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91
제291화. 악취미
의아했다. 이안이 자리를 비운 고작 십여 분의 시간. 응접실의 분위기가 금방이라도 파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루스웨나 측은 막 도착한 손님들이기에 오래 인사 나눌 것이 아니긴 했다. 의례적인 안부와 진상품을 알리고, 앞으로 있을 공식 일정에 대해 언질을 주고받으면 될 일.
하나, 이것은 너무 이르다.
로만드로는 이안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닥거렸다.
“그, 왕께서 생각보다 호전적이시군.”
아주 짤막한 표현이었으나, 모든 걸 담고 있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생각보다’라는 것.
확실히, 그녀는 생각보다 기골이 장대했으며, 생각보다 기상이 상당했고, 생각보다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안은 로만드로를 물리고, 진 가까이 다가갔다.
“이안 경.”
진의 낯에 화색이 살짝 돌았다가 사그라든다. 금방이라도 파할 것 같았던 자리가 이안의 등장으로 새로이 분위기를 이어갔으니까.
우선, 에리포니가 등받이에 몸을 기댄 것부터가 그러했다. 그녀는 이안의 소개를 기다리는 것처럼 무릎에 손을 올리고 미소만 머금었다.
“문제는 없다 하는가?”
“예, 저하. 심려 끼쳐드려 송구하옵니다.”
“아닐세. 에리포니 왕께 인사를 올리시게나. 이쪽은 대제국 바리엘의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 경일세.”
이안이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인사하자, 에리포니는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응수했다. 엘더트에게 전해 듣기는 했다만, 이거 원. 제국의 미래가 이 어린것들에게 달려있다니. 그녀는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이안을 치하했다.
“히엘로 경에 대한 찬사는 루스웨나까지 자자합니다. 어린 나이에, 고난을 헤치고 제국에 이바지하는 천재 마법사시라고요.”
“과찬이십니다. 저 역시 루스웨나의 명성을 익히 들었습니다. 마법사들에게 기회의 땅이라고요.”
가운데 끼어있던 수상이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며 당혹스러운 낯을 숨겼다. 이건 마치, 악수를 청하며 서로를 푹푹 찔러대는 것과 같았다.
에리포니가 언급한 ‘고난’에는 변경의 서자 출신이라는 내막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안이 말한 ‘기회의 땅’은 마법사가 거의 없어 발전이 더딘 것을 의미했다.
응접실을 빙 두른 채 그들을 주시하던 각각의 세력들이 작게 술렁이며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린 자라 하여도 마법사는 마법사인가 봅니다.’
‘현 황궁의 실세 아니던가.’
‘천민 출신이라 들었는데요.’
망설임 없이 그리고 두려움 없이 받아치는 행동에서 이안의 존재감과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엘더트가 은근슬쩍 에리포니를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열 살 난 어린 황자와 달리, 이안은 쉬이 보면 안 된다. 그러하니, 도발은 그쯤 하시라.
“마법부에 문제가 생겼다 하여 잠시 자리를 비웠더니, 두 분의 대화 흐름을 끊고 말았습니다. 무례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안은 진에게 허리를 숙이며 은근한 미소를 지어냈다. 이는 아이가 직접 현 상황을 일러줄 수 있게끔, 포석을 깔아주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여 진이 무슨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지 말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아니. 그저 에리포니 왕이 진상품을 제외한 선물을 올리는 중이었어.”
“오, 그러시군요.”
“다만 아쉬운 것은, 성의를 보이려면 시일이 오래 걸릴 것 같다는 것이지.”
진이 눈짓하자 시종이 활 담긴 갑 뚜껑을 열었다. 선물 대상자와 맞먹는 거대한 활이 아닌가. 이안은 기민하게 그 의미를 알아채고 눈썹을 까딱였다.
‘흐음, 이것들 봐라?’
하지만 에리포니 역시 이안과 진의 미세한 감정을 알아채는 중이었다. 복잡하고 미묘하여 하나라 짚을 수 없는 관계의 색.
이리 보면 분홍빛이요, 저리 보면 자줏빛이고, 또 잠깐 보면 푸르게 느껴지다니.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활이라 제가 실수를 하고 말았지요. 저하, 부디 노여워 마시고 가락풀이 늘어지면 꼭 제게 일러주십시오.”
에리포니는 이안의 반응을 확인해 보기 위해, 다시금 돌을 던졌다.
같은 모욕을 두 번이나 받았음에도, 진은 여전히 고민하며 멈칫거렸다. 수많은 선택지가 손에 들려있었으나, 한 번의 잘못된 결정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까 봐 신중한 탓이다.
이안은 동글동글한 아이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손끝을 매만졌다.
‘자국의 귀족도 아니고 타국의 왕이다. 외교적인 관계가 틀어지면 제일 고통받는 것이 제국민들이니, 진으로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엘더트를 만나긴 했으나 고작 한 번. 경험에 비하여 상대가 비대한 건 사실이라.’
게다가 로만드로도 놀랄 만큼 루스웨나의 왕이 거침없다. 여기까지는 밀어붙여도 좋다, 여기는 넘어선 안 될 선이다, 일러주는 자가 없으니 진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했다.
황궁 내 정제된 정보로만 대비하기에는, 왕의 태도 변수가 날카로운 것이라.
“저하.”
이안이 다정하게 진을 불렀다. 벽안이 이안을 바라보며 답을 갈구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고운 미간이 조금 굳어있었다. 임명식이 지나면 아이는 진정한 제국의 후계자가 되는데, 스스로의 부족함을 마주하는 것만큼 괴로운 게 어디 있겠나? 이안은 싱긋 웃으며 제안했다.
“그래도 왕께서 직접 준비한 것이니, 선물을 받았으면 화답해 보이는 것이 어떠신지요?”
“무슨…….”
진이 알 수 없다며 말끝을 흐렸다. 화답을 해 보이라면, 활을 쏘아보라는 것인데…….
“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에리포니 역시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덧붙였다. 이 자리에서, 활을 대체 어떻게, 무엇을 위하여 쏠 것이란 말인가? 그녀의 물음에 이안은 정중하게 답했다.
“오 이런. 에리포니 왕이시어. 루스웨나는 어떠한지 제가 잘 모르지만, 바리엘의 황궁에는 방종한 짐승이 없습니다.”
“……!”
“……!”
응접실 모두가 숨을 틀어막았다. 냉기 품은 공격이 아슬아슬하게 오간 것은 사실이나, 이처럼 노골적인 발언은 처음이었다.
왕은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등받이에서 몸을 뗀 다음 입술을 꽉 다물었다. 독기가 뚝뚝 흘러내리는 눈매가 독사의 그것이다. 이안은 못 본 척, 갑에서 활을 꺼내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활은 고정시킬 방법이 많다고 하여도, 화살의 길이가 특히 문제로군요. 저하. 지금 바리엘에는 저하의 임명식을 축복하기 위해 꽃가루가 휘날리고 있습니다. 그것에 힘을 더해보시겠습니까?”
지이잉. 지잉.
이안이 마력을 개방하자, 루스웨나의 사절단들이 모두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마법이다. 그 말로만 듣던 장관의 마법!
루스웨나에도 마법사가 있긴 하다만, 굉장히 소수였고, 사실상 왕궁 소속이라 하기에도 어폐가 있었다. 실력 차이는 말할 것도 없는 문제라.
“이안 경.”
이안의 손과 손 사이로 길고 가는 빛이 생겨났다. 분홍빛으로 아름답게 일렁이는 그것은, 이내 형태를 조금씩 갖추며 화살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진 겁먹을 것 없다. 루스웨나의 왕이 너를 도발한다면, 걱정하지 말고 받아주어라. 너는 그리해도 된다. 그리해도 되는 바리엘이다.’
이안은 손끝을 가볍게 움직이며 빛줄기를 다듬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이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일렁이는 따뜻함. 이는 예전에, 이안의 마력구를 손으로 만졌을 때와 같은 느낌이다. 진은 빛 안에서 자글거리는 입자를 내려다보았다.
“…통창을 열어보라.”
스으윽.
진의 명령에 시종들이 분주하게 움직여 벽면의 거대한 창을 밀어냈다. 한 면이 시원하게 뚫리며 황궁의 드넓은 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원하게 들이닥치는 바람. 에리포니는 흔들리는 머리칼을 한 손으로 잡으며 다리를 꼬았다. 감히, 황자 앞이었지만.
“활을 잡아드리겠습니다. 시위만 당겨보십시오.”
이안이 한 손으로 활을 잡아주고, 아이는 자세를 잡아 활시위를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가락풀이 부드럽게 늘어져 유연한 곡선으로 휘었다.
이내 작은 손 끝에 걸리는 이안의 마력 화살. 가락풀이 귓가에서 울어대며 희미한 운율을 만들어냈다.
위이잉. 위잉.
진은 푸른 하늘을 겨냥하여 활시위를 놓았다. 아주 작은 힘이었으나, 화살은 의지를 가진 것처럼 곧장 하늘로 뻗어 오르며 터졌다. 파훼되어 반짝이는 것들은, 온종일 흩날리는 꽃가루에 스며들어 사라졌다.
솨아아아!
퍼엉! 펑!
활시위 놓은 진의 손길을 따라 강한 바람이 휘몰렸다. 그와 동시에 끊어지는 활시위.
피잉!
제아무리 장인이 몇 번이고 꼬았다 한들, 당연히 마력을 받아내기에는 무리였다.
진은 햇살을 받아 늘어진 활시위를 보며 에리포니를 돌아봤다.
“에리포니, 가락풀은 세월에만 늘어지는 것이 아닌가 보오.”
왕은 대답 대신 아이 뒤쪽으로 연신 떨어지는 꽃가루를 쳐다봤다.
벌건 대낮에 쏟아지는 별들이 저런 것인가? 왜 시인들이 마법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노래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음을 머금었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송구할 것 없네. 다만, 가락풀을 갈아주겠다는 약조를 지켜주길 바라네. 도로 가져가서 수선하여 보내주시오.”
선물 받아주긴 할 건데, 다시 도로 가져가서 알맞은 크기로 맞춰오라는 뜻이었다. 진의 몸집을 알게 된 이상, 가락풀만 새로이 끼워 보내지는 못할 터.
에리포니는 우아하게 고개를 까딱거리며 받들겠다 대답했다. 가져온 선물을 다시 그대로 가져갈 상황은 전혀 예상 못 했지만, 어쩌겠나. 저쪽에서는 성의를 보였고, 이쪽에서도 성의를 보일 차례다.
“그럼 진상품을 정리하고…….”
진은 무어라 명령하려다 멈추었다. 아이는 미소를 활짝 지으며 에리포니 왕에게 양해를 구했다.
“우선 검사를 좀 해야 할 것 같군.”
“검사라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얼마 전에 드래곤 항원항체 이상 과민 반응을 보인 자가 신고되어 황궁에서 조사를 진행 중인데, 그 출처가 루스웨나의 물건이라는 소견이 있어서. 간단한 방역 절차이니 금방일 것이라. 따라주시면 고맙겠소.”
에리포니가 엘더트를 돌아봤다. 저게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하지만 엘더트 역시 알 리 없지 않나. 아코렐라의 발병은 황궁 내에서만 쉬쉬 되는 것이었으니까.
“우선은 푹 쉬시고, 이에 관한 사안은 따로 자리를 마련하지. 오시느라 고생하였네.”
진은 그만 물러가도 좋다는 듯 손짓했고, 시종들이 진상품을 하나씩 들고 밖으로 옮겨 나갔다.
에리포니는 머리칼을 정리한 다음, 진에게 인사를 올리고 응접실을 나섰다. 사절단들이 일사불란하게 왕의 뒤를 따르며 의아한 속삭임을 나누었다.
“드래곤 항원항체 반응이라니?”
“전염병 말하는 것 아닌가? 그거 사라진 지 꽤 되었는데, 어째서 갑자기?”
“루스웨나에 드래곤 사육지가 있긴 한데, 바리엘에는 없는 것인가?”
타닥타닥!
에리포니는 마차에 올라타 창밖만 바라보았다. 황궁 관료가 말을 타고 앞장 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임명식 기간 동안 묵을 별궁으로 안내하기 위함이다.
맞은편에 앉은 엘더트가 조심스럽게 왕을 불렀다.
“전하.”
“드래곤 전염병이라니. 들은 바가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
“없는 것을 지어낸 것 같지는 않은데…….”
“그것은 별궁에 도착하여 제가 따로 알아보겠습니다. 한데, 저하.”
왜 자꾸 부르냐면서, 에리포니가 고개를 휙 돌렸다.
“진 황자 저하에게 조금 과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
“아무리 어려도 미래의 황제이지 않습니까.”
에리포니는 그저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중얼거렸다.
“…귀엽더라고.”
“악취미이십니다.”
그녀는 엘더트에게 조용히 하라며 눈짓하였고, 여전히 흩날리는 꽃가루만 쳐다보았다. 아까 진이 쏘아 올린 것인지, 아니면 원래 이리 반짝였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참 탐나는 황궁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