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9
제29화. 실라스크
대답이 늦어지자, 카칸티르가 이안을 돌아봤다. 이안은 고개를 살짝 아래로 내리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늘을 섬기는 부족인지라 그리 질문한 것일까? 아니면 이안의 내면에 또 다른 이안이 들어서 있는 걸 알고서 질문한 것일까? 윈첸은 이안의 간단명료한 대답을 곱씹는 것처럼 입맛을 다셨다.
“데르가 브라츠의 피로 태어난 자가 맞고?”
“분명합니다.”
“자네의 존재가 곧 평화를 뜻하는가?”
“맹세코, 평화만이 제 존재 이유입니다.”
윈첸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카칸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종들에게 무언으로 지시했고, 그들은 윈첸을 다시 이부자리에 눕혔다.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푹 쉬시게, 우두머리여. 요즘 사막의 폭풍은 너무 거칠어. 하늘이 더욱 뜨거워진 탓이지.”
노인의 힘 없는 중얼거림만이 천막에 감돌았다. 이안이 밖으로 나오자, 긴장하며 굳어있던 천려 일족이 카칸의 표정을 살폈다.
“이안 브라츠와 일행에게 천막을 내주어라.”
이안이 브라츠 가문의 자식이 맞는다는 걸 돌려서 공표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고단한 화친의 모든 일정이 공식적으로 완료되었음을 뜻했다.
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안을 불렀다.
“이안. 이쪽으로.”
“나는? 같은 천막을 쓰나?”
“그러면? 뭐 귀한 몸이라고 방을 따로 내주리?”
수가 쏘아붙이자, 베릭이 이안에게 속삭였다.
“아무래도 전사치고는 속이 너무 좁다. 왜 나한테만 저러는지 모르겠다니까? 따지고 보면 그날 조롱을 시작한 건 네가 아닌가?”
“글세, 베릭. 직접 주먹을 꽂아 넣은 건 너지.”
“어어? 이렇게 발을 빼겠다고?”
이안에게 내려진 천막은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았다. 특별히 좋다고는 못하겠다만, 적국의 제물이라고 해서 하대하는 느낌은 없었다.
‘거참 이상하다. 데르가의 친형이 국경을 넘어서 죽은 뒤로는 상당히 냉랭한 관계가 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그때의 족장과 지금의 카칸티르는 다른 사람이다. 쉽사리 바뀌는 우두머리의 특성상, 이들의 역사에서는 꽤 옛날 사람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인식이나 관계 방식이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들은 브라츠 저택에서 들은 것만큼 무자비한 자들이 아니었다.
‘냉정하되 냉혈 하지 않고, 자유롭되 야만적이지 않다.’
이것이 이안의 평가였다. 베릭은 모래로 엉망이 된 짐을 풀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우선 좀 씻어야겠다.”
“말고. 여기서 평생 살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하지만 이안이 바리엘로 돌아가려면 몰린이 중앙에서 감찰관을 이끌고 데르가의 목을 벤 이후여야 했다.
아마 지금쯤 겨우 중앙에 도착했을 터. 내려오고 거사를 치르려면 보름에서 한 달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여행 왔다고 생각해. 여기는 네가 이기지 못할 자들이 천지니까, 매일 한 명씩 상대해도 1년 금방이겠군.”
“1년? 거짓말이지?”
“농이다. 보름. 길면 한 달이겠군.”
베릭이 눈으로 쌍욕을 내뱉으며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떠도는 인생, 침대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다만, 사막의 더위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됐다.
“이안.”
차악-
수가 천막을 걷으며 들어왔다. 그녀는 옷가지와 간단한 요깃거리를 내놓으며 방 안을 둘러봤다. 부족한 건 없는지 살피는 눈치였다.
“일단 먹어. 다들 여독을 푸느라 정신없거든. 해가 지면 귀환식이 있으니 다시 부르러 올게. 아. 그리고-”
서둘러 나가려던 수가 멈칫거리며 뒤를 돌았다.
“잔갸룽이 그랬어. 폭풍, 정말 거셌다고. 그가 지금껏 만났던 것 중 제일 크고 위협적이었대. 맨몸으로 뚫은 거라 날아간 물건은 없지만, 만약 일행이 만났다면 곤란했을 거라고.”
“그래.”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이안이 미소 지으며 공을 카칸티르에게 돌렸다.
“족장님의 판단이 참으로 현명했다.”
저들의 우두머리를 칭하는 말에 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슬쩍, 천막을 나가버렸다. 멍하니 그걸 보고 있던 베릭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저게 나한테만 그러는 거 맞네.”
“서운한가?”
“됐거든!”
베릭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침대로 뛰어들었다. 모래를 그대로 묻힌 채, 그는 바로 기절하듯 쓰러졌다. 장장 며칠 동안 밖에서 바람맞으며 지낸 탓이다. 이안 역시 고민하다가,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 * *
쿵쿵! 쿵! 쿵!
어디선가 울리는 북소리에 이안이 눈을 떴다.
바깥은 어두웠다. 밤이 온 것이다. 방 안을 비추는 것이라고는 우유처럼 빛나는 은하수뿐. 이안이 베릭을 흔들려는 순간, 수가 다시 천막을 걷었다.
“이안? 베릭?”
“으음…….”
“어서 나올래? 다들 기다리거든.”
아직 꿈에 취한 듯 몽롱하다. 이안과 베릭은 수의 뒤를 따라 비틀거리며 따라갔다. 주둔지 안쪽에 세워진 흰색 건물. 수가 문을 열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아하하하!”
“한 번 더! 이봐, 벌써 그러면 쓰나?”
“내가 저번에 말했던 거 있지? 그게 맞았더라고!”
붉은 안료와 황금으로 치장한 천려인들이 춤추며 놀고 있었다. 그들 사이사이에 쌓인 엄청난 양의 고기와 술. 초를 태우는 것인지, 은근한 연기가 가득했다.
무희가 스쳐 지나가며 웃었고, 악단들 역시 곡을 더욱 빠르게 연주했다.
“세상에.”
이런 연회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주황빛 등불 아래서 모든 것이 자유로워 보였다. 베릭도 잠이 확 깬 것처럼 두 볼을 비볐다.
“이안. 베릭.”
그 상석에 앉아 있는 카칸티르가 둘을 불렀다. 그의 입에는 마른잎이 물려있었다. 횃불 아래 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구룻잎.’
저것이 구룻잎이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안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윈첸의 천막에서 맡았던 향과 상당히 흡사하다. 계피가 아니라 구룻잎이었던 모양이다.
“아. 기분이 왜 이러지?”
“어떤데?”
“…다 존나 패고 싶어.”
“입 다물고 있거라.”
둘은 속닥거리며 카칸티르 가까이 다가갔다. 그 옆에는 네르사른을 비롯해 부족의 윗계급으로 보이는 자들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여독은 좀 풀었는가?”
“족장님의 배려 덕분에요.”
“그래. 일단 앉지.”
모두가 이안을 주목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다시 향락을 즐기며 웃고 떠들었다. 카칸티르가 이안의 잔에 포도주를 따라주었다.
“혹시 말일세. 자네가 준 지도. 백작을 비롯한 브라츠의 누군가가 지도의 존재를 아는가?”
“아니오. 교사가 제게 은밀히 넘겨주고 간 것입니다. 그는 즉시 브라츠를 떠났으며 위쪽 나라를 통해 블라스터로 향했습니다.”
카칸티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굉장히 호의적인 눈짓으로 고기를 들라 권했다. 부하들에게 폭풍에 대하여 보고를 들은 모양이다.
“자네의 모든 것은 브라츠가 천려를 위해 준 것이니, 이 지도 또한 천려를 위해 써도 되겠는가?”
“그리하십시오.”
어차피 브라츠로 돌아갈 때는 천려족이 동행할 것이었다. 그 이후로는 대사막을 건널 필요가 없으니, 지도를 지니고 있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작은 것을 내어주고 큰 그림을 그리는 편이 나았다.
“데르가 백작이 아들 하나는 잘 키웠군.”
“아버지가 들으시면 참으로 기뻐하실 겁니다.”
대화는 거기서 멈추었다. 노랫소리가 점점 더 커졌기 때문이다. 잠시 구룻잎에 대해 고민하던 중, 이안은 낯선 시선을 느꼈다.
‘음?’
네르사른에게서 두 번째로 떨어진 자리. 한 사내가 이안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니, 입매를 가볍게 말아 올리며 모종의 신호를 보냈다.
“수. 저자는 누구지?”
잠시 주위가 흐트러졌을 때, 이안이 사내를 턱짓하며 물었다. 수가 포도주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부마트? 네르사른 님의 가족이지. 둘째 계모의 사촌 오라버니거든. 식량 관리 총책임자셔.”
이해는 잘 가진 않지만, 어쨌거나 이들의 개념으로는 가족으로 엮이는 것 같다. 상석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 위치도 꽤 있고. 근데 왜 자꾸 저를 쳐다보는 것인가?
‘찜찜하군.’
이안은 그의 시선을 일부러 털어내며 수에게 물었다. 최대한 천진난만하게. 호기심 외에는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았다는 듯.
“다들 물고 있는 게 구룻잎이라는 건가?”
수가 고개를 끄덕였고, 이안은 혹시 자신도 시향이 가능한지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카칸티르가 술잔을 내밀며 대화를 잘랐다.
“이안. 그대가 이곳에서 안전하게 지내려면 지켜야 할 수칙이 몇 가지 있다.”
“말씀하십시오.”
“그중 하나가 바로 구룻잎에 관하여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는 것이다. 질문도 허락하지 않아. 생활상 연기까지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 이 외에는 전부 불허한다.”
그 말은, 연기로 맡는 것과 직접 씹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연회 분위기가 조금 차분해졌다. 카칸티르의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날선 경계심을 세운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 대답했다. 옆에 있던 베릭은 고기를 주워 먹느라 서로가 서로에게 안중 밖이었다.
“그럼 즐기게나. 우리의 귀환을 위하여.”
“네. 카칸티르 족장님.”
그래. 이 자리는 귀환식. 이방인을 위한 환영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안은 대충 전반적인 분위기 파악을 끝내고, 자리를 마무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족장님!”
일족 한 명이 빠르게 다가와 카칸티르의 귀에 뭔가를 속삭였다. 그는 단번에 먹던 것을 내려두고, 네르사른에게 눈짓했다. 유흥을 즐기는 자들은 너무 취한 나머지, 우두머리들이 빠져나가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무슨 일이지?’
수는 가만히 바닥만 보다가 중얼거렸다.
“윈첸 부족장님이 또 발작을 일으켰나 봐. 방금 의원이 뒤따르는 것 같았어.”
“그래?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가 보군.”
“다들 걱정할까 봐 족장님이 먼저 저렇게 보셔.”
“방도는 없나?”
수는 희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의원조차 그걸 막을 수는 없었다. 그저 윈첸 님이 너무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랄 뿐.
“베릭. 우리도 이만 가지.”
“에? 왜? 나 더 먹어야…….”
“어서.”
혹여 윈첸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이 자리에 없는 것이 덜 어색할 것이다. 그때는 수도 자신들을 챙겨줄 수 없을 테니까. 적당히 즐겼으면 적당히 빠질 줄 알아야지. 자리의 주인공은 저들이 아니니, 이만하면 충분하다.
타닥타닥!
그리고 그 판단은 옳았다.
새벽 아침. 소란스러운 바깥소리에 이안의 눈이 절로 떠졌다. 마치 전쟁이라도 난 분위기다.
“윈첸 님이 아예 의식불명이라고?”
“아아…. 세상에. 이걸 어쩌면 좋아.”
“족장님은? 어떻게 하실 거래?”
“사람을 다시 차출할 거라 그랬어. 이제 병세가 너무 뚜렷하니, 어쩔 수 없나 봐.”
사람을 차출해? 윈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뭔가 조치를 하려나 보다. 이안은 창문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잠들락 말락, 정신이 몽롱해졌다.
“실라스크를 찾는 거지?”
“먼저 갔던 사람들도 아직 안 돌아왔는데…….”
“만개한 채로 영원히 가는 꽃이 어디 있어? 난 존재부터가 의심스러워.”
그때, 이안의 눈이 번쩍 떠졌다.
지금 저들이 뭐라 하는 건가? 만개한 채로 영원히 가는 꽃? 실라스크?
‘그때 공원에서 산 화분이군요.’
‘희한한 꽃이에요. 만개한 상태로 오래가더군요.’
‘저택 사람들도 이게 뭔지 모른답니까?’
‘네. 다들 처음 보는 식물이라 합니다. 혹여 독성이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안은 저택에서 몰린 경과 떠올렸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상자 안에 잘 포장된 화분을 꺼내, 종이를 뜯었다. 공원에서 받은 이후로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붉은 꽃.
“…어?”
설마, 아니겠지?
이안은 조심스럽게 바닥에 화분을 내려놓았다. 곧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어째서 자신이 서자 이안의 몸으로 환생한 것인지.
모든 것은 신의 계획 아래에서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