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295
제295화. 귀가 뽕
꽃비가 내리는 화창한 날씨.
필리아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혹여 천국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사방이 반짝거리고,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오며, 활기찬 음악은 끊이질 않고 있었다.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황홀하게 느껴질 만큼, 세상이 아름답다. 거기에 더하여,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까지 함께하고 있지 않나.
“필리아 님.”
“네?”
“바늘 코 거꾸로 쥐셨어요.”
“어머, 감사합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비비안나가 차를 홀짝이며 웃었다. 출산을 곧 앞둔지라, 배는 이제껏 비교할 수 없이 크게 부풀어있었다.
“조금 아쉽네요. 꽃비가 내리는 날, 아이가 태어나면 좋았을 터인데. 신년처럼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잖아요. 아마 축제 기간 태어난 아이들은 바리엘의 축복을 더욱 크게 받을 거예요.”
신년을 제외하고, 이런 꽃비를 볼 만한 기회가 어디 흔하던가? 임명식이나 즉위식처럼 황궁의 역사와 맞물리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다.
그래서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자가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인생 중대사의 방점을 찍을 것이라. 예를 들어, 결혼 같은.
“아쉬워 마세요. 아이가 태어나면 제가 있는 힘껏 축하하고, 축복할게요.”
“고마워요. 부인. 저도 그리하지요.”
하지만 필리아는 진의 임명식에 초대받았기에 그럴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안을 비롯하여 함께하고 싶은 자들이 너무 바쁘지 않나. 골목의 작은 주점도 눈코 뜰 새 없던데, 황궁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끼이익.
똑똑.
“실례합니다. 비비안나 부인 계십니까?”
“네. 무슨 일이시죠?”
울타리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비비안나는 담요를 걷어내며 일어났다. 필리아도 마찬가지. 뜨개질하던 것을 내려놓고 비비안나를 따라 고개를 틀었다.
“마법부 소속입니다. 이안 님이 필리아 님께, 그리고 로만드로 님이 비비안나 님께 서신을 전달하라 명하셨습니다. 임명식 날 입궁하실 때 주의점과 기타 사항들입니다.”
“그렇군요, 들어오시겠어요? 차라도 드릴까요?”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지금 클리포포드 마차가 인근을 지나고 있어서요. 함께하던 중에 잠시 나온 것이라 바로 복귀해야 합니다. 그럼 이만.”
“고맙습니다. 수고하세요.”
어찌 클리포포드와 함께 들어가는지 의아했지만, 서신은 반가운 일이다. 두 사람은 찻잔을 옆으로 치우고 서신 두 장을 펼쳤다.
“입궁할 때 서신을 보여주고 따로 안내받으라 하네요. 경비대가 편의를 봐줄 것이라고요. 보자, 필요한 것이 왜 이렇게 많지? 미니!”
“네. 마님!”
비비안나가 하인을 불러서 짐 쌀 것을 이르는 동안, 필리아는 더듬더듬 이안의 필체를 어루만졌다. 정갈하여 단정한 것이, 저절로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안 님은 무어라 하십니까?”
“어…….”
-어머니, 날이 더워졌습니다. 고단하지 않으십니까? 진 저하의 임명식이 끝나면 서둘러서 약혼식을 올리는 게 좋겠습니다. 늦어지면, 시기를 놓칠 수도 있어요. 자세한 것은 로만드로 님에게 부탁하여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비비안나가 두근거린다는 듯 필리아를 꼭 껴안았다. 이제 정말 경사스러운 날이 성큼 다가온 것이라. 필리아 역시 웃어 보였지만, 이상하게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축하해요. 필리아 님! 네르사른 님에게도 알립시다.”
“고, 고맙습니다, 부인. 그런데… 시기를 놓칠 수 있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임명식이 끝나면 한숨 돌리는 것 아닌가요?”
필리아가 의아하게 문장을 짚자, 비비안나는 잠시 고민하더니 별것 아니라는 투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궁에서 오래 일했지만, 한가로운 날이 하루도 없었어요. 임명식에 각국의 지도자들이 모두 모이지 않습니까? 아마 거기에 관하여 또 처리할 일들이 생기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 출산일과 겹쳐지면 안 되잖아요.”
아기가 태어나면 약혼식은 고사하고, 손님으로서 저택에 머무는 것조차 곤란했다. 그러니 아쉽지만, 마무리할 것은 마무리하여 히엘로로 내려가는 게 옳다.
“그런 의미일 겁니다. 이안 님의 말씀은.”
“그럴까요? 그런 거면 다행이고요.”
“우리 드레스부터 보러 가요. 축제 기간이라 옷들이 남아있을지 모르겠네요. 맞춤으로 하면 여유 있을 것 같은데, 이안 님이 서두르라 하시니. 세상에… 얼마나 아름다울까? 네르사른 님 서서 기절하는 거 아니에요?”
비비안나가 키득대며 만찬 날을 떠올렸다. 필리아의 임신 소식을 듣고 넋 놓은 전사의 얼굴이라니! 곱씹고 곱씹어도 재미있다.
“미니! 나갈 준비도 하자!”
부인이 저택으로 들어가며 신나게 외치는 동안, 필리아는 연신 종이 끄트머리만 만지작거렸다. 이상하게 가슴이 콩닥거리며 진정되질 않았다.
무엇 때문에 그런 걸까? 두 손으로 가슴팍을 꾹 누르던 필리아가 바깥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너희 그거 알지? 여기가 마법사 집이라는 거.”
“진짜? 근데 왜 이렇게 쪼끄매?”
“안에 들어가면 완전 다르대! 눈속임하는 거지.”
“됐고, 빨리 큰길로 가보자. 클리포포드 가무단이 그렇게 대단하다던데. 말 위에서 한 발로 춤추고 노래한다 했어! 버고스도 곧 온다며?”
필리아가 조심스럽게 바깥을 보며 웃었다. 예닐곱 되어 보이는 꼬마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안쪽을 훔쳐보고 있는 것 아닌가? 얼굴에 우스꽝스러운 낙서는 물론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장식품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가자!”
“와아아!”
버고스도 바로 오는구나. 필리아는 멀어져 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이안을 떠올렸다. 부디, 이안도 저들처럼 즐겁게 내달릴 수 있기를 바라며.
* * *
“클리포포드의 진상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백 년산 포도주 서른 통과 다섯 종의 과일주 각 열 통, 왕국의 전통악기이자, 진 황자 저하의 임명식을 축하하기 위해 특별 제작한 백금 브라쿠이 세 대입니다.”
클리포포드의 마차는 루스웨나와 달리 대부분 별궁으로 직행했다. 왕자의 몸 상태를 고려하여 대면은 뒤로 미루었으나, 절차는 절차. 노아 왕자를 대신하여 메이 사절단 총괄이 진상품을 직접 진에게 올렸다.
“그리고 이것들은 비단입니다. 열다섯 필이고, 고급 염료 또한 수에 맞게 준비했습니다.”
“오느라 수고했다. 왕자의 상태는 어떠한가? 의사를 부르지 않아도 된다 했으나, 내 조금 걱정스러운데.”
사정을 전해 들은 진이 슬쩍 떠보듯 물었다. 입궁하면서 저를 만나지 못할 정도로 아프다고 하는데, 의사는 필요 없다고 하니 의아하지 않나?
에리포니를 한 번 겪고 나자, 이제는 사사로운 것도 쉬이 넘길 수 없었다.
“황자 저하께 염려를 끼쳐드려 참으로 송구하옵니다. 하지만 왕국에서부터 왕자님을 담당하던 의사가 동행하였고, 도착하자마자 폐를 끼치는 것이 참으로 죄송스러워 그런 것이니 오해는 거두어 주십시오.”
그 뜻을 알아챘나 보다. 메이는 최대한 공손히 손을 모으며 몸체를 기울였다. 배려에 감사하다는, 자국의 예법이다. 가시 하나 없이 부드러운 메이의 태도에 진은 한발 물러났다.
“알겠다. 자세한 것은 왕자와 나눌 것이니, 물러가라.”
메이는 다시금 깊게 인사하며 응접실을 나섰다.
관료들은 왕자가 오지 않았다 하여 아까처럼 모이지 않았다. 저들끼리만 남자, 아이는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이안에게 물었다.
“이안 경. 어찌 생각하시오?”
“긴 여정이었으니, 몸살이 났을 수도 있긴 합니다.”
났을 수도 있다, 이 말은 이안도 수상함을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짐 옮기며 사서 고생한 시종들은 멀쩡한데, 마차에만 타고 있던 왕자가 몸살이라?
“…나를 기만하려는 처세 아닐까?”
진의 물음에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리저리 오가느라 지친 로만드로 역시 옆에서 말을 덧붙였다.
“그런 것은 아닐 겁니다, 저하. 만찬 참석에도 확답을 주지 못하였거든요. 저하와 3국의 정상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인데, 어지간한 사정이 있지 않으면 불참하기 힘들지요.”
굉장히 중요한 자리다. 진의 임명식 축하를 표방하여, 동맹 맺은 자들끼리 마련한 자리가 아닌가? 사실상 3국의 지도자들이 그 먼 거리를 달리고 온 이유라 해도 무방했다.
“사지가 부러져도 꾸역꾸역 올 자리인데, 고민하는 걸 보면 예사가 아니긴 한가 봅니다.”
“흐음.”
진은 골똘히 고민하며 잔 신음을 흘려댔다. 하지만 이리 앉아서 왕자를 들여다볼 수는 없는 노릇. 그 대신 다른 쪽을 대비하는 게 나을 것이다.
“노아 왕자가 황궁에서 잘못되면, 그 영향은 어떠한가?”
아이의 시선이 이안에게 닿았다. 참으로 꼼꼼하신 일 처리라. 이안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그걸 염두에 두어, 메이 사절단 총괄에게 증서 작성을 요청하였습니다. 황궁 의사를 거절한 것에 관해서요. 마법부에 녹음 기능이 있는 마력석도 가려내서 내오는 중이니, 큰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아코렐라가 없으니 마력석 내오고 처리하는 것이 조금 더뎠지만 말이다.
이안의 확답에 진은 안심했다는 듯 소파 뒤로 몸을 기댔다.
“베릭이 보이질 않는군.”
“조사를 보냈습니다. 곧 들어올 것입니다. 하명하실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아니. 그저 궁금해서.”
진이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분명 말하고자 하는 게 있는 듯한데, 쉽지 않나 보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로만드로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이안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저저, 보아라. 진 저하와 다툰 것이 분명하지! 누가 보아도 저하가 어려워하고 계시지 않나?
“저하, 하실 말씀이?”
로만드로는 이안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리며 방긋 웃었다. 저가 도와줄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고 하고픈 말씀을 하시라 이르는 게다.
진은 시아오시에게 눈짓하여 물건을 가져오라 일렀다.
스윽.
“지방에서 올라온 진상품 중 하나인데.”
손바닥 크기의 작은 보석 상자다. 열어보니, 이안의 녹안과 똑 닮은 보석이 담겨있었다.
“임명식 때 필리아도 내 초대하였잖은가. 그 답례 겸, 여러 축하 선물로 이를 전해주고 싶은데.”
보석을 보자마자 압생트 색의 눈동자가 떠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마침 필리아에게 좋은 일들이 있으니, 이를 축하할 겸 전해주고 싶노라. 일종의 허락을 구하는 것이다.
로만드로는 과장되게 손뼉 치며 이안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어이고, 너무 예쁘다. 저하. 필리아 부인이 아주 기뻐하겠습니다. 그치, 이안?”
화해에는 선물이 제일이지! 로만드로가 진에게 엄지를 치켜들며 호들갑을 떨어대자, 이안은 방긋 웃었다. 저의가 너무도 투명하게 보인 탓이다. 로만드로도, 진도.
“예. 저하. 참으로 감사합니다. 어머니께서 분명 좋아하실 것입니다. 황자 저하께 직접 받은 보석이라니, 가문의 영광으로 남겨두시겠지요.”
로만드로는 기립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이리 주고받았으니, 이제는 예전처럼 다시…….
콰앙! 쾅!
우당탕탕!
“이안아아!”
감격의 순간을 만끽하기도 전, 로만드로는 눈을 부라리며 문 쪽을 노려봤다. 다른 곳도 아니고 본궁의 응접실에서 저런 소란이라니.
“베릭! 내가 몇 번이나 일렀지! 여기는-!”
“포, 포, 포도 나라 왕자, 여우다!”
“…뭐?”
“여우 왕자라고!”
“…….”
흥분해서 얼굴이 벌게져 있는 베릭이다. 이안과 로만드로, 그리고 진과 시아오시까지. 모두 무표정으로 베릭을 가만 쳐다봤다. 로만드로가 눈짓하자, 시아오시가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았다.
“…술 냄새는 안 나는데요.”
그러자 베릭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분명 같은 언어로 말하는데, 왜 못 알아듣는 것인가!
“진짜. 내가 봤다! 귀가, 귀가 뽕! 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