닥이 연상될 만큼 온갖 소란이 점철되어 있었다.
무질서 속의 질서라. 마법사들은 이리저리 엉킨 채로 뛰어다녔다.
“외곽에서 연락 들어왔다!”
“이안 님한테 보고해!”
타닥타닥!
마법사 한 명이 반사적으로 내달렸다. 그가 거친 숨을 내쉬며 인기척을 내자, 로만드로가 고개를 내밀었다. 마치 안쪽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듯이.
“업무 관련한 것인가?”
“루스웨나의 행렬이 중앙에 당도했다 합니다. 앞으로 두 시간 정도 후면 시가지로 들어설 것 같습니다.”
“알겠네. 바로 이르지.”
“부탁드립니다.”
끼이익.
집무실 문이 닫히자, 소란이 차단되어 사그라들었다.
안쪽은 참으로 조용했다. 아마 베릭과 바르사베가 황궁친위대 쪽으로 불려가서 그런 것 같다.
“이안, 들었나?”
“네. 두 시간 정도요. 생각보다 좀 촉박합니다.”
이안은 서류 읽던 것을 덮고 일어났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구김 없는 정복 그리고 고급 가죽 구두까지. 안 그래도 완벽한 외관이 한층 더 멋들어졌다.
그는 천천히 걸어서 치장 중인 진의 뒤로 섰다.
거울을 통해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렸다.
“저하. 치장 받으시면서 다시 한번 상기하겠습니다.”
“그러지. 후우.”
“…루스웨나 왕이 저하께 인사를 올리는 것입니다. 정신을 바로 하세요. 흔들리는 모습은 거울에도 비추지 마십시오. 저하가 알게 되고, 곧 세상이 알게 될 터. 저하는 바리엘이지 않습니까.”
고작 타국의 왕을 대면하는 것으로 긴장하지 말라.
어찌 존엄께서 그런 한숨을 내쉬는 것인가.
이안은 따끔하게 지적함과 동시에, 아이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다정하면서도 단단한 손길. 걱정하지 말라 이르는 그 어떤 말보다 따뜻했다.
정작 진은 너무 긴장하여 알아채지 못한 것 같지만, 시아오시와 로만드로는 이를 눈에 확실히 담아냈다.
“알겠네. 내 명심하지.”
“좋습니다.”
이안은 건반 누르는 것처럼 아이의 어깨를 가볍게 매만졌다. 그의 장난을 느낀 진이 살포시 웃었고, 이안도 웃었다. 마치 그런 표정을 원했다는 듯이.
“루스웨나의 정세에 대해 기억하십니까?”
“에리포니의 왕당파가 집권을 굳건히 하고 있다 하였지. 재작년, 동부의 곡창지대에 가뭄이 들던 때를 틈타 반대파가 결집하였으나, 해결이 원만하게 되면서 크게 힘을 쓰지는 못했다 들었어. 그 반대파의 중심 귀족이 하이만 부인의 고모부라고. 정확히는 두 번째였던 고모부.”
아이는 단조로운 음성으로 공부했던 것을 줄줄이 읊어댔다. 단 한 번도 버벅대거나 막히는 것 없이 말이다.
이는 진의 머릿속에 정보가 완벽히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나? 로만드로는 감격하여 두 손을 모은 채 눈을 반짝였다. 대견해도 이리 대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루스웨나와 클리포포드 그리고 버고스의 관계에 대해서는요?”
하지만 이안은 칭찬 대신 다음 물음을 이어갔다.
두 사람의 시선이 거울을 통해 다시 맞물렸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도, 닿는 지점은 어긋난 것이라. 진은 싱긋 웃으며 대답을 내어놓았다.
“확실한 것이 없으니, 추측은 하되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라.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저들이 이제껏 맺지 ‘못했던’ 3국의 동맹이 지금 이루어졌다는 것.”
“그 까닭도 인지하십니까?”
“물론. 내가 부족해서라네.”
외부적으로 보았을 때, 할 만하다 여긴 것이다. 내란으로 봉쇄된 황궁, 자리를 보전한 황제, 그리고 홀로 살아남은 열 살짜리 아이.
말 그대로 진 혼자였다.
그 옆에 이안이 있긴 하지만…….
‘이안 경의 존재가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는 또 모를 일.’
득이면서 동시에 실이었다.
강하고 유능한 마법사의 존재는 바리엘에 힘이 되지만, 그만큼 진의 입지를 낮춰버리기 때문에.
3국의 지도자들은 열 살 난 아이에게 머리를 조아리기보다, 그 뒤에 서 있는 이안과 대화하고자 할 것 아닌가?
이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임과 동시에, 진이 이겨낼 첫 관문이다.
“…저하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이안은 잠시 침묵하더니, 정정해 주었다.
사락, 아이의 귓가 머리칼이 이안의 손끝에서 가볍게 흔들렸다. 치장을 계속하라는 그의 눈짓에, 시종들이 바삐 움직였다.
머리칼이 빗기고, 옷매무새가 단정해졌으며, 작고 화려한 보석 따위가 가슴팍에 달렸다.
오늘따라 유독 얼굴의 상처가 도드라져 보이는 것 같다. 진이 저도 모르게 손끝으로 흉터를 매만지자, 이안이 덧붙였다.
“3국의 그 어떤 지도자도 저하처럼 강인한 증표를 가진 자가 없겠지요. 자부심을 품으십시오. 오늘 아주 멋지십니다.”
“고맙네. 이안 경. 자네도 멋있어.”
“이안은 뭐, 옷을 거꾸로 입어도 멋있지요! 저하, 이제 슬슬 출발하시지요. 시간이 다 되어갑니다. 시아, 마차 준비가 되었는지 마지막으로 확인 좀 해주게.”
“네. 알겠습니다.”
로만드로 역시 회중시계를 살피며 거들었다.
진은 마지막으로 거울을 점검한 다음, 의자에서 내려왔다. 손을 잡아드릴까요? 이안이 물으려 하였으나, 그럴 새도 없다. 아이는 집무실 문을 젖히며 먼저 앞서나갔다.
“출발할 것이다. 다들 따르라.”
“예. 저하.”
타닥타닥!
시종들과 이안 그리고 로만드로가 작은 발걸음을 따라 함께 걸었다. 준비된 마차 옆, 시아오시가 서 있다. 그는 진을 발견하고 허리를 숙이며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이안은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가죽 장갑을 꺼내 들었다.
“이안, 왜 그런가? 손 시려?”
“아무것도요. 갑시다, 로만드로 님.”
이안은 싱긋 웃으며 장갑을 끼었고, 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마차가 힘차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루스웨나의 왕, 에리포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 열렸다.
* * *
“저기! 마차가 온다! 세상에, 2층 마차잖아?”
“역시 왕의 행렬은 달라도 다르군.”
“이쪽으로 올라와! 여기가 더 잘 보여!”
“엄마! 엄마! 루스웨나에서 마차가 들어왔어요!”
“우리 주점으로 오세요. 왕의 행렬이 아주 잘 보입니다! 맥주는 단돈 1동(銅)! 선착순으로 열 분만 모십니다!”
“꺄아아아! 뛰어! 계속 따라가서 황궁까지 가자!”
점심이 지나가는 시각.
루스웨나 왕의 행렬이 시가지에 당도했다. 황족만 걸을 수 있다는 중앙의 도로 옆. 귀한 손님들을 위해 길이 터 있었다.
병사들이 창으로 인파를 저지했고, 파견된 마법사들이 혹시나 싶어 함께 걸으며 안전을 지켜냈다.
수십 개의 2층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는 장관이라. 시민들은 연신 탄성을 내지르며 에리포니의 방문을 환영했다.
“루스웨나의 왕이시어! 환영합니다!”
“어서 오세요! 이곳이 바리엘입니다!”
“무엄합니다. 뒤로 물러서시오!”
“뭐 어떠한가? 좋은 날, 좋은 손님이시거늘!”
“그래.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마!”
드르륵. 드륵!
타앗!
사람 키만 한 바퀴 대여섯 개가 동시에 움직이는 모습은 아이들의 호기심을 끌었고, 낯선 옷차림은 젊은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마차 뒤에 잔뜩 실린 금은보화와 진상품은 어른의 흥미를, 악단의 연주는 눈먼 노인의 즐거움을 이끌었다.
안 그래도 행렬 자체가 거대해서 더디거늘, 마차의 속도가 걷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놀랍게도 활기차군.”
루스웨나의 왕, 에리포니는 부채로 커튼을 살짝 걷은 채 중얼거렸다. 꽤 긴 거리를 며칠에 걸쳐 달려왔으나, 그녀는 궁에서 출발했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단정하게 빗어내린 청록색 머리칼, 꼿꼿한 허리, 예리한 눈매까지. 에리포니는 들뜬 사람들을 대충 흘겨보며 다시 커튼을 내렸다.
“황제가 생사를 오가고, 열 살짜리 아이가 그 뒤를 이을 판인데. 생각보다 걱정들이 없어 보여.”
“황궁이 휘청인 것은 사실이나, 지금은 또 중심을 잘 잡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는 황궁친위대와 제국방위부의 인재 선발 시험도 있었다 합니다. 그 여파가 계속 이어지는 탓도 있겠지요.”
대답한 것은 맞은편에 앉은 엘더트였다. 에리포니의 사촌 오라비이자, 사절단이었던 사내. 청록색 긴 생머리부터 풍기는 분위기, 이목구비 따위가 판박이다.
에리포니는 입매를 비틀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내란에서 손실이 있긴 있었나 보군. 인재 선발까지 대대적으로 열고. 하이만 및 중앙 가문의 재판에는 방청권까지 팔았다지?”
참으로 알 만하지 않나? 일시적이지만 확실한 세수 확보가 목적일 것이라. 소문을 해석하면 할수록 바리엘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지레짐작 할 수 있었다.
에리포니는 뻐근하다는 듯 어깨를 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버고스 왕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이리 발걸음 할 만한 자리가 아니지 않나.
고작 어린 황자의 임명식인데.
“버고스랑 클리포포드는 언제쯤 도착한다는가?”
“일정 맞춰서 온다 하였으니, 큰 차이 없을 것입니다. 문제만 없다면요.”
그때였다. 마차가 훨씬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지나, 황궁 가까이 온 것이라.
에리포니는 처음으로 보는 바리엘의 위상에 잠시 넋을 놓았다. 저의 왕국 또한 아름답기로는 유명하지만, 이는 미(美)적인 관점을 한참이나 지난 비교 대상 아닌가?
“대단하네.”
“루스웨나만큼은 아니지만요.”
“헛소리.”
그녀는 단호하게 일갈하며 다시 품위를 지켰다. 이쯤 하니, 어째서 버고스의 왕이 바리엘의 황궁에서 만나자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에리포니의 아비는 현 황제의 취임식 때 참석하여 황궁을 본 적 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왕으로 즉위한 다음, 엘더트를 통해서만 바리엘을 짐작하곤 하였다. 설명만 전해 들었을 때는 대단한 위용이라 생각만 하였는데.
이리 실제로 보니 참으로 대단하다.
“버고스 왕이 왜 나를 이리로 불렀는지 알겠다.”
“보니까 놀랍지요? 다몬 왕의 제안이 매력적으로 느껴지실 것 같습니다.”
“그래. 확실히.”
에리포니와 엘더트는 작게 속살거리며 저들끼리 눈짓해 보였다. 마차 안에는 아무도 없지만, 혹 모르는 일 아닌가? 마법사들이 저들을 도청하고 있을지.
끼이익.
히이잉!
“에리포니 저하.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본궁 앞에서 멈췄다. 그들을 기다리는 인파가 주위에 가득했다. 황궁의 수상과 관료들이 모두 나와 있던 탓이라. 마차의 문이 열리고, 계단이 길게 늘어졌다.
차라락.
에리포니는 긴 머리칼을 잡고 천천히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녀를 처음 보는 관료들이 놀라서 흠칫거렸다.
초상화로만 보았을 때는 막연히 일반적인 여인을 생각했건만, 실제로는…….
“키가 엄청 크시군.”
“거인족의 피가 섞여 있나?”
“쉬잇. 어찌 그런 말을!”
팔 척에 달하는 거대한 키가 압도적이었다. 수상은 앞으로 나와 에리포니에게 허리를 숙였다.
“루스웨나의 왕이시어. 먼 걸음 오시느라 고단하신 마음 알지만, 저희 황자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물론. 인사를 올려야지.”
삼백안의 눈동자에는 전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안 담겨 있지만, 어찌하겠나? 그녀는 엘더트를 데리고 수상의 뒤를 따랐다.
스윽.
“이쪽입니다. 저하. 루스웨나의 에리포니 여왕이 도착했습니다.”
“들라 하라.”
에리포니는 저도 모르게 슬쩍 웃고 말았다. 영락없이 앳된 아이의 목소리. 이내 문이 열리고, 소파에 앉아있는 진과 마주할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먼 거리 오느라 수고했소.”
“…아닙니다. 저하.”
진을 처음 본 에리포니의 감상은 딱 하나였다.
‘귀엽군. 어린 사자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