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0
제30화. 거짓을 보는 눈
이안은 천막 안에서 붉은 꽃만 내려다봤다. 아직도 베릭은 코를 곤 채 곯아떨어져 있고, 바깥은 소란스럽다.
대충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윈첸의 병은 ‘실라스크’라는 식물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몇 차례 원정대가 떠났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못한 거지.
‘그런데 이게 그거라고?’
실라스크. 브라츠 저택의 누구도 알지 못했던 화분의 정체. 이안은 꽃잎을 가볍게 쓸며 인상을 찡그렸다. 대체 서자 이안은 생전에 이것을 어떻게 구했단 말인가?
‘분명 이안이 직접 키워냈다고 했어. 필리아가 가까이 있었으면 물어볼 수 있었을 텐데.’
혹여 사창가의 사각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명약이 아닐까? 굴라처럼 말이다. 누군가 발견만 한다면 다시금 인류의 도약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그 생각까지 미치자, 이안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으음.”
그때, 베릭이 일어났다. 전날 먹은 고기와 술 탓에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이안은 서둘러 채비하라는 뜻으로 수건을 던졌고, 베릭은 반쯤 덜 깬 채로 천막을 나섰다.
“아. 이방인이다.”
“쉿. 이방인이야.”
“어제 연회에 갔었다며?”
“어이! 좋은 꿈은 꿨나? 자네들 뱃속으로 들어간 건 최고급이었거든!”
수군덕대는 인파를 헤치며, 이안은 그나마 익숙한 거리를 찾았다. 어제 도착하자마자 갔던 윈첸의 천막이었다. 더욱 짙어진 구룻잎의 향. 네르사른이 이안을 발견하고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자네가 무슨 일인가?”
“좋은 아침입니다. 소란을 따라오니 이곳이더군요.”
“그대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카칸티르의 전언이 있기까지 천막에서 머무르거라.”
이제 이곳에서 이안은 제 밥값을 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도 위치가 있는지라, 아마 고위직들에게 바리엘어와 문화 따위를 전파하는 역할을 맡겠지만.
베릭은 글쎄. 수의 말처럼 노예처럼 굴려질지, 아니면 이안의 보좌 역을 인정받게 될지 모르겠다.
“윈첸 부족장의 상태가 많이 위급하신 것 같습니다.”
“이안 브라츠. 자네는 지금 말이 너무 많아.”
윈첸 부족장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어이없이 혀를 차는 자도 있었고, 노골적으로 분노의 시선을 보내는 자도 있었다. 이안이 상대하고 있는 게 네르사른이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사달이 터졌을지 모른다.
“아침부터 사방에서 시끄러우니, 듣지 않으려 해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안하지만 자네는-”
“한번 피면 지지 않는 꽃, 실라스크라 부르던데. 그것만 있으면 윈첸 부족장님의 건강이 회복되시는 건가요?”
네르사른이 이안을 오래 봐온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분위기를 가리지 못하는 자가 아님은 안다. 이안은 주위를 힐끔거리며 조용히 속삭였다.
“의논드릴 게 있으니 족장님과 대면하게 해주세요.”
보는 눈은 이쯤 하면 되었다. 혹여 자신이 가진 게 실라스크라면, 공로는 바람처럼 이들 사이에 스며드리라. 우호적인 감정을 끌어내야 하는 상황인지라, 약간의 주목도는 필요했다.
차악-
네르사른은 이안을 윈첸의 방이 아니라, 옆의 막사로 데려갔다. 거기에는 카칸티르를 비롯한 지도자들이 원정대를 의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자는 이제 막 아들을 낳았소.”
“다섯째지요. 위로 장성한 자식이 넷이나 있으니, 남은 가족에게도 문제가 없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유달리 활을 잘 쏘는 자이니…….”
“카칸.”
네르사른의 부름에 카칸티르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에는 여전히 구룻잎이 말려있었다.
“무슨 일이지?”
“이안 브라츠가 실라스크에 대해 말할 게 있다 합니다.”
“정확히는 여쭈려는 것입니다.”
“…앉게.”
이안은 자욱한 연기 사이에 자리잡았다. 옆으로 쭉 앉은 노인들이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이안을 지켜봤다.
“실라스크라는 식물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십시오. 제가 짐작가는 바가 있어서, 그것이 맞는지 확인해보려 합니다.”
“짐작 가는 바? 아아. 그대는 실라스크를 모르는가?”
이안은 침묵으로 대신 대답했다.
카칸티르는 연기를 가볍게 내뱉더니, 가에 앉은 의원에게 눈짓했다. 의원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적힌 식물도감의 부분인 것 같았다.
“윈첸 부족장처럼 신의 뜻을 직접 받드는 자들이 걸리는 병을 실라스크라고 합니다. 한평생 그 기운을 담아내다가 노쇠하여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는 것이지요.”
의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기록으로는 아주 옛날, 남국에서 올라온 상인들을 사막에서 천려가 구해주고 실라스크 씨앗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긴 있습니다만… 요즘은 도통 구경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들이 말하는 아주 옛날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현재 천려족에서 윈첸의 젊은 시절을 아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오래도록 버티는 와중, 실라스크에 관한 기록이 희미해졌고, 이들도 지금에 와서야 겨우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이안은 적절한 말로 위로했다.
“바리엘에는 신의 뜻을 받드는 자가 많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집시라고 실언할 뻔했다. 이들에게 윈첸은 중요한 인물이지만, 바리엘 제국에서는 그저 늙은 집시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나마 사기꾼들 천지 중에서도 실력은 있는. 뭐 그 정도.
또한 집시는 평생을 떠돌아 다니기에 그들의 말년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관심이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의원이 미간을 좁혔다.
“어느새인가 실라스크는 소실되었고, 뭐. 지금은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실라스크가 혹시… 한번 피면 절대 지지 않는 붉은 꽃, 맞습니까?”
“기록에 문제가 없다면요.”
그러자 이번에는 카칸이 미간을 곱게 찌푸렸다.
“자네의 말에서 실라스크의 향이 느껴진다.”
이거 완전 개코네.
이안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브라츠 영지에서 실라스크로 추측되는 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붉은색이었는데, 한번 피고는 지는 법이 없더군요.”
하물며 태양도 하루에 한 번은 지는 법이거늘, 한낱 꽃이 지지 않는다라. 분명 특별한 경우다. 이안의 말에 카칸티르가 다그쳤다.
“진실인가?”
“저도 놀랐습니다. 그래서 실라스크 얘기를 듣자마자 이리 온 것입니다.”
자. 어떻게 할까. 시기만 잘 맞아떨어진다면, 이들을 꾀어서 브라츠로 데려가는 방법이 있었다.
황제의 중앙군이 브라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을 때, 천려의 힘을 등에 업고 가면 생명은 물론이고, 잘만하면 영지까지 얻게 되리라.
하지만…….
‘윈첸이 오늘내일한다는 게 문제군.’
중앙군이 브라츠로 당도할 때까지 그녀가 버틸 수 있을까? 글쎄다. 연회 도중 족장이 뛰쳐나갈 정도면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상태였다.
“자세히 말해보게.”
“그 전에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다른 쪽으로 쓸 수밖에.
이안의 말에 카칸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부족장의 목숨을 두고서 흥정을 하는 태도라.
“부탁이라? 그 전에 윈첸의 숨이 끊어지면, 자네 목도 떨어질 것인데?”
“저를 화친의 대상이 아닌, 바리엘 제국의 손님으로 취급해주십시오.”
황제의 명이 없었으니 ‘사신’이라든지, ‘대표자’라는 표현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뜻 자체는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확실한 생명의 안전과 존대를 원한다는 것이다.
“브라츠는 거대한 바리엘을 이루는 하나의 조각입니다. 브라츠의 화친을 황궁에서도 알고 있으며, 제가 이곳에 온 것 역시 따지고 보면 황궁의 뜻입니다.”
꿀 바른 것처럼 흐르는 이안의 주장에 카칸티르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것 봐라? 싶은 시선은 덤이다.
“그래? 그렇다면 내 묻지. 지금 자네의 목이 떨어지면, 황궁에서 이곳까지 군대를 몰고 올까? 자네의 주장대로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맞지 않나?”
“군대를 끌고 올지는 모르겠으나, 문제가 될 것은 분명합니다. 저한테는 오래도록 이어진 황궁의 정신이 깃들어 있으니까요.”
콰앙!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노인이 탁상을 내려쳤다. 그들의 언어인지라, 무어라 말하는지는 모르겠다. 대충 뱀의 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 같은데…….
다른 자들은 침묵했지만, 이안의 말이 허황된 것이라 믿는 눈치다.
“황궁의 정신?”
이안 이자는 지금 저가 황궁의 핏줄을 이었다 말하는 건가? 데르가가 아비라며?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분명히 할 수 있는 건, 육신은 데르가 브라츠에게 물려받았으며 정신은 황궁의 그것입니다. 족장께서 어렵게 들어줄 문제가 아니라 생각하는데요.”
“좋다. 그래, 좋아. 자네 같은 자들 때문에 신께서 윈첸을 내려주었지. 이봐!”
카칸티르의 고함에 전사 둘이서 다가와 이안의 팔을 잡아끌었다. 천막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베릭이 깜짝 놀라 달려들려 했지만 이안은 가볍게 손을 들어 막았다.
‘됐다.’
이들은 이안을 윈첸에게 데려가려는 것이었다. 이안이 기다리라는 눈빛으로 베릭을 쳐다보고, 이내 다시 부족장의 천막에 들었다.
“윈첸.”
“아아…….”
숨이 가쁘지만 의식은 돌아온 모양이었다. 시종들이 그녀를 천천히 일으켜 주었고, 그녀의 뿌연 눈동자는 계속 하늘을 향해 있었다.
“이자가 말하기를, 실라스크에 대해 아는 게 있다 말하오.”
“정확히, 짐작 가는 바가 있다고 했습니다.”
“…짐작 가는 바가 있다 하니. 진실인가?”
윈첸의 입가로 침이 주룩 흘렀다. 그녀는 음성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동시에 시종들이 환희 찬 탄성을 내질렀고, 뒤따라 온 네르사른 역시 한 줄기 빛을 찾은 것처럼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 또한 이자의 정신이 바리엘 황궁의 것이라 하였소.”
이번에도 고칠 말이 있는가?
카칸티르는 이안을 내려다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 자리에서, 윈첸의 고개가 저어지면 이안의 다리를 잘라버릴 요령이었다. 실라스크에 대해 들어야 하니, 지혈은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아…….”
그때, 윈첸이 숨을 훅 들이쉬었다. 몸이 달달 떨리며 눈을 감았다. 거짓을 가리는 와중에는 절대로 눈 감는 일이 없었는데.
“……!”
그리고 이내, 모두가 침묵했다. 윈첸은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른 두 손을 가슴팍에 올려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그녀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허리를 숙여 앞으로 엎드렸다. 누가 봐도, 귀한 자에게 올리는 인사였다.
“윈첸?”
“으으…….”
그리고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지는 부족장. 의원이 달려와 맥을 짚었고, 시종들은 따뜻한 물을 길어오기 위해 달려나갔다. 이안은 그녀를 가만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실라스크는 제 천막에 있습니다.”
그의 말에 카칸이 놀라서 멈칫거렸다. 족장이 명령을 내리지 않자, 듣고 있던 네르사른이 바깥으로 달려가 소리쳤다.
“이방인의 천막으로 가! 가서 붉은 꽃을 찾아라!”
“어? 어어? 그건 왜?”
“어서! 한시가 급하다!”
“이안! 뭔데? 이거 어떻게 해? 들고 튈까?”
베릭의 외침에 이안이 살며시 웃었다.
“되었다. 내, 바리엘의 손님으로 이들에게 주는 첫 선물이다.”
이안은 기품있는 목소리로 베릭에게 알렸다. 구룻잎 향이 가득한 윈첸의 천막. 이안은 처음으로 카칸과 동등하게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