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03
제303화. 왕들의 만찬
어스름한 저녁 빛을 넘어, 완연한 밤이 도래하는 시간. 거대하고 장엄한 황궁의 모든 건물에 불이 들어왔다.
첨탑 끝까지 오른 불빛은 마치 별들이 승천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 끝에 걸려있는 바리엘 국기는 밤이 되어도 지워지지 않았다.
아마, 궁 밖에서도 훤히 보이리라.
하여, 제국민들의 열기 역시 식어 들지 않으리라.
“…에리포니 왕이시여.”
루스웨나의 여왕, 에리포니는 마차에 내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으로 대단하지 않나? 저것 또한 마법사의 힘일 것이니, 바리엘이 어째서 역사 전반에서 ‘승자’의 자리를 가져갔는지 알 것 같았다.
“들어가지. 보채기는.”
“송구합니다. 만찬 일정이 있는지라.”
관료가 난감하게 고개를 숙이며 재차 재촉했다. 입장하라 일렀는데, 꼼짝 않고 전경만 구경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휘어잡으며 앞장서라 고갯짓했다. 에리포니 왕의 뒤로, 치장한 엘더트와 루스웨나 사절단이 질서정연하게 따라붙었다.
타닥.
거대한 본궁의 홀.
듣기로는 신년회를 비롯한 각종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곳이라 하였다. 곳곳에 놓인 장식품의 수준 하며, 거대한 아치형 복도가 놀랍다.
조금씩 들려오던 악단의 선율이 선명해진다 싶었을 때, 관료가 멈춰 섰다.
“에리포니 왕께서는 2층으로 함께하시고, 측근 한 명 외 사절단께서는 중앙 홀로 들어서시지요.”
지도자들은 위층, 잡다한 소음이 섞이지 않는 곳에서 만찬을 즐길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 하나하나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터였으니.
사절단들은 모두 고개 숙여 왕을 배웅했다. 오직 엘더트만이 왕의 곁을 지켜낼 것이라. 그에게도 응원하는 눈빛이 침묵 속에서 쏟아졌다.
끼이익.
“내가 첫 손님인가?”
꽃과 초 따위로 풍성하게 장식된 정찬 테이블. 관료는 말없이 그녀의 자리를 안내해 주었고, 에리포니는 조금 짜증 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입궁 순서라고는 하나, 클리포포드는 아직 왕도 아니고 왕자인데, 저보다 늦게 들어오는 게 맞는 것인가?
아래층을 내려다보니, 바리엘의 관료와 귀족들이 루스웨나 사절단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다.
“클리포포드의 노아 왕자님 도착하셨습니다.”
“오호, 이런.”
“에리포니 왕이시군요.”
“반갑습니다. 노아 왕자. 오랜만에 뵙지요.”
왕자는 클리포포드 전통 의상을 입은 모습으로 메이 사절과 함께 나타났다.
에리포니는 별생각 없이 인사했건만, 어쩐지 노아 왕자의 눈매가 심상치 않다. 그녀는 식전주를 입에 대며 의아하게 되물었다.
“몸살이 나셨다고 하던데, 괜찮으십니까?”
“어찌 들으셨는지 놀랍네요. 예. 덕분에요.”
“황궁이 소란스러우니, 사사로운 말들이 쉬이 들려옵니다. 한 것도 없는데 치하해 주시니, 실로 감사하네요.”
“루스웨나발 이상 반응 검사로, 마법사들이 직접 와주어 상태를 봐주었거든요. 그러니 당연히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아 왕자의 가는 눈매가 더더욱 가늘어졌다. 오늘 있었던 모든 일들의 원인은, 따지고 보면 드래곤 항체 이상 반응 때문이다. 그것만 아니었어도 황실에 정체를 들킬 일은 없었으니까.
에리포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하려는 순간이었다.
“드래곤 항원‧항체 이상 반응은 우리도-”
“버고스의 다몬 왕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끼이익.
다몬의 입장이 대화를 잘라먹었다.
노아는 새침하게 눈을 흘기며 입구 쪽으로 몸을 틀었고, 에리포니는 엘더트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쟤가 대체 왜 저러는지 아느냐는 듯.
“반갑습니다. 에리포니 왕. 그리고 노아 왕자. 3국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처음이군요.”
“예. 그러게 말입니다. 무엇보다 버고스와 이리 함께할 줄은 몰랐습니다. 아버지께서 안부를 꼭 좀 전하라 하셨답니다.”
“아하. 예에. 돌아가시면 제 안부도 전해주십시오.”
접경한 버고스와 클리포포드.
두 나라는 이전부터 그다지 사이가 안 좋았기에, 이런 만남이 참으로 고무적이고 의미 있었다. 그들은 가볍게 악수하며 자리에 앉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이 시선을 주고받으며, 모두 같은 생각인 것을 확인했다.
‘진 황자가 안 보여.’
원래라면 식사 자리를 주최한 자가 먼저 나와 있는 것이 관례다.
하지만 진은 바리엘의 황위 후계자. 신분 격차가 있기에 그런 것인가 싶다가도, 시종들이 문밖에 대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에리포니는 씨익 웃으며 식전주로 목을 축였다.
‘마법사들은 도청도 가능하다고 하더니만, 쉽지 않겠네.’
일종의 판이자, 덫이다.
3국이 모여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지켜보는 것.
세 사람은 그걸 알았기에, 선택적으로 침묵하며 진 황자의 입장을 기다렸다. 아래층에서는 악단의 선율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진 황자 저하 드십니다.”
“정숙하시오! 황자 저하께서 드십니다!”
그때, 위층과 아래층에서 동시에 들려오는 기별. 삽시간에 홀이 조용해지며, 선율조차 숨죽이듯 사그라들었다.
끼이익.
문이 좌우로 젖혀지며, 진이 이안과 함께 입장했다. 머리칼을 완전히 뒤로 넘겨 치장한 모습. 에리포니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조그만 것이, 나름 힘 좀 주었구나. 귀여워라.’
엘더트가 자중하라 눈짓하자, 에리포니는 눈썹만 까딱거렸다.
아이는 상석에 앉기 전,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드넓은 홀이 각지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지이잉. 지잉.
이안이 마도구를 가까이 대주자, 진의 음성이 큰 어려움 없이 모두에게 닿았다.
“다들 자리해주어 고맙소.”
세 나라의 지도자들이 고개를 숙였으며, 아래층의 사절단 역시 마찬가지다.
이안은 시종에게 잔을 건네받아 진의 손에 들려주었다. 금빛으로 사르르 녹아내리는 내용물. 클리포포드에서 올라온 진상품 중 하나다. 도수가 없어 음료에 가까운 것이지만, 분위기를 내는 데는 저만한 빛깔이 또 없을 터.
“새로운 바리엘의 역사에 함께하는 3국을 잊지 못할 것이니. 루스웨나와 클리포포드 그리고 버고스는 바리엘의 은총을 만끽해도 좋다.”
진이 잔을 들어 올리자, 아래층에 모여있던 자들이 그를 따라 했다. 왕들도 별수 없다. 축전치고는 상당히 예민한 내용이지만, 어찌하겠나?
“축제를 즐기시어, 웃는 자만이 모든 걸 갖고 돌아갈 것이다. 만찬을 들라.”
째앵! 쨍!
“영광입니다, 저하!”
“영광만이 깃들기를! 실로 경사이지요!”
“축하합니다! 하하하!”
곳곳에서 잔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은 가까이 있는 이안과, 그리고 3국의 왕들은 저들끼리 건배하며 술로 입술을 축였다.
이안이 악단을 내려다보며 손짓하자, 멈췄던 음악이 다시 연주되었다.
“클리포포드의 노아 왕자는 처음 보는군. 몸 상태는 좀 괜찮은가?”
“아, 예. 저하. 편의를 봐주신 덕분입니다. 실로 감사드리며, 송구합니다.”
노아가 이안을 힐끗거리며 그리 대답했다. 진 황자는 자신이 수인인 걸 알고 있을 터인데, 태도에서는 어찌 특별한 반응이 없다. 하긴, 그것이 서로에게 유리하긴 하다만.
“식사를 들지.”
“예. 저하.”
진의 지시에 만찬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래층보다는 조금 고요하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에리포니였다. 아무래도 드래곤 이상 반응과 관련하여 루스웨나가 오해를 받는 것 같으니, 이를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이란 판단이다.
“한데, 저하.”
“이르시게.”
진은 식전 음식을 가볍게 썰며 대꾸했다.
“말씀하셨던 드래곤 이상 반응에 관한 것입니다. 루스웨나에서 시작된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본국에서는 신고된 사례가 없습니다. 저희만 그런 것이 아니라, 클리포포드도 검사를 마쳤다고 들었는데요. 보시다시피, 결과에는 어떤 문제도 없습니다.”
드래곤 이상 반응이라는 말이 나오자, 노아와 다몬의 표정이 상반되었다. 노아는 짜증을, 다몬은 의구심을 품어낸 낯이었으니.
진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화두를 던졌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 섣불리 루스웨나를 언급하심은 민감한 사안인지라 감히 자중을 부탁드립니다.”
“루스웨나에서 들어온 드래곤 각린을 만진 자가 감염된 사례가 있지. 왕께서 모르시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불법 사육장인 것 같은데 귀국하시어 내밀히 조사해 봄이 좋을 터라.”
“드래곤 각린 자체가 불법적인 물품입니다. 그것의 출처가 루스웨나인지는 어찌 아십니까?”
“우선, 인근국 중 사육장을 공식으로 운영하는 것은 루스웨나 밖에 없고, 무엇보다 그대가 잘 아는 자의 재산을 압류하여 발견한 것이거든.”
에리포니가 멈칫거렸다. 자신이 잘 아는 바리엘 사람? 그런데 재산을 압류당해? 단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이만?’
진은 천진난만하게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내 실로 의구심이 많았다네. 한데 왕께서는 진정으로 모르는 눈치라, 실로 다행이군. 혹 조사에 부족함이 있다면 황궁에서 조사단을 파견토록 하지.”
…우선 여기서 멈추자. 하이만은 반역죄로 멸문한 자들 아닌가. 황자와의 대화에서 그 이름이 얽히는 것 자체가 루스웨나에는 부담이다.
게다가 듣자 하니 감염으로 출궁한 자가 마법사라 하던데, 손해배상을 요구하면 부르는 게 값이다. 마법사의 가치를 어찌 숫자로 환산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조사단을 파견해 주겠다는 말, 이는 공식적으로 루스웨나에 바리엘의 사람을 심어두겠다는 것.
“아닙니다. 저희 선에서 충분히 가능합니다. 귀국하여 제일 먼저 관련 조사를 지시하도록 하지요.”
“즐거운 소식을, 내 언제쯤이면 받을 수 있겠나?”
“…여름 전에는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진은 어물쩍 넘어가지 않고 기간까지 딱 정하여 마침표를 찍어냈다. 그때까지 연락이 없다면, 바리엘에서 루스웨나로 사람을 보내겠다는 선언이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다몬은 포크 쥔 것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이상한데.’
전염병을 경계하기 위해 검사를 진행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저들은? 버고스는 입궁한 이후 어떤 처치도 받지 않았으니. 이는 생각보다 황궁에서 전염병을 대하는 태도가 중하지 않다는 방증이다.
검사를 마친 루스웨나와 클리포포드. 두 나라에만 관련하여 ‘할 만했던 행동’이라는 것인데…….
‘루스웨나는 근원국이라 하니 그렇다 쳐도, 클리포포드는 어찌하여? 왜 우리는 하지 않았고, 클리포포드는 했을까?’
다몬이 노아와 시선을 맞추었다. 의례적인 눈인사가 오갔지만, 다몬은 끝까지 노아를 훑었다. 그 사이로 쓱 들어오는 이안의 팔. 와인 병을 감싸 쥐고서, 공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잔이 비었습니다. 한잔 올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히엘로 마법부 장관.”
“감사합니다. 티모시, 그대도?”
이안이 묻자, 다몬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셔도 된다는 허락에 티모시가 가까이 다가와 잔을 받았다.
“왕이시어. 이리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이전에, 티모시에게 말씀을 전해 듣고 이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래? 무슨 말을 하던가? 가정을 두고 밖으로 일 보낸 주군이라 욕하지는 않았던가?”
“전하! 무슨 말씀입니까? 당치도 않습니다!”
술 마시던 티모시가 화들짝 놀라며 부정했다. 이안은 맞장구치며 웃었으나, 다몬은 쉬이 입매를 비틀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표정에서, 이안은 무언가 이상한 직감을 느꼈다.
“…저하께서도 티모시에게 저에 대해 전해 들으셨는지요?”
이안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한마디 툭, 던졌다. 어떠한가, 두 번째 인생을 사는 자여. 그대의 첫 번째 인생에서도, 지금처럼 이안 히엘로가 있었는가?
다몬은 냉철한 보랏빛 눈동자로 이안의 녹안을 들여다봤다.
“그래. 들었지.”
이안 히엘로.
“하지만 예상과는 좀 다르군.”
다몬의 의미 모를 말. 이안은 의미를 곰곰이 되새기다 포도주를 머금으며 웃었다. 식사 시간은 충분하니까. 천천히, 술에 잠겨가듯 파헤치면 될 일이라.
* * *
위층에서 왕들의 만찬이 이루어지는 순간. 아래층의 귀족 중, 연신 위쪽만 주시하는 자가 있었으니.
“세르오. 한잔 안 받나?”
“아, 그래.”
“이런 날까지 주눅들 필요 없어. 축제라고! 모두 즐기고 있잖아.”
“나도 알고 있네. 즐기고 있다고.”
“그럼 좀 웃어!”
이안에게 줄 대려다 대차게 몰락한 귀족, 말론 호프 세르오가 위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