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00
제300화. 속내
버고스의 왕 다몬 런크비스. 그는 검은 단발을 아래로 묶은 채 창밖을 지켜보고 있었다.
척박한 제 나라와 다르게 젖과 꿀이 흐르며, 백성들이 축제를 즐길 줄 아는 나라. 황제도 아니고, 존재감 희미했던 황자의 임명식 하나에 이렇게나 즐거워하는 모습이라니.
그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기울이자, 덜 묶인 머리칼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버고스에서 막 도착했나 보군.”
“저리도 멋있는 흑색 마차는 처음 봅니다.”
“안녕하세요! 버고스!”
“환영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마 진 황자님께서도 그리하시겠지요!”
“버고스! 손 흔들어줘!”
하필이면 막 지나갔던 나라가 클리포포드인지라, 사람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말 위에서 펼쳤던 곡예, 눈이 마주치면 찡긋거리는 태도, 거기에 가슴을 울려대는 악단까지 보았으니, 기대가 부풀어있을 대로 부푼 참이다.
왕의 마차 앞, 마부석 뒤에 앉아있던 티모시가 난감하게 시선을 멀리했다.
타닥타닥!
처억!
버고스의 호위와 기사들, 심지어는 말단 시종들까지 위엄있게 각을 맞춰 걷는 중이라. 틈 사이로 아이가 내미는 꽃 한 송이 받을 여유가 없었다.
가끔가다 박자를 맞추기 위해 울리는 물소뿔 소리를 제외하고, 버고스의 행진은 참으로 적막했다.
마치 임명식을 축하하러 온 것이 아니라, 전쟁 중 입성한 적국의 긴장감이다. 난간에 걸쳐 꽃가루를 뿌려대던 자들이 김샌 것처럼 멈추고 턱을 괴었다.
“왜들 저래? 좀 웃어! 분위기 망치지 말고!”
“어째 저 나라도 변하질 않네. 내버려 둬. 원래 예전부터 저랬어. 쌀쌀맞고, 차갑고. 나쁘게 말하면 재수 없는 거지. 그래도 왕 바뀌면서 좀 달라지지 않았나 싶었는데.”
“왕이 왜?”
“어리잖아. 아마 우리 마법부 장관님보다 조금 많을걸? 뭐, 워낙 그쪽 왕실이 말 많아서, 범상치는 않겠구나 싶었지만.”
“말 많다니?”
“잡놈들이 왕실 피가 흐른다면서 설친다더군.”
“뭐? 으하하!”
버고스의 행진은 적막했지만, 중앙은 수천 명의 잡담과 노래 따위로 가득 차 있었다. 술 취한 자들이 호의적이지 않은 말을 떠들어대도, 마차까지 닿을 리 없다.
스윽.
“전하. 잠시 후 황궁에 당도합니다.”
저 멀리, 중앙 길의 끝에서 바리엘의 병사들이 나와 있는 게 보였다. 티모시가 마차 안쪽과 연결된 창문으로 보고하자, 다몬은 자세와 시선을 바로 했다.
‘없는 것인가.’
비밀을 먹는 집시.
과거와 미래를 안다는 것만으로, 자신이 진리를 아는 것처럼 방자하게 구는 자였다. 자신이 쫓는 걸 알고 있다면, 필시 군중 틈에 섞여 농락하듯 구경하고 있으리라.
다몬은 볼 안쪽을 깨물며 마부석과 이어진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티모시의 옆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는 어찌 될지.’
솔직히, 다몬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이전 생의 티모시와 지금의 티모시가 과연 같은 사람인지 말이다.
자신이 회귀하면서, 그리고 버고스의 역사가 뒤틀리면서, 많은 자의 운명이 바뀌었다. 티모시 역시 분명히 영향을 받았으리라.
그렇다면, 그 끝 역시 다를 것인가?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에 직접 파생되는 것 외, 영향을 받지 않는 것도 있었어.’
만약 지금 삶이 세 번째였다면, 흔들림 없이 모든 걸 알았을 터인데.
다몬은 잠시 눈을 감았다. 마차의 속도가 점점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황궁에 당도하면, 폭풍 속으로 몸을 내던지는 것과 같다.
달깍, 마차 문이 열리는 순간, 그가 눈을 떴다.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보랏빛 눈동자가 바리엘의 햇빛에 물들어갔다. 이전 생에는 저 대신 아버지가 왔던 곳.
끼이익.
“어서 오십시오. 버고스의 왕이시어.”
바리엘의 수상으로 보이는 자가 가슴팍에 손을 올린 채 공손히 인사했다. 그의 뒤로는 황궁의 관료들이 부채꼴로 서 있었다.
다몬이 마차에서 내리자, 그들 역시 동시에 손을 올리며 예의를 차렸다. 바람이 유독 휘몰아치는 순간이었다.
“고단하지는 않으십니까? 긴 여정, 바리엘을 위해 달려왔음을 저하께서 헤아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수상이 안내하며 몸을 틀자, 그의 뒤에 서 있던 금빛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놀랍도록 앳된 소년.
다몬은 그자가 바로, 티모시의 보고에 올라와 있던 이안 히엘로라는 것을 알아챘다. 마법부의 장관이자, 변경의 서자 출신이라는.
* * *
창백하다.
다몬을 처음 본 관료들의 첫인상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바로 저것이라.
그는 예민한 기질을 지닌 듯했다. 수상이 따라오라는 듯 잠시 멈추었지만, 그는 우두커니 서서 이안만 바라보고 있었다.
“다몬 왕이시어,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가지.”
이안은 다몬이 지나갈 때까지 시선만 계속 내리고 있었다. 섣부르게 저자와 말 섞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그것이 설령 통성명 정도의 간단한 대화라 하더라도, 모든 교류에는 정보가 담겨있는 법이다. 상대의 호흡, 말투, 몸짓, 자주 사용하는 단어 등등.
혹여 지금 이안의 존재가 다몬이 처음 보는 것이라면, 더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스윽.
다몬은 이안을 스쳐 지나갔다. 수상과 다몬을 선두로 하여, 버고스의 사절단과 황궁의 관료들 역시 줄지어 따랐다.
티모시는 이안과 시선이 마주치자, 고개를 까딱거리며 가볍게 인사했다. 오느라 수고 많았다고, 이안 역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 어서 오시오. 다몬 왕.”
“처음 뵙겠습니다. 진 저하. 임명식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바리엘의 앞날에 오늘과 같은 꽃비가 내리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진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밀자, 다몬은 공손하게 맞잡으며 찬사를 건넸다. 날카로운 분위기와 달리, 내뱉는 인사는 꽤나 부드럽다.
진은 싱긋 웃으며 어서 앉으라 손짓했다.
“그대들이 마지막 손님이오.”
“이런. 송구합니다. 늦은 건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언제든지, 중앙 길이 열려있는 한 늦은 건 없어. 자자, 다들 앉으시게.”
진의 안내에 다몬이 맞은편에 자리했다.
수상과 진 역시 마찬가지.
쪼르르.
진은 차오르는 홍차를 보며 저도 모르게 난감히 웃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몇 잔째이던가? 에리포니 왕과 메이 사절 그리고 간식 시간까지. 벌써 네 번째 티타임이었다.
뒤편에 서 있던 시아오시가 그걸 눈치채고 걱정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3국이 모이는 것이라, 차별 없이 하기 위해서는 찻잔 하나 쉬이 바꿀 수 없거늘.
“황자 저하.”
“음?”
“실례가 안 된다면, 차는 잠시 미루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막 마차에서 내린지라 속이 안 좋아서요.”
그때, 아주 적절한 부탁이 들어왔다. 제 속을 읽었나? 진은 내심 놀랐으나, 이내 감정을 갈무리하며 개의치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이지.”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몬은 예의상 입을 대기만 하고, 티스푼을 차 받침에 올려놓았다. 앞으로 마시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손님이 마시질 않으니, 진 역시 맞춰서 마실 필요 없다. 아이는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별궁으로 의사를 보내주겠네. 길 위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면 아무래도 몸이 많이 힘든가 봐.”
“…감사합니다.”
티모시가 진상품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놓는 와중, 다몬은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어린 황자가 궁 밖으로 나간 적 없을 터. 여독을 어찌 공감한단 말인가?
혹, 먼저 도착한 상대국 중 문제 있는 곳이 있나?
‘그리되면 곤란한데.’
그리고 그런 그를 지켜보는 이안. 루스웨나나 클리포포드와 달리, 이번엔 다른 관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그 태도의 차이를 알아챈 몇몇 관료들이 서로 어색하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달깍.
“진상품입니다. 버고스의 귀족들이 전역에서 특별히 선별하여 올린 것이니, 부디 정성을 헤아려 주십시오.”
“일러보게.”
“이것은 두과자 말린 잎입니다. 십 킬로그램짜리를 한 묶음으로 하여 쉰 묶음 준비했습니다. 건조한 버고스에서 생산하는 대표적인 작물이지요.”
“아, 들어본 적 있네. 주로 마취제로 쓰인다지. 보통 두과자라 하지 않고, 브르도두과자 잎이라 하던데.”
“브르도는 작물 최대 생산을 주도하는 가문입니다. 두과자가 공식 명칭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카켈가에서 내려오는 금빛 다이아몬드입니다. 가주부터 내려오던 보물인데, 저하의 임명식을 축하하기 위해 가보를 내었습니다. 저쪽에.”
다몬이 손짓하자, 사절단 틈에 섞여있던 한 사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진은 신기하다는 듯 작은 보석을 들여다봤다. 딱 하나만 올라와 있는 것으로 보아, 희소성은 말하지 않아도 알 법하다.
“그렇군. 내 기쁜 마음으로 받겠다.”
“그리고 다음은…….”
작은 상자에 본보기로 준비한 것이 어찌나 많은지. 이전 두 나라와 비견할 수 없이 풍성한 진상품이었다. 진을 비롯한 관료들이 흥미로운 탄성을 내지르며 소개를 들었다.
“오오, 그렇군. 거기서 나오는 작물이었단 말이지.”
“예. 버고스가 척박하고 건조하긴 합니다만, 그에 맞추어 나고 자라는 것들이 다양합니다.”
달깍. 이안은 회중시계를 슬쩍 확인하고서 수상에게 눈짓했다. 하하, 웃던 그가 이안의 신호를 알아채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만찬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 이쯤하여 마무리하라는 뜻이다.
“저하.”
“…음?”
“진상품은 모두 확인한 듯하니, 이만 자리를 물리심이 어떠하십니까? 다몬 왕께서도 여독을 푸심이, 곧 있을 만찬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그래. 그렇지. 내 진상품이 마음에 들어 잠시 잊고 말았네. 버고스의 사절단 역시 짐 풀 시간이 필요하지.”
안 그래도 속 안 좋다는 사람 두고 말이 너무 많았다.
“아닙니다. 저하. 저하께서 기뻐하시니, 저 또한 먼 길을 온 보람이 있습니다.”
“별궁으로 안내해 드리리다. 만찬에 관해서는 따로 안내가 갈 것이오. 수상.”
“예. 저하. 버고스의 왕이시어. 제가 안내드리지요.”
“고맙소. 저하. 만찬 때 뵙겠습니다.”
다몬은 처음 만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의를 갖춰 인사한 뒤, 응접실을 나섰다.
외관만 보면 허리 굽히는 법을 모르는 자 같은데, 진에게 하는 태도가 가히 반전이다. 관료들 역시 사절단을 따라 순차적으로 응접실을 떠났다.
끼이익.
쿵!
마지막 관료가 나가고, 응접실에는 이안을 비롯한 가까운 일행만 남았다.
진은 만족스럽게 무릎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진상품의 질도 그러하고, 왕이라는 자가 생각보다 괜찮은 듯했다. 무엇보다 공식적인 낮의 일정이 모두 끝난 것이라. 이제 만찬만 지나면 푹 쉴 수 있다!
“이안? 왜 그러는가?”
하지만 곧 들려오는 로만드로의 물음에 진이 고개를 돌렸다. 웃고는 있지만, 뭔가 입매가 틀려있는 듯한 얼굴로 이안이 턱을 문지르고 있었다.
“이안 경?”
“…저하.”
왜 그러는 것이지?
이안은 진의 가까이에 앉아 손을 꽉 맞잡았다. 낮에 있었던 어색함이 희미하게 남아있었지만, 이안의 미소가 너무 살벌해서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잘 들으십시오. 3국 중, 버고스를 제일 경계하셔야 하겠습니다.”
“응? 무슨 말인가? 혹, 그자가 기민하여 그런가?”
진이 차를 마시고 싶어하지 않는 걸 바로 알아챘다. 분명 눈치가 빠른 자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태도로 보았을 때는 에리포니가 제일 위험하지 않나?
“저하. 지금껏 받은 진상품을 잘 살펴보십시오. 무언가 다르지 않습니까?”
이안의 말에 진과 로만드로가 기억을 더듬었다. 가짓수와 수량이 워낙 다양해서, 무엇이 다른지 짚어낼 수 없었다.
“…다른 왕국은 왕국이 주체적으로 진상품을 준비해 올렸습니다. 하지만, 버고스는 모두 귀족들이 올린 것이지요. 이것의 의미를 모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