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
제3화. 백작저
“식사는 입에 맞으셨습니까?”
데르가 백작이 식기를 옆으로 내려놓으며 물었다. 두어 시간 동안 진행되었던 오찬이 드디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중천에 걸려있던 해가 어느덧 산 쪽으로 기운 지 오래였다.
“아주 훌륭했습니다. 황궁에서 먹는 것과 비견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가만히 냅킨 정리를 하던 이안이 멈칫거렸다.
세상의 중심이자 최고 존엄인 황궁과 감히 비교하는 언사였다. 이안의 시대에서는 굉장히 놀랄만한 일인데, 데르가 백작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하니 별 반응이 없다.
‘일반적인가?’
그렇다면 황궁의 권력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100여 년 전이라. 임기가 짧았던 황제들을 차치하더라도 일곱 명이나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디저트를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백작 부인.”
이안이 골똘히 머리를 굴리는 동안 자리가 완전히 파했다. 메리 부인은 우아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두 아들을 돌아봤다.
“첼. 이안. 어른들끼리 할 얘기가 있으니 둘은 옆방에서 다과라도 들고 있으렴.”
분명 이안의 입적을 떠들어대겠지. 당사자인 자신을 빼놓고서.
사실 입적 진행은 거의 기정사실이나, 평소 황궁의 입김이 닿지 않았던 변경이니만큼 견제하듯 까다롭게 물고 늘어질 것이었다.
“네. 어머니.”
이안이 똑 부러지게 말하자, 메리 부인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천한 것의 어깨를 쓰다듬으려니 여간 고역이 아닌가 보다.
그녀는 그저 볼을 톡 치는 것으로 보여주기식 애정을 쏟아냈다. 그럴수록 첼의 눈은 더더욱 찢어졌지만.
“이쪽입니다. 몰린 경.”
“오호. 참으로 멋지군요.”
그들은 뒤뜰을 뒤로하고 본채로 들어섰다.
저택의 중심부를 차지한 넓은 응접실이 호화스럽다 못해 정신없을 지경이었다. 사방팔방 번쩍이는 금붙이가 햇빛을 받아 방을 밝혀댔다.
끼익.
어른들이 안쪽 응접실로 들어가자, 첼과 이안 만이 남았다. 둘은 마주 앉은 채 서로를 쳐다봤다. 정확히 말하면 첼은 노려본 것이며, 이안은 관찰하는 것이었다.
‘고놈 참 데르가 백작이랑 쏙 빼닮았구나. 지나가던 개라도 부자지간임을 알겠다.’
붉고 구불거리는 머릿결과 주근깨투성이인 콧잔등. 혈기 왕성한 나이임에도 볼록한 배는 영락없이 데르가의 핏줄임을 보여줬다.
거울로 보이는 이안은 블론드에 압생트 눈동자였는데, 아마 누군지 모를 어미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예쁘장하니, 첼과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첼 님. 이안 님. 다과를 들이겠습니다.”
하인이 공손하게 다가오며 차와 쿠키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첼의 눈이 샐쭉해지더니만, 손으로 하인의 머리통을 그대로 후려쳤다.
퍼억!
“아!”
하인의 손등으로 뜨거운 찻물이 쏟아졌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손수건을 찾았으나, 천한 서자가 그런 걸 갖고 있을 리 없었다.
“다시 말해봐.”
“네?”
하인은 당황한 기색으로 앞치마에 손등을 문질렀다. 다행히 살짝 부어오르긴 했지만 크게 데이지는 않았다.
“건방지게 어디서 내 이름을 불러?”
“아아. 죄, 죄송합니다. 소백작님.”
백작의 유일한 혈통이라는 뜻으로, 데르가의 후계임을 공언하는 지칭이었다.
예법에 정통한 이안 역시 모르지 않았지만, 첼의 날 선 반응은 조금 의아했다.
“찻물을 흘렸으니 책임지거라.”
“…다시 내오겠습니다.”
“다시 내온다고? 이게 차 귀한 줄도 모르고? 봉급에서 차감할 터이니 흘린 것은 네가 가져가. 평생 맛보지도 못할 것이니 이참에 핥아먹어도 좋겠구나.”
“제가 실수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같잖다.”
쉽게 볼 수 없는 패악질이었다. 어찌 성정이 저리 잔인하단 말인가? 필시 부모가 잘못 키운 게 분명했다.
“차는 되었으니 나가서 손부터 식히게.”
이안의 나지막한 지시에 첼의 표정이 확 찌그러졌다. 하인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라, 후다닥 쟁반을 들고서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판단은 옳았다. 첼은 금방이라도 이안의 머리채를 잡을 것처럼 날을 세웠다.
“지금 뭐 하는 것이냐?”
“무엇이 말입니까.”
“네놈의 형님이 말하고 있었다. 감히 무어라고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하느냔 말이다.”
이안은 뭐 그리 빤한 것을 묻느냐는 듯 태평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하인들을 부린다면 조만간 저택 일을 형님이 직접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괜히 성질부려 문제 만들지 말고 본분을 지키는 게 현명할 텐데요.”
담담하고도 논리정연한 대꾸에 첼의 두 눈깔이 툭 불거졌다.
“천한 핏줄의 자식 주제에 감히 어디서 본분이니 뭐니…. 몰린 경이 칭찬 좀 했다고 기고만장한 것이냐? 진짜 귀족이라도 된 것 같아?”
다만 목소리는 소곤소곤하니 조용했는데, 문 하나를 두고 손님이 있었으니 당연했다. 그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는 모양이구나.
이안은 찻잔을 홀짝이며 웃었다.
“내가 귀족이 아니면?”
“…뭐?”
“형님이 천려족으로 팔려가겠지요.”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웃겼다.
고작 3년간의 황제였다 한들, 바리엘의 정점이었다. 첼은 이것이 분명한 영광임을 알 필요가 있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걸 보아 자신을 비웃는다 여긴 것 같지만.
“이, 이게 미쳤어!”
첼이 이안의 뺨을 내려칠 용으로 손을 들었으나, 허공에서 막혔다. 이안의 손아귀에 꽉 붙들린 것이다.
“첼이라고 했지.”
이안은 또래보다 마르고 작은 편이었다. 따라서 첼이 다잡고 누르면 눌릴 터.
하지만 첼은 그러지 못했다. 그가 나지막이 자신을 부르자, 뒷덜미가 쭈뼛 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얼굴에 환부라도 생기면 몰린 경이 어찌 생각할까? 응? 백작과 그 부인은? 저기서 열심히 나를 팔아먹으려고 하는데, 아들 된 도리로 협조는 못 할망정 초를 치려 하는구나.”
황제는 첼의 볼에 손을 올려 툭툭 두드렸다.
정신 좀 제대로 차리라는 뜻이었다.
“그러다 내가 사라지면 어쩌려고?”
그 말에 겁먹었던 첼의 눈동자가 서서히 영악한 빛을 띠었다.
“흥, 네가?”
건수 잡았다는 듯 반질거리는 미소는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뒷골목에서 한평생 굴러먹은 시정잡배와 똑 닮았으니, 귀족들 사이에서 왜 천박한 가문이라는 말이 떠도는지 알 지경이었다.
“한번 해보렴. 그렇다면 네 어미는 머리가 잘려 시장통에서 공처럼 차일 거란다. 아하하!”
아. 이안은 속으로 낮은 탄성을 내질렀다.
황제였던 그는 이토록 천하고 날것인 협박을 들은 적이 없었다. 좀 더 뭐랄까. 품격있는 가시를 받았다는 쪽이 맞을 거다.
아무튼, 이안은 첼의 말로 또 다른 정보를 알아냈다.
‘어미가 족쇄였구나.’
이안이 군말 없이 국경을 넘어야 하는 사정이 있었던 거다. 빈민가의 어린아이가 데르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수많은 선택지 중 이 아이의 몸으로 들어온 연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이안이 짧게 고민하자, 첼은 자신의 공격이 제대로 먹힌 줄 오인했다.
“납작 엎드리렴. 그래야 네 어미와 함께 하루라도 더 목숨을 연명할 것 아니니? 시장통에 굴러다녀도 워낙에 더러운 몸뚱이라 티도 안 나겠지만.”
그 순간이었다.
이안이 첼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압생트 색이었던 그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바뀌며 마력이 솟구쳤다. 피가 거꾸로 차오르듯 저도 모르게 일어나는 반응이었다.
“어리석은 것아.”
이안은 온몸으로 마력을 느끼며 일갈했다.
황제의 몸이었을 때와 비교하면 하찮았지만, 첼이 받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안은 마법 역사에서 제일 빛났던 별이지 않은가.
“아무리 아이라고 한들 말의 무게는 같다. 세 치 혀는 인생을 바꾸기에 그리 짧지 않아. 조심하지 않으면 잘릴 것이다.”
한 세기 전, 지금의 바리엘 제국은 이안이 통치했던 때보다 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 봐야 했다. 수도 귀족들도 운이 좋아야만 연이 닿을 정도인데, 변경은 당연히 그 흔적조차 없다.
“아······.”
그리하여 기현상과 마주해도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것이다. 첼은 머리가 새하얘지며 거의 혼절할 지경이었다.
후두둑.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이안이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뒤로 물러섰다. 직사광선을 등지고 선 이안은 마치 천사의 현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첼은 멈출 기미 없이 계속해서 실수했다.
‘…미치겠군.’
하인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응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도련님들. 다과는 즐거이…….”
몰린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나오다가 멈칫거렸다. 햇살에 잠긴 이안과 정면으로 마주한 것이다. 반짝, 하고 짧은 순간 금색 눈이 압생트로 변했다.
‘방금?’
빛에 반사되어 그리 보인 것인가?
그러기엔 무언가 이상하다.
몰린은 찰나의 순간을 되새기며 이안의 눈을 들여다봤다. 백작 부인의 호들갑이 집중을 깨기 전까지.
“첼! 이게 무슨!”
메리 부인이 멍하니 서 있는 첼을 발견했다. 아이가 더듬거리며 이안을 바라봤으나, 그의 표정은 덤덤했다.
‘허튼 말 하면 좋지 않을 거다.’
침묵으로 건넨 경고였으나, 첼에게 잘 닿은 듯하다. 아이는 거의 울먹이며 변명했다.
“…그, 그게, 제가 차를 흘렸습니다.”
“어머. 어머. 세상에!”
그제야 첼을 확인한 몰린은 난감하다는 듯 헛기침하며 등을 돌렸고, 데르가는 눈을 꾹 감았다.
망신 중의 망신, 개망신이다! 열일곱, 다 큰 아들이 응접실에서 실례하다니! 소문이라도 나면 정말 얼굴 들고 다닐 수 없으리라.
“밖에 누구 없니? 누구라도 좋으니 어서!”
“무슨 일이셔요? 에그머니나!”
“옷과 수건 그리고 닦을 걸 가져오렴.”
백작 부인이 하인을 불러대며 어수선을 떠는 동안, 몰린은 조용히 데르가 백작에게 양해를 구했다. 변경에 내려온 중앙처 직원이 무엇 바쁜 게 있겠느냐만은, 계속 이리 서 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백작님? 제가 급한 용무가 있어서요. 일단은…….”
“아아! 그러시지요. 오늘 정말 영광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이안 님께 배웅을 요청해도 될는지요?”
데르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생각보다 고갯짓이 먼저 나갔다. 첼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한 탓이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백작님. 이안 님, 저택이 너무 넓어서 그러하니 노인에게 도움을 베풀어주세요.”
“물론이지요. 몰린 경. 기쁘게 안내하겠습니다.”
저택 구조 따위 하나도 모르지만, 여기 계속 있는 것보다 몰린과 나가는 게 훨씬 나을 터다. 안내야 지나가는 하인 하나 잡아서 그의 외투를 들어주라 하면 되지.
“가시죠.”
이안은 방긋 웃으며 그를 안내했다.
다시금 마주친 압생트 색 눈동자. 몰린은 세월이 담긴 시선으로 아이를 면면히 뜯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