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07
제307화. 노아, 취하다
조금만 흔들려도 넘칠 것 같이 위태로운 술잔.
노아는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입술을 짓이겼다. 보자 보자 하니까, 진짜. 앞에서 밀고 뒤에서 밀고 뭣들 하는 짓인가? 가운데 끼인 클리포포드가 만만해 보이는지, 원.
술기운과 함께 분노가 치밀었으나, 저주의 탓인지 눈시울이 먼저 붉어졌다. 노아 왕자는 잔을 한번에 비운 다음, 있는 힘껏 인상을 찌푸렸다.
“노아 왕자?”
안 그래도 실눈처럼 작은 눈. 눈동자가 쉬이 보이지 않았다. 다몬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메이가 왕자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와, 왕자님. 진정하십시오.”
다몬 왕이 비료를 올릴 리 없다. 진상품으로 제작한 것은 바리엘에 성의를 보이려는 목적도 있지만, 직간접적으로 자국의 기술력을 알리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수많은 물품 중 비료라니. 그것만큼 국격을 떨구는 일이 어디 있겠나? 게다가 바리엘은 버고스의 비료가 고급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는 애초에 거래가 거의 없다는 뜻. 면세 혜택을 받아도 온전한 효과를 누리지 못할 게 분명했다.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필요치도 않은 물건은 면세라는 연유만으로 소비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클리포포드는 버고스의 비료가 필수적인 만큼, 버고스의 수출 대부분 역시 클리포포드다. 그럼에도 굳이 이걸 언급한다는 것은, 저들도 클리포포드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의미.’
3국의 동맹 체제를 슬쩍 떠보는 말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미는 것이 아니라, 미는 척하며 당기는 것이라 보는 게 맞겠지.
하지만 저주와 술 탓에 노아 왕자는 계속 코만 찡그리고 있었다. 여기서 안면 근육을 조금만 풀어도 울컥, 분풀이할 것 같았으니까.
“…노아 왕자? 괜찮으십니까?”
다몬은 노아의 반응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자연스레 되받아칠 줄 알았건만, 어찌….
‘술에 취한 것인가?’
하지만 클리포포드인이 주당인 것은 널리 알려진 특성이었다. 물보다 술값이 싼 나라 아니던가? 나무를 죽이려면 물을 끊는 것보다 술을 붓는 게 낫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이만한 시간에, 고작 이것 마시고 정신을 놓을 리 없을 터.
다몬의 시선이 끈덕지게 달라붙자, 메이는 입술이 바싹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스윽.
그때, 노아의 빈 잔을 치우는 한 손길. 이안이다. 그는 가슴팍에 손을 올린 채 공손히 언질했다. 노아에게, 그리고 메이에게.
“왕자님께서 아직 여독이 가시질 않으셨군요.”
“아아,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저하께서도 이만한 성의라면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 그만 들어가셔서 쉬는 게 좋겠습니다. 같은 병을 앓더라도, 낮보다 밤이 더 힘든 법 아니겠습니까.”
저주를 감추는 약효 역시 다할 시간. 진이 이안의 말을 거들며 손짓하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노아를 부축했다.
“그래. 왕자가 몸도 안 좋은데 만찬을 즐겨준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나 역시 곧 들어갈 것이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게.”
“감사합니다, 저하.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왕자님. 일어나 보셔요.”
“이…….”
“네네. 알겠습니다. 힘드시지요? 조금만 참으세요.”
노아의 입매가 아래로 축 처졌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모습에 메이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니 된다고, 절대 아니 된다고. 턱 끝을 좌우로 재빠르게 돌려대며 왕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쿵!
“으앙.”
“그, 그런 소리 내지 마세요. 왕자님.”
“아프다구.”
휘청이며 여기저기 부딪히느라 소란스럽다. 다몬은 그런 노아의 뒷모습을 의심스럽게 지켜봤고, 문이 닫혔음에도 쉬이 눈을 떼지 않았다.
‘분명히 무언가 있다.’
노아의 비밀은 무엇일까.
이럴 때 집시가 저를 도와준다면 수월하게 알아낼 수 있을 터인데. 다몬은 술을 머금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임명식이 끝나고 귀국길에 오를 때까지, 알아내면 좋으련만.
“저, 그런데 이안 경.”
그런 주군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티모시가 이안에게 술을 따라주며 물었다.
“혹, 그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요?”
“수배 중인 집시에 관하여서요.”
“아.”
대외적으로는 ‘버고스의 왕이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집시를 찾고 있다’ 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티모시가 돌아가며 조사를 진행해달라 부탁했고, 이안은 들어주겠노라 답했으니, 그 결과가 어느 정도 나와 있지 않겠나.
다몬은 문에서 이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를 쳐다보고 있었는지, 두 사람의 눈빛이 바로 마주쳤다.
“국경수비대에서 보안을 강화하여 확인하고 있으나, 특별히 들려온 소식은 없습니다. 소문으로는 북쪽에 불법 이민자들이 주로 통하는 협곡이 있는데, 아마 그곳을 이용하여 타국으로 갔을 거라 예상합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는 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바리엘이라 보고받았거늘.”
다몬이 어폐를 지적했다. 티모시를 비롯하여 추격대가 마지막으로 흔적을 찾은 게 바리엘이거늘, 이안은 지금 집시가 다른 나라로 떠났다는 걸 거의 확정한 말투다.
그러자 이안은 당연한 걸 묻는다며, 웃었다.
“황실의 이름으로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바리엘에서, 황실의 힘을 낮잡아 보시는 겝니까? 부드럽게 올라간 미소와 달리 짚는 내용은 살벌했다.
티모시는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북쪽 협곡이라 하면 어디와 연결된 부분입니까?”
“일부분은 루스웨나고, 일부분은 북쪽 내란지입니다. 원체 집시들이 많은 곳이니 아마 루스웨나보다는 가능성 있지요. 조사하고자 하신다면, 그곳으로 가보심이 좋겠습니다.”
내란 지역.
부족 단위로 잘게 갈려있는 공동체인 데다, 지형이 험난하여 이동과 조사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나무를 숨기려면 숲으로 가는 게 맞듯, 아마 집시도 저를 숨기기 위해서 그쪽으로 간 것이겠지. 티모시는 충분히 이해했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스윽.
“저도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마찬가지로, 늦게 도착한 터라 여독이 덜 풀렸나 봅니다.”
다몬은 대화를 이어가는 것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리포니는 늦게 들어온다더니 코빼기도 안 보였고, 진은 곧 있으면 파하겠노라 일렀다. 이만하면 여기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다몬 왕.”
“예. 저하.”
진의 부름에 그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이안이 눈썹을 까딱이며 처세를 지시하자, 아이는 꽤 근엄한 낯으로 명령했다.
“버고스는 임명식이 끝나면 다른 나라보다 먼저 출궁하시오. 새로이 올릴 진상품 제작 기간이 타국과 비견하여 모자라지 않나? 먼저 출발하는 것이 시간을 아끼는 데 도움 될 것이니, 그게 좋겠어.”
버고스가 바리엘에 진상품을 새로 올릴 거라 단정했다. 이는 그들이 대국에 거스를 수 없음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것이요, 편의를 봐주는 척하며 귀국길에서 타국과의 접점을 봉쇄하는 처사였다.
“…천하와 같은 배려이십니다. 받들겠습니다.”
다몬은 감정 없는 인사치레로 갈무리하여 만찬실을 떠났다.
그러자 진이 피곤하다는 듯 의자 뒤로 목을 꺾었다. 시아오시가 받쳐주었으나, 힘이 점점 빠지는 기분이 든다. 아무래도 어린이의 몸으로 이 시간까지 술자리에서 중심을 지키고 있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닌지라.
“저하께서도 그만 들어가시지요. 아래층은 새벽 추위에도 열기가 가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해도 되겠는가? 에리포니가 안 돌아왔는데.”
“예. 괜찮습니다. 이미 손님의 과반수가 나섰으니까요. 그리고 그쪽은…….”
이안은 하품 삼키는 진의 어깨를 토닥이며 일렀다.
아까 마법사가 보고하던 것이 바로 그에 관한 내용이었다. 세르오 가문의 알레나라가 에리포니와 함께 본관 별채의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는.
“그쪽은 그쪽 나름대로 바쁜 것 같더군요. 세르오 가문의 여식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합니다.”
“알레나라 영애를 말하는 것이오?”
“예. 뒷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서 쉬십시오. 몸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하여 행진 때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셔야 합니다.”
다들 웃고 즐기느라 바쁜데, 막상 축제의 당사자는 힘들어 죽겠다. 진은 결국 하품을 참지 못했고, 이안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저하. 오늘 정말 잘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진은 방긋 웃다가 멈칫거렸다. 그러곤 아주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혹 너무 피곤하여 누워도 잠들지 못하면-”
못하면, 이전처럼 책을 읽어줄 수 있소?
이안은 진의 뒷말을 다정히 기다렸다. 하지만 끝끝내 말문이 열리지 않자, 먼저 일러주었다.
“잠들지 못하시면, 책이라도 읽어드릴까요?”
“뭐, 음. 그대가 원한다면.”
“예. 알겠습니다.”
진이 시선을 멀리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총총,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만찬 실을 나섰다.
끼이익.
참으로 긴 하루가 아니었는가.
3국의 지도자들을 모두 맞이하고, 대응하였으며, 만찬까지 이끌었다. 바로 잠들지 않겠노라고 진은 다짐하였으나, 그날 밤이 다 가도록 이안에게 책 읽어달라는 언질은 들려오지 않았다.
새근새근, 저하께서 세수하다 주무셨노라는 언질은 들려왔지만.
* * *
번쩍!
멈춰있던 숨이 훅, 하고 들어오는 느낌이다.
노아는 눈을 끔뻑이며 백색의 천장을 쳐다봤다. 화려하고 섬세한 조명, 바리엘이 별궁으로 내어줬던 숙소 침실이다.
어째서 자신이 여기에 이러고 있는 것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버고스의 왕과 대화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꿈인가? 어디까지가?
“…메, 메이?”
노아가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미칠 듯한 숙취가 벼락처럼 내려쳤다. 머리에 못을 대고 꽝꽝 받아대는 기분에 몸을 비틀어댔더니, 이제는 속이 울렁거린다.
옴짝달싹할 수도, 그렇다고 가만있기에는 고통스러운 상태라. 살다 살다 이런 건 처음이다.
“…아, 메이!”
“오, 일어났다!”
노아의 시야에 훅 들어오는 베릭. 머리맡에 있었는지 얼굴이 거꾸로 보인다. 노아가 인상을 찡그리자, 베릭 역시 마찬가지로 인상을 찡그렸다.
“와, 술 쩐내 진짜 엄청나다. 아직까지 나네.”
“…왜 네가 여기 있어? 메이는?”
“이안이가 불러서 밥 먹으러 갔는데요. 잘 됐다. 일어났으니까 나도 갈게요? 축제 기간에는 내가 직접 고기 퍼도 된다고 해서.”
“잠깐.”
베릭이 신난다며 문으로 뛰어가려 하자, 노아가 붙잡았다. 그는 손끝을 까딱거리며 탁자 위의 물병을 가리켰다.
“물.”
“어허. 나 이런 거 잘 안 해주는데.”
잘 안 해주지만, 해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안이가 시중 잘 들라고 시켰으니까.
“어제는 어떻게 된 거지?”
“어제가 아니라 그제.”
“뭐?”
“그제라고요. 두 밤 지났어요.”
물을 마시던 노아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지금 베릭의 말로는, 자신이 만찬 자리에서 만취하여 꼬박 이틀을 누워있었다는 게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지 않나? 숙취가 심한 것도 처음, 기절하듯 기억이 날아간 것도 처음이다.
“대체…….”
“이안이가 그러는데, 아무래도 약 때문에 부작용이랑, 뭐 이렇게 저렇게 한 것 같다고.”
“이틀이 지났다면, 임명식은?”
“짜자잔. 당연히 오늘이지요!”
“이런, 젠장.”
대화에 영양가가 하나도 없다. 노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베릭을 노려보자, 그는 조금 신기하다는 듯 눈빛을 받아냈다.
“진짜다.”
“뭐가?”
“저주 풀리면 성격도 바뀐다더니, 좀…….”
‘그지처럼 변하셨네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참아냈다. 이안이가 조심하라고 당부했으니, 사고 치면 진짜 축제 기간 내내 밥 못 먹을 수도 있다.
스윽.
노아는 제 머리를 더듬거렸다. 이틀이나 지났으니 자는 사이 저주의 시간이 지난 것이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다시 베개에 등을 기댔다.
“서둘러 메이 불러와.”
“네네. 알겠습니다. 기억은 좀 있어요?”
“기억? 무슨 기억?”
노아의 물음에 베릭이 물컵을 들어 올렸다.
“나는 크림 포도 나라의 왕자다! 어디서 감히 포도 나라를 우롱하고, 흐어엉!”
“……?”
“이건 눈물, 콧물. 구토 우에엑.”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닌데.”
“어라. 저도 장난하는 거 아닌데.”
노아가 서늘하게 쳐다보자, 베릭은 머쓱하게 코를 긁적였다. 그가 물컵을 내려놓는 순간.
끼이익.
식사를 마친 메이와 이안이 함께 들어왔다. 임명식 당일이라는 게 진짜였는지, 둘 다 정복 차림이다. 이안은 시계를 확인하며 그에게 인사를 올렸다.
“제때 맞춰 일어나셔서 다행입니다. 오늘도 기별이 없으면 곤란할 뻔했는데. 몇 시간 후면 임명 본식이니 서둘러 준비하시고, 제안서 검토 후 인장 찍어주십시오.”
“제안서라니?”
“…왕자님께서 여기서 밀고 저기서 민다 하여 서글프게 우시니, 제가 제안서 작성해서 올렸습니다. 자세한 건 메이 사절에게 들으세요. 베릭. 나와. 출발하자.”
울었다고? 내가? 젠장, 젠장!
노아는 당혹스러웠지만 침착함을 유지하며 서류를 받아들었다. 대체 무슨 제안서인지 모르겠지만, 별거 아니라면 찢어버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