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06
제306화. 이것은 기회
한편 그 시각.
세르오는 불콰하게 취한 낯빛으로 복도를 어슬렁거렸다. 황궁에서 공식 초청장이 날아온 탓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하기는 했다만, 아무래도 자리가 영 불편한 것이라.
위층에서는 저를 짓밟으려 했던 이안이 내려다보고, 어깨 옆으로는 음해하여 물어뜯었던 귀족들이 함께했다.
가면 쓰고 하하호호 웃는 것이 그들의 미덕이긴 하다만, 술기운이 오르면 오를수록 버거워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아.”
차라리 이안과 결탁하지 않았던 때가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꿀단지에 코를 박았던 경험이 있으니, 이제는 어지간한 단맛도 단맛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는 한 여인.
“오라버니. 뭐 해요?”
세르오의 동생, 알레나라다.
그와 마찬가지로 만찬 시작부터 술과 음식을 들었는데, 붉은 입술은 새겨 넣은 것처럼 완벽했다. 그녀는 팔꿈치까지 오는 장갑을 단단히 고쳐 끼며 오라비를 나무랐다.
“자리 비우지 말라니까.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의 발언 기회가 많아진다고요. 그걸 보고만 있는 건 사자 머리에 목을 들이미는 거랑 같은 건데.”
벼랑 끝까지 몰려있는 가문의 위상. 알레나라 특유의 처신 덕분에 아직 사교 활동에는 문제없이 참여할 수 있었지만,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세르오는 비죽거리면서도 동생의 옷깃을 정리했다.
“그러는 넌? 왜 나왔어? 사자한테 목 내어주려고?”
“하하하. 그건 오라버니가 해주세요. 난 구경이나 하려니까. 그나저나,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마법사가 통제하고 있더라고요. 다른 수가 없을까요?”
위층? 알레나라의 물음에 세르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그쪽으로 통하는 계단 입구에 유독 귀족들이 서성이는 걸 보았다.
맨 처음에는 이안과 진에게 눈도장 찍으려는 것인가 싶었는데, 알레나라를 보아하니 목적은 다른 곳에 있는 게라.
“알레나라.”
“고리타분한 소리는 술로 넘겨요. 이안 경에게 혼담도 넣었으면서, 왜 자꾸 외국은 안 된다는 거예요? 낡아빠진 저택 끌어안으며 살 바에, 타국에서 왕관을 쓰는 게 낫지.”
바리엘을 방문하는 타국의 지도자들이 모두 미혼이라는 소식은 이미 파다했다. 특히 세르오 가문처럼 황궁의 견제를 제대로 맞아 휘청이는 귀족들에게, 이것은 희망의 불씨나 마찬가지.
“저도 가능하다면 외국 갈 것 없이 황실의 인원이 되는 게 제일 좋지요. 그런데 알잖아요? 진 저하는 너무 어리고, 이안 경은 이미 엎어졌죠. 무엇보다 지금 귀족 중에는 적당한 상대가 없어요.”
언제나 그러했다. 황실과 귀족이 인연을 맺는다고 함은, 분명한 목적 아래 행해진 계약이다.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거나, 혹은 귀족의 권세를 황실에서 어루만지기 위한.
현재의 바리엘 황궁은 그 어느 관점으로 보나, 귀족에게 손 내밀 이유가 없었다.
“여기서는 방도가 안 보이니, 외국으로 나갈 수밖에요. 그리하면 외교적인 협상의 중심으로 바리엘 내 가문의 중요도 또한 올라갈 것입니다. 하이만도 그러했잖아요.”
“쉬이. 그 이름을 어찌 함부로 올려.”
하이만 가문이 이전부터 대단했던 것은 모두가 인정하지만, 나아가 ‘황족과 귀족’ 사이라는 명예를 얻은 것은 루스웨나 왕실 출신의 부인을 만난 뒤부터였다.
바리엘과 루스웨나의 외교적 조율에 참여한 것은 물론이고, 그를 통한 막대한 이익이 다른 가문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 굴러들어오곤 했으니.
“뭐 어떠합니까? 사실인데. 그러니까, 오라버니도 정신 바로 차리고 옷깃을 제대로 하세요. 혹 모르지요. 에리포니 왕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지.”
“그걸 말이라고.”
“오라버니도 슬쩍 보면 봐줄 만해요. 저처럼 어머니를 좀 더 닮아야 했는데, 쯧.”
알레나라는 혀를 끌끌 차대며 세르오의 옷매무시를 정돈해주었다.
관료들은 외교적 관계를 위해 모였지만, 귀족들은 살아남기 위해 모인 것이라. 아무리 헤아려 봐도, 임명식이 지나면 황궁의 권위는 더욱 무결하고 전능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면, 귀족들의 입지는 더더욱 줄어들겠지.
그 전에, 하늘이 내려주신 마지막 기회다.
“그래서, 위층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오라버니는 궁에 자주 오셨으니까 알 거 아녀요.”
“내가 아는 곳은 이미 다 통제되어있지. 다른 귀족들도 못 올라가고 있잖아.”
“아, 정말.”
도움이 안 되네.
알레나라는 팔짱을 낀 채 머리를 굴려댔다. 올라가지 못한다면 왕들이 내려오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다른 귀족들 또한 접근하기 쉬울 것 아닌가?
“오라버니는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는 이곳이 낯서니까, 길 잃은 척 쭉 돌아보겠습니다.”
“알레나라!”
“웃어요. 가만히 있는 것보다, 웃는 사람에게 시선이 가기 마련이니까.”
알레나라는 오라비를 연회장 쪽 복도로 밀어 넣고, 자신은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본궁을 두르고 있는 정원이 있으니, 그를 따라 걷다 보면 필시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을 것이다. 시종이 이용하는 곳이라도 상관없다.
스윽.
그녀는 휘황하게 빛나는 건물을 주시하며 살폈다.
창문으로 사람들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정원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대화 소리 또한 들려왔다가 잦아들었다. 위층은 황실을 위한 행사 공간이라 그런지, 아래층과 달리 창문 수도 현저히 적다.
‘이쪽으로 돌아가면 아까 진 저하가 건배사 했던 난간과 완전히 반대쪽인데. 이쪽 테라스까지는 아무도 안 올 것…….’
“엘더트. 어떻게 생각해?”
“일리가 있다 여겨집니다. 의도대로 넘어가는 것은 위험을 초래할 필요가 있어요. 무엇보다 오늘이 역사의 시작 아닙니까. 바로 잘라내기에는…….”
알레나라는 가까운 위층 테라스에서 말소리가 들리는 걸 알아챘다.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며 귀가 쫑긋거렸다.
엘더트? 엘더트라 하면 루스웨나의 사절이라 들었는데, 그자가 존대하는 자라면 한 명밖에 없지 않나?
‘에리포니 왕이다.’
세상에나,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자신이 아니라 오라비를 보낼걸! 알레나라가 안타깝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숨죽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뒷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황궁에는 초상화에도 눈과 귀가 달려있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나무에도 달려있을 줄은 몰랐군.”
“……?”
“그대를 말하는 것이라.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영애.”
“……!”
알레나라는 당황해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난간에 기대어 있는 에리포니 왕. 청록빛의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 흥미롭다는 듯 알레나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윤기 나는 머리칼이 달빛을 받아내자, 알레나라는 여름철의 강가를 떠올렸다. 거대한 신장 때문인지, 이상하게 가까이서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정인(情人)을 만나러 가는 길인가?”
“아닙니다. 열기를 식힐 겸, 잠시 나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제가 황궁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터라. 시, 실례했습니다. 에리포니 왕이시어.”
“실례할 것은 없지. 이곳은 바리엘의 황궁 아닌가. 나는 손님이고, 그대는 이 나라의…….”
“세르오 가문의 여식, 알레나라 세르오입니다.”
왕이 말끝을 흐리자, 알레나라는 바로 예의를 차리며 인사했다. 본래라면 작위까지 말하는 게 맞지만, 공작 승계에 실패한 이후 이를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에리포니는 턱을 괸 채 눈썹만 까딱거렸다.
“그래, 뭐. 아무튼 즐기시게나. 오늘 밤만큼 완벽한 전야제가 또 없는 것 같으니.”
에리포니는 잔을 들어 보이며 테라스를 나서려고 했다. 긴 머리칼 끝이 휘날리는 순간, 알레나라는 기회 역시 바람처럼 저를 스쳐 지나가고 있음을 알아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왕의 시선을 끌어내야 했다.
“와, 왕께서!”
갑작스레 소리치는 바람에 음이 어긋났지만, 그로 인해 에리포니가 의아하게 고개를 틀었다. 그녀는 한껏 여유로우며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왕께서 함께해주시니 더욱 빛나는 밤 아니겠습니까? 여, 역시 황실의 주목을 받았던 분이세요.”
“…황실의 주목?”
에리포니는 아예 난간에 상체를 기울이며 아래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스르륵, 그에 따라 머리칼 역시 흘러내렸다. 알레나라는 저것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동아줄처럼 느껴졌다.
잡자, 저걸 잡자.
생각과 동시에 혀가 저절로 움직였다.
“그게 무슨 말일까?”
“게, 게일 저하와 혼담을 주고받지 않으셨나요? 성사되지 않음에, 모두가 아쉬워했답니다. 루스웨나와 바리엘이 새로운 인연과 역사를 맺을 수 있었는데 말이지요.”
내란 당시, 게일이 처형을 피하고자 루스웨나 왕과 혼담을 진행하려 했다는 소문이 돌았던 걸 꺼낸 것이다.
이를 알까? 모를까?
알든 모르든 상관없다. 그저 나를 흥미로워해.
그래서, 그쪽이 있는 곳으로 나를 불러줘. 제발.
“오호라.”
에리포니는 눈썹을 까딱거리며 엘더트를 돌아봤다. 그 역시 들어본 적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는 변절자를 꾸려내기 위한 방책 중 하나였고, 하이만과 직접 연관된 것이 아니기에 굳이 루스웨나 쪽으로 정보가 움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어서 아르센 사태가 터지며, 희미하게 사라진 해프닝이었으니까.
“이름이 무어라 했지?”
“알레나라 세르오입니다.”
“그래. 알레나라 영애.”
에리포니는 우아하게 난간 밖으로 부채를 떨어트렸다. 알레나라는 정확히 발치에 떨어트린 것을 냉큼 주워들었고, 다시금 왕을 올려다봤다. 에리포니의 삼백안 눈동자가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부채를 좀 주워다 주겠나?”
이쪽으로 올라오라. 엘더트에게 길을 터놓으라 이르겠다. 에리포니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알레나라는 두 손으로 부채를 단단히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부채에서는 아주 진득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세르오 가문이 이전에 맡았던 꿀단지와 비견하여도 손색 없을 정도로 깊은 냄새였다.
* * *
“전하. 슬슬 들어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만찬실로 들어서는 복도 끝.
다몬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멈춰선 채로 허공만 응시했다. 시간이 계속 흐르고, 호위병들조차 이상하게 쳐다볼 때쯤. 드디어 생각 정리를 끝냈는지 걸음을 뗀다.
끼이익.
문이 좌우로 젖히자, 노아 왕자가 다몬을 돌아봤다. 아까 나갈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분위기다. 왕자의 낯은 어두웠고, 진은 회색 머리칼의 사내와 무언가 얘기 중이다. 이안은?
‘저깄군.’
무슨 보고가 올라온 것인지, 마법사와 대화하느라 등을 보이고 있다. 노아는 코를 훌쩍이며 다몬을 맞이했다.
“실례했소.”
“에리포니 왕은요? 무슨 얘기를 하셨습니까?”
“음. 뵙지를 못하였는데, 나를 따라 나오셨나요? 밤공기가 시원하니, 아마 에리포니 왕께서도 사색을 즐기고 계시겠지요.”
“아, 그러시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 떼는 말투가 참으로 자연스러웠다. 다몬이 빈 와인잔을 들어 올리자, 시종이 가까이 다가가 잔을 채워줬다.
“노아 왕자.”
“…왜 그러십니까?”
다몬이 노아에게 말을 붙였다. 무슨 언질을 하려고 저러는 것인가, 노아는 지레 겁먹고 나지막이 대꾸했다.
“아무래도 버고스에서 올린 진상이 부족하여, 돌아가면 진상을 따로 올릴 것 같은데.”
“그런데요?”
“면세 혜택을 위해 고급 비료를 올릴까 생각 중입니다. 그리하면 아마 내년까지는 클리포포드 쪽으로 들어가는 것이 없을 것 같아서요. 미리 언질 드리고자 합니다.”
노아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게, 무슨-”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고요. 우선 후보입니다. 아니면 나중에, 잠시 대화라도 따로 하실까요? 클리포포드에서는 무슨 진상을 올렸는지, 자문도 구할 겸요. 보석 관리에 관해서도 드릴 말이 있습니다.”
조르륵.
다몬은 노아의 손에 들린 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그 끝이 찰랑거려 넘칠 정도로 가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