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92
제292화. 감내할 것
응접실은 조용했다. 루스웨나 측의 사절단이 모조리 빠져나가면서 황궁의 관료 대부분이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임명식 준비는 당연하고, 각국의 손님들을 맞이하고 대접하기 위해 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이안은 차게 식은 찻잔을 보며 시종들에게 고갯짓했다. 서둘러 치우라는 듯이.
“저하, 잘하셨습니다.”
아이는 반쯤 열려있는 통창으로 바깥만 바라보고 있었다. 꽃가루는 계속 쏟아지는데, 어찌하여 마음 한쪽이 묵직한 것인가? 진은 희미하게 웃으며 어깨만 으쓱거렸다.
“내가 무엇을 잘하였다고.”
이안이 그 순간 나타나서 왕의 이목을 잡지 못했더라면? 이미 그 자리는 진작에 파하였을 터였다.
모욕적인 선물 따위, 도로 가져가라 이르지도 못하였을 것이요, 받은 만큼 되받아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모두 이안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다행이면서, 아쉬웠다.
‘모두가 보고 있었다.’
수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부처의 장관들, 관계자들, 심지어는 타국의 사절단들까지. 진은 미간을 단단히 고치고 턱을 괴었다.
황자의 심기가 영 불편하신 게로다, 로만드로는 기민하게 알아채고 다가와 위로했다.
“저하. 아닙니다. 에리포니 왕이 예상 범주를 벗어난 자였습니다. 감히 저하 앞에서 그런 말들을 내뱉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마지막, 응접실 문을 나설 때 왕의 표정만 기억하세요.”
“…….”
진은 입을 꾹 다문 채 눈만 끔뻑이며 로만드로를 쳐다봤다. 그리고 슬쩍, 이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무슨 생각인지 희미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왜 웃으시오, 이안 경?”
“저하께서 이리 아쉬워하는 것을 보니, 앞으로 무궁하게 발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에리포니 왕은 이미 예전부터 일국을 다스리고 있는 자였다. 정치적인 노련미를 차치하고도, 더 많은 삶의 지혜를 지닌 지도자다. 그런 자가 일대일의 대면 자리에서 예상 범주 밖의 태도를 보인다면, 쉬이 당해낼 수 없지 않나.
이안은 진의 손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맨손으로 활시위를 잡은 탓에 희미한 자국이 나 있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저하가 멈칫거렸던 것은 결국 제국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것이니까요.”
지도자와의 만남이다. 진의 선택이 평화와 전쟁을 가를 것이며, 제국민들의 삶과 죽음을 가른다. 그 무게를 잘 알고 있었기에, 쉬이 대응하지 못한 것이라.
“치기를 못 이기고 저지르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잘하셨어요. 이것이 저하의 첫 외교임을 기억하십시오.”
진은 이안의 시선을 따라 제 오른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슬쩍,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끝을 비벼댔다. 아까보다 조금 누그러진 낯이다.
“이안 경이 없었으면, 심히 곤란할 뻔하였지.”
“지나간 것에 가정이라니요.”
“…버고스와 클리포포드는 어디까지 왔다 하는가?”
다른 두 나라와 대면할 때는 절대 실수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이안은 자연스럽게 질문을 넘기듯, 뒤에 선 마법사를 보았고 그는 난감하게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아직 들어온 연락은 없습니다.”
“계속 외곽과 연락하며 주시 중이니, 소식이 들어오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잠시 쉬시지요.”
처소로 돌아가자, 로만드로가 손짓하며 안내했지만, 진은 무언가를 한참이나 고민하여 제자리에 앉아있었다.
둥그런 머리통, 꼼지락거리는 손끝 그리고 자꾸만 달싹거리는 입술. 이안과 로만드로는 의아하여 서로만 쳐다봤다.
‘왜, 왜 이러시지?’
로만드로가 벙긋거리며 물었으나, 알 턱이 있나.
이안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힘들지는 않은가?”
“무엇이요?”
“마력을 만들어서.”
“아.”
고맙다는 말을 차마 뱉을 수 없는 것이라. 그것은 황자의 체면, 주위의 시선, 자존심 따위에 정제되어 걱정으로만 표현되었다.
하지만 이안은 진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고, 자연스레 무릎 꿇어 시선을 맞추었다.
“그럴 리가요. 저하.”
잘하시었다. 황자된 자가 이런 상황에서 고맙다는 말을 신하에게 함부로 쓰면 아니된다. 혀 끝에 계속 멤돌았으나, 이안 역시 정제하여 다른 말을 전하였다.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되었다. 먼저 가 있겠네. 시아.”
진이 시아오시를 부르자, 시종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그들은 황자의 이동을 위해 앞서 달려갔고, 조금 남아있던 관료들 역시 볼일 없다는 듯 함께 사라졌다.
마법부만 남은 공간. 로만드로는 소파에 앉으며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고, 긴장이 싸악 빠지네. 이런 자리가 앞으로 두 개나 더 있다는 게 문제지만. 하핫. 아니, 제국의 축제이니 문제라 할 것은 아니지. 크흠.”
그리고 사탕을 와작거리며 괜히 헛기침을 해보았다.
이안과 진의 사이가 뭔가 이전 같지 않은 것이다. 형님, 형님 하며 따라다니던 아이는 경계선을 그었고, 이안은 넘어갈 생각조차 안 하는 것 같다.
“저기, 이안.”
이안이 로만드로의 부름에 고개를 틀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거늘, 어쩐지 조금 다르다.
뭘까. 뭐가 다른 것일까.
“…혹시 진 저하랑 다투었나?”
로만드로는 저도 모르게 그리 말한 다음, 제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어이없음은 이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투었다라는 묘사가 어찌 저와 진 사이에 적용될 수 있단 말인가.
이안이 눈썹을 찡그리자, 로만드로는 두 손을 휘휘 저어가며 정정했다.
“미안하네, 내가 실수했어!”
“조심하십시오. 황궁에는 초상화에도 귀가 달려있지 않습니까.”
“그래. 내가 실언했지. 암암. 다른 게 아니라, 혹 나 모르는 무언가가 있나 해서.”
이안은 대답할 것 없다며, 마법사들에게 지시했다.
“…외곽으로 다시 전언을 보내보아라. 한 시간만 더 기다린 다음, 기미가 없다면 예상 경로에 사람을 보내야겠다.”
“네. 알겠습니다.”
“저기, 이안. 내가 다른 건 모르겠어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거든. 이걸로 내가 비비안나의 남편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거지!”
“클리포포드 사절단은 루스웨나보다 크다. 외곽에서 보이기 시작하면 궁까지 세 시간은 걸릴 것이라. 유념하여 일정을 진행하라.”
“대화, 그거 진짜 중요해!”
이안이 응접실 밖으로 나서며 이런저런 지시를 하는 동안, 로만드로는 그의 주위를 맴돌며 쫑알거렸다. 대놓고 무시하는 이안 탓에, 대답이 들려오지는 않았지만.
“로만드로 님은 또 왜 저러신대?”
“몰라? 잘못하신 거 있나?”
“됐고, 다들 빨리 오기나 해! 교대해 줘야지!”
타닥타닥!
마법사들도 호기심을 반짝이다가 이안의 반응을 보고 신경 끈 채 흩어졌다.
정원과 이어진 외부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에도, 로만드로는 연신 대화의 중요성과 신혼 초의 신뢰 관계 형성에 대해 떠들어댔다.
한 귀로 들으며 흘리던 이안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스윽.
“아까 보니까 에리포니 왕, 장난 아니던데.”
“기고만장해서, 여기가 제 왕궁인 줄 아는 것 같더라니까. 저하에게 흑보석이 뭔지 묻는 말투 들었나?”
“그럼. 평민 어린애한테 대하듯 하더군.”
“이게 다 황실에 어른이 없어서 그래. 황제 폐하는 노쇠하셨으니 그렇다 쳐도, 두 황자의 빈자리가 너무 커.”
“아니지. 그게 아니라, 황자의 빈자리는 당연히 생기는 건데, 진 저하가 그걸 채우기에는 너무 어리시다는 게 문제지.”
“어쩔 수 없지. 황자 둘은 다른 것도 아니고, 내란 때문에 그 지경이 된 게 아닌가.”
로만드로가 눈을 크게 뜨고 난간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먼저 나섰던 관료들이 삼삼오오 모여 궐련을 태우고 있었다. 그가 소리 내어 주의 주려는 순간. 이안이 로만드로의 팔을 붙잡았다.
“로만드로 님.”
“아니, 그래도-”
내버려 두라는 뜻이었다. 이안은 가볍게 저지한 다음, 계속해서 가던 길을 걸었다.
난간 밖과 이안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던 로만드로는, 상관의 뒤를 따르며 다시금 쫑알대기 시작했다.
“이안, 왜 저자들을 내버려 두어?”
“없을 때는 나라님 욕도 하는 법입니다. 저자들의 대화를 잘라낸다 한들, 사실까지 잘라낼 수는 없잖습니까. 진 저하가 처음 치고 잘하였다 한들, 외부의 평가는 어쩔 수 없습니다. 진 저하가 감내할 것들입니다.”
물어뜯고, 베이고, 생채기가 나면 단단한 살이 돋는다. 저자들 역시 현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에서 한마디씩 덧붙이는 것이라.
“감내하는 것은 성장에 있어서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아마 저것은 부드러운 축에 속할 뒷말들이다. 곳곳에서 아이의 미숙함과 당황했던 찰나의 표정, 에리포니의 무례한 태도 따위가 입방아에 오를 터.
거기에 더하여 자신의 이름까지 덧붙여지겠지.
‘나로 인해 진이 상황을 겨우 마무리했다…….’
소문이 그리 퍼지면 다행이다. 화려하게 마력 화살까지 쏘아 올리지 않았나? 와전되어 자신이 에리포니를 꺾었다고 전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리하면, 진과 반대 세력에게 더더욱 압박이 가해질 것이다. 자극을 주면 줄수록 반응은 격렬해질 것이고, 나아갈 수 있는 범위가 넓어진다.
‘어쩌면, 앞으로는 진에게 걱정의 말을 못 들을 수도 있겠구나.’
아이는 고맙다는 말도 한참이나 깎고 깎아 겨우 전했다. 주위의 이목을 상당히 신경 쓰고 있다는 방증. 이안이 바라는 것이었다.
저라는 발 하나로만 서는 게 아니라,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다른 발 또한 제 몸으로 삼는 것. 왕관의 무게를 함께 짊어질 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이안.”
로만드로가 이안의 앞을 확 가로막았다.
“이전에도 생각했지만, 자네는 너무 가벼워.”
“…제가요?”
“가벼워서 금방 날아갈 것만 같다는 게지. 주위에 사람이 있으면 좀 붙잡고 그래. 감내할 생각만 하지 말고, 나누고 그러라니까?”
무덤덤했던 이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서둘러 비키라며, 로만드로의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리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로만드로 님.”
이안과 로만드로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마차가 계단 아래로 보였다. 이안이 손짓하여 마부에게 출발 준비를 명했다.
하지만 그 순간.
타닥타닥!
“이안아아아!”
아주 익숙한 목소리.
베릭이 저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구르고 굴러도 황궁친위대라, 엉망진창 제멋대로 껴입은 정복이 유독 휘날렸다.
“베릭이 왜 여기로 오지?”
“황궁친위대는 일정이 따로 있는 거로 아는데요.”
“응. 나도 그리 아는데. 허억! 혹시 잘렸나?”
맨날 뭐 깨고, 찢고, 부순다고 날리더니 퇴출당하고 만 것이라! 로만드로는 허옇게 질린 채로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히이잉!
“이놈아, 왜 왔어?”
“심부름인디요? 루스웨나 왕은 잘 도착했어요?”
“그래. 방금 진상품 정리하고 거처 삼을 궁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왜? 심부름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고?”
황궁친위대나 되어서 심부름이나 하고 다녀? 로만드로는 괜히 안쓰러워서 베릭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베릭은 코를 훌쩍이며 이안에게 고갯짓했다.
“이안아. 영감탱이가 너 좀 보자는데?”
“제이럿 대장이?”
“엄청 급하대. 그러니까 빨리 데리고 오라 했어. 뭐라더냐? 포포도! 포도 나라랑 관련한 일이래.”
이안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세상에 포도 나라라니.
설마.
“…클리포포드?”
“그래. 그거. 이십 분 안에 너 데리고 오면 밥 준다 했다. 빨리 가자!”
제이럿이 베릭을 다루는 법을 깨달은 모양이다.
이안은 마부에게 손짓하며 목적지를 바꾸었다.
“황궁친위대 건물로 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