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93
제293화. 제이럿과의 밀담
황궁친위대의 건물은 두 군데였다. 임무 특성상 황제의 처소 인근에 하나, 그리고 훈련장에 하나. 베릭이 앞서 달려간 곳은 황제의 처소와 가까운 곳이었다.
로만드로는 주위를 기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쪽에 직접 발걸음 하는 건 거의 처음인 것 같네.”
황제의 처소가 바리엘에서 제일 고귀하고 화려한 곳임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구려.”
베릭은 전혀 다르게 표현하였지만 말이다. 앞장서던 베릭이 몸을 빙글 돌리며 뒤로 걸어댔다.
“그리고 하지 말라는 것도 너무 많아.”
“황제 폐하 가까이에 있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지. 그래도 베릭아, 너만큼 팔자 좋은 친위대원이 또 없다. 다른 대원들은 기숙하여 아침 칼기상, 저녁 칼취침 한다고 하는데. 응? 너는…….”
쿠웅!
로만드로가 잔소리를 늘어놓자마자, 뒤로 걷던 베릭이 문에 뒤통수를 받았다. 인기척에 벌컥 열리는 문. 바르사베다. 그녀는 머리를 쥐어싸며 쪼그려앉은 베릭을 한심하게 힐끔거렸다.
“…어서 오십시오.”
“아오, 일부러 그랬죠? 로만드로 님!”
“내가 뒤로 걸으라 했느냐? 지가 그래놓고, 뭐래.”
이안은 베릭을 지나쳐 바르사베를 따라 들어섰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벽면을 가득 채운 황금빛 배지. 모두 황궁친위대 소속 전사들의 것이었다. 바리엘을 위하여, 적군 혹은 마물에 맞서 영예로운 죽음을 맞이한 자들. 이안의 시대에는 저것이 넘치고 넘쳐서 그 옆까지 이어졌었다.
‘새삼스럽군.’
지금 서 있는 이곳이, 백 년 전의 궁이었다는 게 말이다. 이안이 기억의 간극에 멈춰있자, 제이럿이 그 옆에 서서 함께 배지를 바라봤다. 눈매에 묵직한 경외심이 묻어있었다.
“그것 아십니까? 역사에 스쳐 지나갔던 황궁친위대원 수와 이 배지들의 수가 같다는 것을요.”
“제이럿 대장.”
“영예롭게 죽는 것. 그것이 진정한 황궁친위대의 마침표인지라.”
배신했던 전 삼대장 리아마의 배지는 이곳에 걸리지 않았다. 자격 자체를 박탈당했으니까.
수많은 황제가 즉위하고 사라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당연하게도 그 옆을 지키는 황궁친위대원들 역시 평탄한 죽음을 기대할 순 없었다.
“나는 배지 받은 거 없는디?”
이안과 제이럿의 틈으로 쑥 들어오는 베릭. 바르사베가 끼어들지 말라며 그의 목덜미를 쭉 잡아끌었다.
“죽으면. 내 잘 닦아서 걸어주마.”
“장난 똥 때리나. 죽었는데 금이든 은이든 알게 뭐라고. 살아있을 때 주라! 안 그래도 봉급 마이너스-”
“좀, 제발 닥치고 나 따라와.”
이안은 질질 끌려가는 베릭을 보고 제이럿에게 웃어보였다. 선발 대회 이후 이리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지 않나? 견제 세력의 중심으로 급부상하는 자였으니, 만남 자체가 쉬울 리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소. 제이럿 대장. 베릭이 말썽을 많이 부려, 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어.”
“괜찮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받아들인 것이니까요. 임명식으로 바쁘신 것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긴히 의논할 것이 있어서요. 잠시 이쪽으로.”
공용집무실 가운데 널찍한 원탁이 놓여있고, 새 대장인 사이먼과 보니타가 서 있었다. 그들은 펼처진 지도와 서신 따위를 꼼꼼히 살펴보다가, 이안을 알아채고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장관님. 삼대장 사이먼입니다.”
“보니타입니다.”
가벼운 악수. 예의를 차리고 있었으나, 딱딱하기 그지없다. 그도 그럴 것이 동격 대장이라고는 하지만, 선배이자 버팀목인 제이럿이 이안을 경계하고 있지 않나. 가타부타 쓸데없는 언사로 치장할 무인들이 아니었다.
“다름 아니라, 남쪽의 국경수비대 쪽에서 연락이 올라왔습니다. 마력이상반응장치를 점검했는데, 평년과 다르게 수치가 비이상적이라고 하더군요.”
“어느 정도?”
“…세 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안은 수비대 인장이 찍힌 보고서를 쭉 훑었다. 어떤 의문도 없는 모습이라.
사이먼과 보니타는 조금 놀란 듯이 시선을 마주했다. 적어도 마력이상반응장치가 무엇인지는 물을 줄 알았는데.
“저기, 죄송합니다만 그게 뭡니까?”
바로 저 로만드로처럼.
사이먼은 다른 보고서를 건네주며 설명했다.
“국경에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한, 일종의 경보장치입니다. 바리엘이 마물의 습격에서 안전한 편이긴 하지만, 태만할 수는 없습니다. 북쪽과 서쪽은 워낙에 험하다 보니 평년 기록이 5에서 6을 오갑니다.”
“마력을 감지한다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사실상 마물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요. 한데 남쪽, 클리포포드와 인접한 곳에서 이만한 수치가 나온 적은 처음이라 하더군요.”
바리엘을 중심으로 한 가이아(Gaia) 전역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이안이 보고서를 넘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력이상반응장치를 불시에 점검한 연유가 지진의 여파로군.”
“저희 쪽 대원과 마법사를 차출하여 국경 전체를 조사해봄이 어떨까 싶습니다. 로만드로 님도 보좌관을 맡기 전, 재건자문관으로 지진 피해 지역에 나가시지 않았나요?”
“아아. 그렇지요. 브라츠, 아니다. 히엘로로 내려가기 직전까지 그리 활동하였습니다. 작거나 큰 지진이 빈번해진 것은 사실이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다시 눈물이 앞을 가린다. 복귀하자마자 지방 발령이라니. 로만드로는 이제 절대 중앙 밖으로 나가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차출할 인원은?”
그때, 치고 들어오는 이안의 물음. 보고서를 모두 읽었는지, 뭉텅이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사이먼과 보니타는 제이럿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의견을 내놓았다.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 말에, 추억에 잠겨있던 로만드로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안 그래도 마법사 수가 가뭄인데, 거기에 동서남북 각지로 찢어 출장을 보낸다니. 그 의도가 너무 확고했다.
분해를 시키려는 것이다.
영향력이든, 무엇이든.
“황궁친위대는? 며, 몇 명을 생각하시는데 그리 말씀하십니까?”
“마법부에서 정해진 인원을 토대로 점검할 생각입니다. 부족한 호위 병력은 제국방위부에서 지원해 준다 하니, 안전에 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이보시오.”
로만드로가 발끈하여 반박하려 하자, 이안이 손을 가볍게 들어 저지했다.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한 손짓이었으나 주위를 조용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제이럿 대장만 남고 모두 자리를 비켜주게.”
그의 부탁에 로만드로는 헛기침을 내뱉으며 물러섰고, 사이먼과 보니타 역시 제이럿의 허락을 받고 사라졌다.
이안은 지도에 새겨진 바리엘의 경계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제이럿 대장. 우선 답하지. 국경으로 마법사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보낸다 한들, 단 한 명만이 내가 내줄 수 있는 최대다.”
이안이 원하는 것은 자신을 견제하는 것이지, 마법부를 견제하는 게 아니었다. 마법부는, 정확히 마법사들은 바리엘의 중심축이나 마찬가지. 이것이 흔들리면 결국 진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무인들(武人)의 한계인가. 제국방위부와 어느 정도 이해를 일치시킨 듯한데, 아무래도…….’
저들에게 정세를 대신하여 봐줄 자가 필요한 것 같다. 의로운 마음은 강한 힘. 하지만 방향이 잘못되면 아예 없느니만도 못한 것이니.
이안은 지도를 탁 튕기며 싱긋 웃었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는 사이 제이럿 대장에게 미운털이 박힌 듯하여. 베릭 같은 천방지축을 맡겨서 일까?”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안 그래도 요즘 말이 많긴 해. 나도 귀가 있다 보니 자꾸만 들려오는 것이 참으로 신경 쓰인다네. 황제 폐하께서 저리 자리를 보전하고 계시니 어지러운 것은 사실이나, 관료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나?”
황제의 친위대다. 그것이 근간인 자들이니, 제국방위부보다 행정부 쪽과 가까이하는 것이 어려 모로 이득일 것이라.
“마법부도 그래. 자꾸 우리 쪽 처우가 과도하다는 말이 돌고 있는데, 본궁 마법사까지 줄어들면 부서 운영에 문제가 생길 것은 불 보듯 빤할 터. 내가 거절할 걸 짐작하고 있었다 믿겠네.”
제이럿이 덤덤하게 고개만 까딱거렸다. 이안의 말대로, 단박에 허락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 그러면 고작 이것을 의논하고자 나를 부른 것은 아닐 것 같은데.”
이안이 의자에 앉으며 손을 모았다. 그러자 제이럿은 짙은 숨을 내쉬며 품 안쪽을 뒤적거렸다. 그의 손에 들려온 서신 뭉텅이. 이안에게 읽어보라며 내어줬다.
“이게 무엇인가?”
“보시면 알 것입니다.”
제이럿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이안은 끈을 풀었고, 이내 의외라는 듯 관자놀이를 짚고 말았다.
* * *
“이안이는요?”
“이놈아, 왜 그러고 있어?”
밖으로 나온 로만드로가 심히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베릭에게 다가왔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만, 베릭은 벽에 대고 물구나무서는 중이다. 로만드로가 쭈그려 앉아서 꿍얼꿍얼, 당최 알 수 없는 불만을 토해냈다.
“뭐라는 거예요? 이안이는요?”
“안에서 제이럿 대장이랑 대면 중이다.”
“와씨, 나 혼나는 거 아니겠죠?”
“또 잘못한 일이 있어?”
휘릭! 가벼운 몸짓으로 일어난 베릭이 손으로 X를 그리며 강하게 부정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걸 모르는 걸까.
“절대! 절대 없는데요!”
“…그래. 그러시겠지.”
“그나저나. 임명식 대체 언제 해요? 얘기 들었는데, 밖에는 지금 완전 난리래. 막 하수구로 술 흐르고, 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끼리 춤추고 노래 부르고, 노느라 바쁘다는데.”
저도 나가 놀고 싶다는 것이다. 베릭이 눈을 반짝이며 가까이 붙자, 로만드로가 얼굴을 쭉 밀어버렸다.
“임명식 끝나도 손님들 갈 때까지는 꿈도 꾸지 말거라. 녹봉 먹는 놈이, 어찌 남들과 같이 놀아?”
이제 막 첫 손님으로 에리포니가 왔거늘, 그걸 말이라고!
베릭이 혀를 차대며 아예 바닥에 누워버렸다. 삼대장인 사이먼과 보니타는 익숙해졌는지, 못 본척 저들끼리 무언가 의논하는 중이다.
“임명식 때 비비안나하고는 와요?”
“진 저하께서 초대하셨으니, 당연히.”
비비안나의 말이 나오자, 로만드로의 표정이 슬쩍 풀어졌다.
임명식 자체는 귀족과 소수의 초대 손님이 보는 앞에서만 이루어지고, 이내 왕관을 쓴 채로 황제의 길을 걷는 게 일정의 마무리였다.
끼이익.
“어? 이안아!”
“이안! 어찌, 조율은 잘 되었나?”
이안은 평소와 그다지 다를 것 없는 표정이었으나, 베릭은 뭔가 이상하다며 코를 킁킁거렸다. 그 모습에 기겁한 로만드로가 베릭의 구레나룻을 잡아당겼다.
“베릭! 다른 건 몰라도 정복 입고 그러면 안 된다!”
“볼일은 다 보았습니다. 마법부로 돌아가시지요.”
“아, 그래. 알겠네.”
“베릭, 너는?”
“나도 갈래! 오늘 훈련할 거 다 했어!”
상관인 사이먼과 보니타에게 묻지도 않고, 자의적으로 판단한 것 같지만 말이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둘에게 눈인사를 남겼다.
“그럼, 이만.”
“들어가십시오.”
두 사람이 예의 있게 허리를 숙였고, 이안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떼었다. 어쩐지 조금 서두르는 모습이다.
로만드로가 왼쪽에서 붙어 달리며 물었다.
“이안, 왜 그런가? 제이럿이 무어라 해? 마법사들은 어찌하고?”
“마법사들은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치? 아, 그래. 친위대가 좀 심하다 했어!”
그리고 오른쪽에서 달리는 베릭. 저도 알려달라며 떼를 써댔지만, 마차 옆에 서 있는 마법사의 손짓에 묻히고 말았다. 마법사는 이안을 발견하자마자 크게 소리쳤다.
“이안 님! 클리포포드의 마차가 보이기 시작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