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01
제301화. 의미를 바꿀 시간
“아…….”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로만드로가 탄성을 내었다. 무언가 확실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라.
그는 아직 정돈되지 않은 진상품을 내려다보며 세세히 확인했다.
이안의 말대로다. 다이아몬드니 뭐니 값비싸고 귀한 것들이라 소개하였지만, 나온 주머니를 따지고 보면 죄다 버고스의 귀족들 것이었다. 하나하나, 인사까지 따로 받지 않았나?
“세상에, 왜 이걸…….”
이걸 왜 아무도 몰랐을까? 응접실에 수많은 관료가 있었는데 말이다.
그에 이어서 진 역시 입매를 굳혔다. 관료들이 못 알아챈 것 또한 문제지만, 어쨌거나 이안이 알아채서 저에게 일러주었다. 진실한 문제는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라.
“태도와 과정에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 루스웨나 역시도 왕궁에서 만든 활을 내놓았습니다. 저하께서 돌려보내셨으니, 다시 신체에 맞는 것을 제작해 올리겠지요. 클리포포드는 말할 것도 없이, 왕실 전통악기를 특별 제작하여 세 대나 올렸습니다. 하지만, 버고스는요?”
아무것도 없다.
번지르르하게, 허리까지 숙이며 성심을 다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안은 말린 잎을 한 손에 쥐어 바스러트렸다.
“…알아채지 못한 걸 너무 상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철저하게 그들이 의도한 것이니까요.”
다몬 왕 혼자서 한 것이 아니었다. 왕이 황자와 대면하는 동안, 뒤에 물러서 있던 귀족들은 관료를 대면하였다.
“가짓수가 많고, 그에 담겨있는 의미와 얘깃거리가 상당했습니다. 귀족의 것이 아니라면, 실로 놀라울 정도의 품질들이긴 합니다. 게다가 하나를 소개할 때마다 귀족을 끌어들여 대화의 참여자가 많아졌고, 무엇보다 흠잡을 거리 없이 완벽한 예의로 저하에게 공손함을 표했지요. 경계를 허무는 것 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다 계산한 수작입니다.”
그리고 그걸 간파했는가 역시 또 다른 시험이었겠지. 건방지게 말이다.
이안이 입매를 올리며 손에 묻은 가루를 털어버렸다. 미소를 짓고 있긴 한데, 참으로 살벌하다.
“저하.”
무례를 넘어선 도발이고, 도발을 넘어선 선전포고. 귀족의 진상품을 황자에게 올린 의미를 알아채겠는가? 이안이 눈짓으로 묻자, 진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조적이고 자괴감 섞인 숨이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나는 웃었다.”
“…저하.”
“이만하면 잘 준비하였구나 싶어서, 나는 웃었어.”
“저하. 저를 봐주십시오.”
이안이 진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재미있는 것을 일러드릴까요?”
“…재미있는 것이라니.”
“실수는 말입니다. 만회할 수 있기에 실수라 부릅니다. 실패는 가차 없지만, 실수는 다음이 있는 걸 허락하지요. 저하께서는 그저 실수한 것이라, 충분히 만회할 수 있습니다. 지금 몰랐다고 하셨지요. 몰라서 웃었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다몬 왕도 모를 겁니다. 저하의 웃음이 어떤 의미였는지.”
다몬 왕의 겉과 속이 다르듯, 진 역시 겉과 속이 다를 수 있지 않나.
로만드로는 이안의 뜻을 알아채고 과하게 손뼉 치며 옆으로 다가왔다. 그 역시 진과 눈높이를 맞춰 무릎 꿇었다.
“맞습니다, 저하! 몰랐으면 뭐 어떱니까? 지금이라도 알았다는 게 중요하지요. 저하께서 아까 그리 웃으시었지만, 그것을 사실 모두 파악하여 기회를 엿보기 위한 행동이셨습니다. 그리 여기세요. 그러면 다몬 왕이 알게 뭐랍니까?”
“그러니까, 만찬 때가 기회라는 말들이오?”
“물론입니다.”
3국의 지도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 그곳에서 버고스를 영민하게 견제하고 공격한다면, 다몬 왕은 진이 보였던 웃음을 계산된 것으로 판단할 것이다.
하지만 만찬에서 특별한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면? 아둔하여 진상품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한 애송이 황자라 여기겠지.
“기회가 있는데 어찌 실수를 실수로 남기겠습니까?”
진은 눈을 또르르 굴려 이안과 진상품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문득, 저도 모르게 물었다.
“혹 이안 경도 이런 적 있소?”
“이런 적이라 하시면…….”
“실수하였지만, 아닌 척 수습한 적.”
지금껏 봤을 때, 수많은 난관을 거치며 단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았던 이안이다.
꽤나 흥미로운 질문인 터라, 로만드로 역시 시선을 슬쩍 돌려 이안을 쳐다봤다. 시아오시도 마찬가지. 다들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있습니다.”
이안은 방긋 웃으며 그리 일렀다. 로만드로가 눈을 반짝이며 되물으려고 하자, 단번에 묵살했지만.
“하지만 비밀입니다.”
“헉. 왜?”
“자, 저하.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버고스의 왕이 귀족들을 통해 진상품을 올렸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짚어주십시오.”
“아이고, 이럴 때 베릭이 있었어야 하는데.”
베릭이 있었더라면, 이안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을 거라 의심치 않았다. 로만드로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종이와 펜 따위를 가져와 진 앞에 대령했다.
“우선, 나를 무시하고 바리엘을 격하하였네.”
감히 제국으로 보내는 진상품을 귀족들의 손에 맡기었으니, 이는 대국을 대국으로 보지 않는다는 태도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기서 더 확장하여 생각할 것은-
“옳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3국의 동맹이 유력한 상황. 주도적으로 결집한 세력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였었죠. 처음에는 루스웨나가 하이만과 연관되어 있으니, 바리엘 내부 사정을 다른 두 나라보다 잘 알고 있다 하여 그쪽을 의심했습니다. 기억하시지요?”
기억하고 말 것도 없다. 에리포니 왕을 만나러 가기 전 나누었던 대화였으니까. 진은 곰곰이 고민하며 중얼거렸다.
“버고스가 동맹의 주체라 이 말인가?”
“예. 바리엘을 대국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이는 저희를 격하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버고스 스스로를 격상하는 것입니다. 또한, 루스웨나와 클리포포드에게 일러주는 것이지요.”
보아라. 3국의 동맹은 바리엘에 맞설 수 있고, 이에 앞장서는 것이 버고스다. 활시위를 먼저 당겼으니, 뒤에 있는 두 나라도 틀림없이 따라오라.
가만 듣던 로만드로도 조심스레 말을 얹었다.
“그, 저하. 가만 생각해 보니, 버고스의 귀족들 또한 범상치가 않습니다. 제아무리 왕의 명령이라고 한들, 자국에 바치는 것도 아니고 타국의 황자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가주부터 내려오던 보석이나, 귀해서 저들도 쓰지 못한다는 작물 따위를 쉬이, 그것도 이리 많이 보낼 수는 없는 일이지요. 깨달으니, 눈에 보입니다.”
득과 실을 귀신처럼 따지는 자들이 귀족이다. 가보를 내놓았다는 것은 그만한 이득을 상정하였다는 것인데, 당최 알 만한 길이 없다.
이안이 덧붙여 설명하려는 순간.
계속 조용히 자리하고 있던 시아오시가 손을 들었다.
“…시아?”
“저하, 송구하오나 감히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미천한 경험이지만, 꼭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경험에 어찌 천하고 귀한 게 나뉘어 있단 말인가? 일러보라.”
이안은 조금 놀라고 말았다. 한 번도 시아오시가 첨언하는 걸 본 적 없기 때문이다. 받아들이는 진의 반응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아, 이번이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생각보다 훨씬 잘하고 있구나.’
이안이 없는 진의 곁에서, 시아오시는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는 듯했다. 이안 역시 동의한다는 뜻으로 이쪽으로 오라 손짓했다.
시아오시는 세 사람과 함께 소파를 나눠 앉으며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예전에, 제가 아주 어릴 때의 일입니다.”
“어릴 때라 하면, 언제?”
“제가 나이를 모르는 터라,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키가 갈대를 넘지 않을 때였으니, 꽤 오래전의 일이지요.”
헙. 로만드로는 괜히 아픈 상처를 건드렸나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시아오시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 것 같지만.
“당시 주인은 사채업자였습니다. 그는 어린 제가 보아도 갚을 능력 없는 자에게 큰돈을 턱턱 내주곤 하였는데, 심지어는 집터 따위도 알아봐 주어 알선했었지요.”
몇 번째 주인인지도 기억 안 난다. 하지만 긴 세월 동안, 뇌리에 박혀있는 말이 있었으니.
“어느 날, 그 주인의 자식이 저와 같은 의문을 품었는지, 아비에게 묻더군요. 어찌하여 그런 자들에게도 돈과 물건을 빌려주냐고요. 그러자 그자가 이리 대답했습니다.”
“…무어라고?”
“어차피 다시 되돌아온다.”
다시 회수할 자신이 있었으니, 그리 쉬이 내준 것이다. 이는 버고스 왕국의 귀족들에게도 통용되는 심리일 것이다.
“회수할 수 있으니, 진상품으로 올린 것 아닐까요? 그 이전에, 이런 사안을 제안할 수 있을 만큼 왕의 힘이 강하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맞아. 제아무리 왕이라도 저 먼 지방의 귀족들 창고까지 쉬이 털 수는 없는 법이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들었는데,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걸 과시하면서…….”
“과시하면서? 무엇인가, 로만드로?”
진은 로만드로에게 뒷말을 계속 이어달라 재촉하였으나, 그는 입만 벙긋거리며 쉬이 소리를 내지 않았다.
회수할 자신이 있는 것과, 강력한 왕권.
둘 사이의 상관관계가 성립되려면 딱 하나의 가정만 있었으니까.
“저하.”
로만드로는 차마 말할 수 없는지, 침만 꼴깍 삼켜댔다. 그를 대신한 것은 이안이다.
“3국이 이제껏 동맹을 맺지 않았던 것은 바리엘의 눈치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눈치를 보았던 것은, 국가 간의 긴장감이 존재했다는 것이고, 이는 곧 다방면에서의 국가적 제재를 의미합니다.”
“그럼…….”
“정치, 경제, 문화적인 제재. 혹은 전쟁.”
전쟁.
그것을 상정하면 귀족들의 계산을 훨씬 수월하게 짐작할 수 있다.
황궁이 함락한다면, 가보를 되찾는 것은 물론이요, 기여도의 측면에서 더 넓은 봉토와 재산을 하사받을 수 있지 않나? 이것 외에는 등가교환 할 만큼의 적당한 이득이 없다.
“…전쟁?”
“놀라실 것 없습니다. 3국이 동맹을 맺는다고 하면, 크든 작든 물리적인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전쟁을 염두에 두는 것이라면 버고스의 모든 게 이해 가능했다. 도발적인 태도 하며, 왕국의 재산을 한 푼 내어놓지 않는 것까지.
“으음. 일리 있어. 왕실에 돈이 없어서 귀족들에게 손 벌렸다 하기에는, 그 진상품이 과해. 돈 없는 왕에게 할 만한 충성이 아니라.”
로만드로는 팔짱을 낀 채 혀만 끌끌거렸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과 계산이 뒤섞여있는 듯했다. 하지만 앉아서 다몬 왕의 속내를 어찌 꿰뚫을 수 있겠는가?
이안은 진상품 상자 뚜껑을 닫으며 진에게 일렀다.
“저하.”
진과 대화하며 사그라들었나 싶었는데, 다시금 냉랭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돌아가시지요. 만찬과 함께, 버고스에게 돌려줄 것 또한 준비하는 게 좋겠습니다.”
감히 대제국 바리엘을, 그것도 새로운 역사의 시작점인 진의 임명식에서 이따위 깜찍한 짓이라니. 이안은 쉬이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며, 저도 모르게 아이의 손을 잡았다. 진은 거부하지 않았다. 문득, 이리 맞잡은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알겠네. 단단히 하지.”
“물론입니다. 저하께서는 하실 수 있어요. 웃음의 의미를 바꿀 시간입니다.”
자신이 도울 것이라. 미래를 보는 자의 머릿속은 곧 자신의 머릿속이었으니.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