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05
제305화. 의도대로
아래층과 남다르게 적막이 감돌았다. 세 나라의 지도자들과 그의 보좌관들이 정세를 필사적으로 가늠하느라 침묵했기 때문이다. 각국의 입장에서, 지금 흐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계산할 필요가 있었다.
임명식까지 갈 것도 없는 것이라. 오늘 밤 그리고 지금. 각국의 이득과 손해 대부분이 정해진다. 바리엘을 중심으로 하여.
“노아 왕자. 저하께서 하문하시지 않습니까?”
먼저 운을 뗀 것은 에리포니였다. 그녀는 간을 보며 노아를 재촉했고, 왕자는 즉각 눈매를 날카롭게 세웠다.
다른 자도 아니고 루스웨나가 끼어들 사안이 아니다. 지금 누구 때문에 정체가 들통나서 이러고 있는데?
“혹 무게가 너무 무겁습니까?”
황자가 귀하고 귀한 것이라 친히 이르니, 그걸 관리하기에 부담스러운지를 묻는 말이었다. 노아는 발끈하여 단박에 반박했다.
“에리포니 왕이시어. 클리포포드는 루스웨나보다 많은 자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헛된 소리 하지 말라는 뜻이다. 클리포포드는 루스웨나보다 인구수가 월등히 많았다. 그것이 곧 국력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만, 어쨌거나. 저런 식으로 무시당하는 건 용납지 않았다.
“흐음.”
에리포니는 의미 모를 탄식만 내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바보 같기는. 곤혹스러운 것 같아서 도와주려 한 것인데, 괜한 자존심 때문에 비집고 나갈 틈을 막아버렸다.
뭐, 처지 바꿔서 루스웨나가 클리포포드 입장이었어도 저리 말했을 것 같다만. 알게 무어람.
“물론입니다. 노아 왕자님. 클리포포드 성벽의 견고함은 바리엘 모두가 의심치 않습니다. 돌아가시는 길에 보석을 전해드리지요.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진 저하의 성년식 날, 포도주와 함께 보내주십시오.”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 에리포니는 속으로 혀를 차댔고, 취기가 오른다는 듯 부채를 펼쳐 하관을 가렸다. 먹잇감을 잡아채는 악어처럼, 이안이 클리포포드를 먹어버린 것이다.
“…저기, 이안 경?”
“예. 노아 왕자님.”
내게 대체 왜 이러는 것이오?
노아 왕자는 저도 모르게 그리 이를 뻔하였다. 당황을 넘어선 공황이었으니. 옆을 지키고 있는 메이가 아니었다면 귀가 튀어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베릭의 표현대로, 뽕.
“건배라도 할까요?”
이안은 모른 척, 싱긋 웃으며 포도주 바디를 잡았다. 노아 왕자의 비밀을 알고 있는 이상, 전면에서 바리엘에 반발하는 처사를 할 수 없음이라.
피할 수 없다면 즐기십시오.
이안은 잔을 채워주며 그리 이르는 듯했다.
스윽.
“실례합니다. 잠시.”
“무엇이 모자라는가? 다몬 왕.”
“클리포포드의 포도주 풍미가 대단하여, 절제할 수가 없더군요. 취기가 조금 오르고 말았습니다. 저하.”
다몬 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고개가 움직이는 에리포니. 마찬가지로 부채질을 가볍게 하며 그 뒤를 따랐다.
“저 또한 잠시 바람을.”
노아가 안절부절못하며 입구 쪽을 바라봤다. 황자가 자리하고 있는데, 손님 셋 모두가 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메이를 보내고 싶어도 제 상태가 불안정하니 그것도 불가하다.
노아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지키는 동안에도, 바깥쪽 힐끔거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보이오?”
“두어 시간만 있으면 효과가 떨어질 것입니다.”
아. 그거.
노아는 샐쭉하게 눈을 흘기며 제 머리를 더듬어댔다. 다행히 무언가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어정쩡한 자세로 진과 시선이 딱하고 마주쳤다.
아이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노아가 수인이라는 걸 새삼 깨달은 것처럼,.
“소, 송구합니다.”
“아닐세. 상상이 잘 안 되는군.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어려워 말고 보여주게.”
순수한 배려로 하는 말인가? 아니면 클리포포드와의 관계에서 완전한 승기를 잡으려 하는 것인가?
만찬 전이였다면 전자를 염두에 둘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지금으로는 후자로만 해석되었다. 3국 동맹을 흩트려놓는 솜씨가 일품이었으니.
“…저하, 저하께서는 미래의 바리엘이십니다. 담보 같은 걸 내주시지 않아도, 클리포포드에서는 귀한 술을 반드시 준비할 것입니다. 혹 원하신다면, 귀국하자마자 바로, 미리 올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들은 아직 보석의 의미를 제대로 모른다. 버고스 왕과 귀족의 이해 일치를 물질화한 것이 보석인데, 그걸 알고 있다면 이런 반응을 보일 수가 없지.
“혹 마법사가 보석에 무슨 장치라도 해서 보낼까 걱정입니까? 심려치 마십시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도 조금은 했나 본데? 정곡을 찔렸는지, 노아는 손을 좌우로 강하게 흔들어대며 부정했다.
“그렇다면 너무 부담 가질 필요 없습니다. 흠집이 나거나, 심지어는 파손되어도 책임을 묻지 않을 터이니. 대신, 타국으로 넘어가지 않게만 갖고 계십시오. 그것이 저하가 클리포포드에게 주는 유일한 의무요.”
이안의 지시에 메이가 멈칫거렸다. 너무도 기이한 지시였으니. 그녀는 그들이 모르는 무언가가 발밑에서 휘몰아치고 있음을 인지했다.
“저하. 손님들께서 열기를 식히려면 오래 걸릴 것입니다. 저희끼리 한잔하시지요.”
알든 모르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안은 고개를 부드럽게 숙이며 진에게 건배를 요청했다. 참으로 잘 하셨노라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훌륭히 해내었다고 칭찬하는 눈빛이 다정하고 확실하다.
쨍!
진이 머쓱하게 웃으며 잔을 부딪치는 순간.
메이는 화들짝 놀라며 노아를 바라보았다. 휘몰아치던 무언가가, 클리포포드의 발목을 붙잡아버렸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 * *
“전하.”
티모시가 조심스럽게 다몬을 불렀다. 안쪽의 소란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테라스. 시폰 커튼이 살랑이며 흔들렸고, 그에 따라 다몬의 단발 역시 흐트러졌다.
그는 무던한 시선으로 먼 곳의 첨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식하지도 못한 채, 연신 입술을 짓이기며.
“전하. 피가 맺힙니다.”
“기대 이상이고, 생각 이상이네. 안 그래?”
다몬은 난간에 등을 기댄 채 손끝을 까딱거렸다. 언제나 완벽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궐련 같은 것은 멀리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태울 것을 달라고 할 때는, 심히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걸 뜻했다.
치익.
티모시가 불을 붙여주자, 다몬이 깊은 숨을 뱉어냈다. 창백한 볼처럼 흰 연기다. 그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진상품이 클리포포드로 넘어가면, 귀족들 반응이 어떨 것 같아?”
“…난감해하긴 해도, 크게 무리 없을 것입니다. 3국 동맹이라는 믿음 아래, 괜찮습니다.”
“티모시. 네 희망을 물은 게 아닌데.”
귀족들은 바리엘을 조각내겠다는 왕의 의지에 반응한 것이다. 척박하여, 고여가는 버고스의 발전을 위해서는 바깥으로 나설 수밖에 없지 않나.
눈속임을 겸하여 바리엘로 들어서는 길을 만들라고, 그리하면 조각낸 것을 제일 먼저 먹을 수 있다고, 왕은 귀족에게 그리 일렀다.
그런데 그걸 클리포포드로 옮긴다?
“클리포포드와 바리엘 사이, 드래곤 이상 반응을 매개로 하여 모종의 사건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노쇠한 황제가 거처하는 황궁인데, 우리는 검사에 관하여 어떤 언질도 없잖아.”
“그것만으로는 사실 확인이 불가합니다.”
“확인할 것 없다. 내가 그리 의심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검사에 차이가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더라면, 문제 삼을 것이 전혀 없었다. 그저 어린 황자가 모욕을 갚아주기 위해 머리 좀 굴렸구나 싶을 정도겠지. 클리포포드가 보석을 받아서 버고스에 넘겨주면 되니까.
“아까 노아 왕자가 난감해하는 것을 보았는가? 십 년 동안 보관하라는 바리엘의 지시를 어길 수 없다는 걸 방증한다.”
쉽지 않다. 바리엘과 클리포포드 사이의 무언가를 알아내지 못하면, 진상품 되찾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 이는 귀족들이 어떻게 반발할지 또한 계산하기 어려워진다.
‘원래의 바리엘도 이러했던가.’
다몬은 궐련을 깨물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제국이긴 했다만, 버고스 왕국에서는 어린 황자에 관한 소문을 쉬이 들을 수 없었다. 황궁이 몇 번이나 폐쇄되고, 장성한 황자들이 죽어가더니, 홀로 남은 저 어린것이 바리엘의 정점에 올랐지.
다만 다른 점은 후계자 임명식으로 두각을 보인 게 아니라, 즉위식에서 존재감을 보였다는 것이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상처.
필시 그 당사자가 바뀐 것은 아닐 터인데…….
‘역사의 줄기는 같다. 그런데 가지가 달라. 나의 행동이 여기까지 영향을 끼친 걸까?’
다몬은 지금뿐만 아니라, 몇 번이고 알던 미래와 다른 미래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라는 변수가 만들어낸 일렁임이었고, 결국에는 잦아들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 흔드는 것이다. 버고스의 변화를 위하여, 그리고 자신의 새로운 운명을 위하여. 일렁이고, 일렁여서 언젠가는 스스로 움직이는 파도가 만들어지기를. 버고스라는 거대한 바다가 세상을 채워버리기를.
“오늘 밤바람이 참으로 시원하네요.”
그때, 테라스 입구에서 에리포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앉아서 마주할 때는 크게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건만, 서서 보니 신장이 대단하다. 여인의 몸으로 티모시보다 조금 큰 수준이니.
“술이 오르면 어지간한 바람이라도 시원하게 느껴집니다.”
다몬이 궐련을 치우며 그리 대꾸하자, 티모시가 한발 물러섰다. 왕께서 에리포니와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걸 보이신 터다. 티모시는 엘더트와 간단한 눈인사를 하며 테라스 밖으로 나가버렸다.
끼이익.
“그러게, 적당히 눈치 살피며 진상하시지 그러셨습니까? 황자께서 노여워하시니, 이리 찬바람 맞는 신세지요.”
“바람은 그대도 같이 맞고 있는데.”
“으흠. 저는 방금 나와서 괜찮아요.”
아예 면세 기회를 박탈당한 버고스와 달리, 루스웨나는 귀국하여 활만 빠르게 제작하면 남은 기간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아니면, 돌아가서 황자께 따뜻한 차라도 부탁하실 건가요? 어린 분이시니, 아주 달콤한 것으로 내어주실 겁니다.”
머리 숙이고 들어갈 것인지를 묻는 말이다. 루스웨나 저들처럼, 귀국하여 진상을 새로 올린다면 그만한 혜택을 누리게 해주겠노라 이른 것이나 마찬가지니.
다몬을 에리포니를 올려다보며 눈썹을 비틀었다.
“달콤한 것만큼 속을 썩게 하는 게 없소.”
“하하하.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기나긴 역사 동안 바리엘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했던 3국. 그런 그들이 이번 기회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선도하여 나선 버고스의 덕이라.
바리엘에 등을 돌리고 새로이 세력을 결집하는 것이기에, 주체인 버고스는 증표로 삼을 만한 무언의 행동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바로 오늘, 귀족 진상품을 올린 것과 같은 것. 루스웨나와 클리포포드에게 버고스의 진심을 강력하게 알리는 처사 중 하나다.
“첫날부터 뭐가 좀 어수선합니다.”
“하지만 역사의 시작은 모두 이랬지요.”
그런데 그 결의를 위해 다 같이 마주한 첫날부터 문제가 생긴 것이라. 에리포니는 부채를 가볍게 접으며 속삭였다.
“보석 때문에 곤란합니까?”
“…….”
“당일 진상이 타국으로 넘어가다니. 다몬 왕께서는 서운해하지 않아도, 귀족들은 서운해할 것 같은데.”
노련하기는.
다몬은 눈만 흘기며 침묵했다.
“그러지 말고 클리포포드와 차분히 대화해 보세요. 원체 그쪽 두 나라는 이런 경우가 많지 않았나요?”
크고 작은 전쟁과 전투를 이르는 말이다. 클리포포드에서 보석을 내놓지 않는다면, 바리엘을 건드리기 전에 그쪽을 먼저 정리하자는 제안이다. 세력 확장은 물론이고, 바리엘을 나눠 먹을 입 또한 줄게 될 터.
‘지금 당장 생각나는 길은 그것밖에 없는데…….’
그럴 수가 없다.
3국의 분열을 이끄는 것이야말로 저쪽이 바라는 것. 버고스가 클리포포드를 적대시하면, 바리엘의 의도대로 되는 것이니까.
‘상대의 의도대로 움직이면 제 발로 낭떠러지를 걷게 되리라.’
다몬은 흐트러지는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입맛을 다셨다. 보랏빛 눈동자가 더욱 형형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