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08
제308화. 임명식
아직 숙취가 덜 풀린 것인지, 노아는 침대에 나른히 누워 서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글자를 세세히 읽기 위함도 있었지만, 기억나지 않는 이틀 전 밤을 떠올리는 손짓이기도 했다.
메이는 왕자의 본식 정복을 준비하며 그를 힐끔거렸다.
가는 눈매에 올라간 입꼬리.
처음 보는 자들은 종종, 왕자가 웃고 있노라 오해하곤 했지만-
“메이.”
“네. 왕자님.”
“여기 적힌 거, 다 이행 가능하다 하던가?”
“틀림없이 확답받았습니다. 혹시 왕자님께서 보시고 수정할 부분이 있다 하시면, 오늘 당장은 임명 본식 때문에 시간이 나진 않을 것 같고요. 출궁 전 이안 경이 자리를 다시 마련하겠다고 언질 줬습니다.”
노아는 업무를 볼 때도, 왕과 왕비 앞에 설 때도, 심지어는 아랫사람을 문책할 때도 저런 표정이었다.
그의 기분을 짐작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미간. 메이는 온 집중을 다 하여 노아의 미간만 뚫어지게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서서히 희미한 주름이 지기 시작했다.
“우선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여느 계약서가 그러하듯 말이지.”
칭찬과 다르게 노아의 미간이 깊어지자, 메이가 당황하여 눈알만 데굴데굴 굴렸다. 잘했다고 하는데 왜 저러실까 몰라. 숙취인가?
노아는 관자놀이를 짚어대며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아까 베릭이 하는 말로는 내가…….”
‘나는 크림 포도 나라의 왕자다! 어디서 감히 포도 나라를 우롱하고, 흐어엉!’
꽈악.
노아의 미간과 함께 제안서가 구겨졌다. 가감 없는 불쾌함의 표시다.
메이가 바짝 긴장하여 마른 침을 삼켰다. 저주가 풀려서 정말 다행이긴 한데, 이렇게 후일을 수습할 때면 정말이지 저주가 발현했을 때와 같은 막막함 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실수를 했다고.”
“실수요? 아, 그, 민망한 소리를 내시긴 했는데,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으앙? 그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메이가 괜찮노라 다독였지만, 노아의 미간은 더더욱 깊어져만 갔다. 차라리 안 듣고, 모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든 것이라.
노아는 말을 돌리는 것처럼 너절해진 종이를 흔들었다.
“메이. 3국 동맹이 논의되었을 때, 대신들의 반응을 기억하나?”
“물론입니다. 엄청나게 떠들썩했지요.”
한쪽에서는 바리엘을 거스르는 일이라 화를 당할 것이라 경고했고, 또 다른 쪽에서는 언제까지고 대국의 영향권 아래 있을 수 없다 하였다.
하지만 어린 황자밖에 안 남은 지금이 기회라는 것만큼은, 솔직히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 아버지께서 무어라 하실까? 내가 여기에 인장을 찍으면.”
이안이 내민 제안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바리엘은 버고스에 고급 비료 두 해 치 만큼의 독점 거래를 공식적으로 요구한다.
1-1. 현존하는 버고스의 모든 비료를 포함, 앞으로 두 해 동안 생산될 양이기에 대량 매매에 해당, 시세보다 조금 저렴하게 매입 가능하며 여기에 관세까지 제하여 더욱 낮은 공급 가격을 형성한다.
2. 위 조항에 따라 형성된 낮은 가격으로 바리엘은 클리포포드에 고급 비료를 매매한다. 마찬가지로 관세는 제한다.
3. 이에 대한 대가로 클리포포드는 버고스, 루스웨나와 함께하는 3국 동맹을 파기하고 바리엘과 독점적 동맹을 체결한다.
4. 독점적 동맹에 관한 사안은 시일을 정해 공식적으로 따로 작성한다.
…….
버고스가 바리엘의 거래를 거절할 명분은 많지 않았다.
우선, 재고로 쌓아놓은 비료를 한꺼번에 매각할 기회인 데다, 무려 내년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규모의 계약이다. 대국과 인접국의 관계를 차치하더라도, 이만한 경제적 이득 기회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반년마다 계약을 따로 하지 않습니까? 바리엘이 관세까지 면해준다고 하면, 버고스에서는 고려할 가치도 없습니다. 당연히 그쪽으로 팔 수밖에요.”
“두 해로 정한 것은 비료 제조 시기 때문인가?”
“네.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게 내년에 나오니까요.”
그렇다고 바리엘이 클리포포드를 회유하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구조인가? 아니다. 면세가 행해지기는 하지만, 애초에 그들은 거래 자체가 없었던 품목이다.
있었던 수입을 제하는 게 아닌지라, 실질적으로 나가는 금전적 흐름은 없다. 비료 또한 클리포포드가 되살 것 아닌가?
“클리포포드도 버고스를 통해 사는 것보다 훨씬 이득입니다.”
“대충 계산해보면?”
“평균적으로 1할 정도 싼 가격에 구할 수 있습니다. 버고스가 점점 척박해져서 값이 오를 거라는 정보가 있었거든요. 그쪽에서는 인상 예정이 없다고 하지만, 재작년에도 통보하듯 가격을 올리지 않았습니까?”
클리포포드는 비료를 값싸게 얻는 것 외, 바리엘이라는 최강국과 동맹을 맺게 된다.
사실상 그것이 제일 큰 이득일 것이다. 물밑에서 3국과 손을 잡았음에도 별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다는 것.
또한, 중요 수입 품목 중 하나인 비료 때문에 거래를 맺었던 버고스로부터, 완전히 독립할 수 있다는 것.
“이래서 돈은 있고 보는 게 맞나보다. 메이. 그 많은 비료를 한꺼번에 사겠다는 수가 가능한 나라라니.”
“저희도 언젠가는 그리될 수 있습니다.”
“그럼. 그리되어야지. 근데…….”
노아는 턱을 매만지며 침묵했다.
버고스의 의존도를 낮춘다는 건, 다른 말로 바리엘의 의존도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두 해 치의 비료 결정권을 가진 대국과 상대하여, 클리포포드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아니지. 이를 버고스가 알게 되면, 그 뒷날의 계약 역시 불발되는 게 자명했다. 앞으로 모든 비료 거래는 바리엘을 통해서만 하게 되리라.
말로는 동맹이라고 하지만, 글쎄. 알 수 없다. 자국의 자존심만큼 귀하고 값진 게 없거늘.
‘독점은 언제나 위험해. 하지만 제안을 거절하면, 이는 위험 요소가 된다.’
클리포포드가 비협조적으로 나간다면, 바리엘이 비료를 구매하여 어느 곳에도 풀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하면 되레 저들이 제일 큰 화를 맞이할 터라.
“그리고 이건 말로만 오간 것인데요, 공식 동맹을 체결하면 클리포포드 왕실의 저주에 관하여 영구적인 암묵을 유지하겠다는 조항도 넣겠다 합니다.”
그래. 저것도 있다.
비료가 국가의 경제를 망가뜨리는 카드라면, 저주는 국가의 체계를 무너트리는 무기다. 저들로서는 별반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굳이 있다면…….
‘이것을 3국과 공유하여 대책을 세우는 것인데.’
버고스와 루스웨나가 어찌 나올지도 확실치 않고, 3국 동맹을 내세워 도와준다 한들 그것이 효과 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무모한 선택이다. 이를 버고스에 알린다면, 그 즉시 바리엘의 제안을 거절하는 꼴이 되니.
“참나. 진짜, 더럽군. 더러워.”
“염려하시는 바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공식 동맹을 체결할 때 발발할 수 있는 문제고, 지금으로는 이만한 제안이 없다 여겨집니다. 의존도에 관한 것은 시간과 머리를 맞대어 대책을 강구할 수 있을 겁니다.”
맞는 말이다. 불확실한 문제를 걱정하여 눈앞의 이득을 놓칠 수는 없다. 노아는 이불을 걷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안 히엘로 장관에게 전해. 제안서를 다시 쓴다.”
“어떤 부분을 수정하실 건가요?”
“두 해 치가 아니라 적어도 십 년. 그리고 형성된 낮은 가격으로 내준다는 건 좋지만, 믿을 수가 있어야지. 책정 시 바리엘과 버고스의 매매 내역을 공개하겠다는 조항도 달아.”
가능한 긴 공급 기간과 안정적인 가격을 설정해두면 의존도가 높아진다 한들 위험도는 낮아질 것이라. 십 년이면 클리포포드 자체적으로도 비료에 관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을 터.
메이는 알겠노라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종을 흔들었다.
띠링.
“노아 왕자님이 준비하십니다. 시종을 들이시오.”
그녀의 부름에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들이닥쳤다.
“참, 버고스의 왕과 루스웨나의 왕은? 무엇들 하였는가?”
노아는 시종들의 손길을 받아내며 물었다. 자신은 약 부작용 때문에 꼬박 기절하여 보낸 시간이지만, 다른 자들은 아닐 것이라.
메이는 어깨만 으쓱거리며 속닥거렸다.
“저도 보질 못했습니다. 바리엘에서 의도적으로 동선을 나누었더라고요. 듣기로, 루스웨나는 서쪽 사냥터로 나가서 그쪽과 관련한 사업을 논의하였고, 버고스는 마법부를 방문, 이전에 진행하려면 마력석 매매 및 공급에 관한 얘기를 나눈 것 같습니다. 이것도 다 어제 얘기고요, 지금은 아마 왕자님처럼 준비하고 있겠지요?”
3국이 철저하게 분리되도록 한 것이다. 아마 기간 중 만찬과 본식 외에는 그들이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짐작하건대, 본국으로 돌아가는 출궁 시일도 따로 정해놓았을 것이다.
“만찬 때 술을 먹지 말걸. 3국 지도자가 가까이 앉아 대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 것 같다.”
“아닙니다. 자책하실 필요 없으셔요. 다몬 왕과 에리포니 왕이 자리를 함께 비우긴 했지만,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에리포니 왕은 진 저하가 나설 때까지 안 들어왔다고 하던데요.”
“그래? 무엇 하느라고?”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몬 왕과 에리포니 왕 역시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못한 것은 확실합니다. 마법사들의 도청을 의심하는 상황에서, 어찌.”
메이는 방 안을 슬쩍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근거 없는 의심이었지만, 참으로 합리적이어서 안 할 수가 없었다.
노아는 클리포포드의 전통 정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시계를 확인했다.
“몇 시가 임명식이라고?”
“이런. 조금 빠듯합니다. 서둘러 준비하시지요.”
임명식은 해가 가장 높은 곳에 뜨는 정오에 열린다. 새로운 바리엘의 시작에 아주 잘 어울리는 시간이라.
* * *
“로만드로 님. 노아 왕자가 제안서 수정을 요구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기간이나 가격에 관한 걸 짚지 않을까 싶은데요. 회의 날짜는 버고스 출궁 다음 날로 잡아주십시오. 그게 여러모로 협상에 유리할 것입니다.”
“음. 알겠네. 사실 우리는 유리고 뭐고 말할 게 없긴 하지. 하핫. 그럼 루스웨나는 궁에 남겨 놓고?”
“예. 루스웨나를 마지막에 보내는 게 맞겠습니다.”
“이대로 진행하지. 그런데 조금 걱정되는 게, 이런 식으로 버고스를 압박하면 마법부 별채 건설 시 마력석 공급이 좀 어렵지 않겠어?”
이안의 옆에서 함께 달리며 업무를 정리하던 로만드로. 그의 물음에 이안이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놀랍다는 미소였다.
“아니. 눈에 보이니까. 크흠.”
“저는 로만드로 님이 별채 건설을 반대하고 있다 여겼습니다만.”
…딱 꿰뚫네.
로만드로는 헛기침만 연신 해대며 대답을 피했다.
사실 마법부의 보좌관으로서는 그 역시도 찬성하는 게 옳은 입장이건만, 그 이전에! 굳이 긁어 부스럼으로 논란을 만들 필요가 있는지는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래서 그렇지.”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그때, 마법사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이안 님! 이안 님! 아까 마력석관리부 통해서 전달받았는데요, 보고서에 누락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요. 확인 좀 먼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본식 앞에 서는 마법사 두 명이 중복입니다. 어떡하지요?”
“뒤에 적혀있던 필립을 필릭으로 바꾸면 된다. 보고서는 이쪽으로.”
“아아. 필릭이요? 근데 몸 상태 안 좋아 보이던데요. 앞에서 지휘하는데 좀 걱정됩니다.”
“몸 상태가? 어떻게?”
“밖에서 물건 받아온다고 마차 안에서 식사했다 하더라고요. 단단히 체한 것 같습니다.”
“집무실로 올라오라 전해. 그리고 누락 부분은 없어. 기록된 수치가 맞다.”
무엇에 대한 걱정인지, 이안은 덧붙이지 않았다. 한가하면 말이라도 이어붙여 볼 터인데, 원.
로만드로는 여기저기서 달려오는 마법사들을 보며 서류와 펜을 단단히 쥐었다. 우선은 몇 시간 앞으로 성큼 다가온 본식을 해내는 게 중요하였으니.
끼이익.
이안과 로만드로는 집무실로 들어섰고, 이내 소파에 앉아 있는 자들과 마주했다.
긴장했는지 딱딱한 웃음을 짓고 있는 진. 그리고 그런 아이에게 온 힘으로 칭송과 격려를 건네는 비비안나였다.
“이안.”
“어서 오십시오. 어머니.”
필리아와 네르사른도 함께다.
이안은 손님들과 가볍게 포옹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저하. 먼저 본궁으로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저는 마법부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손님들을 모시어 들어가겠습니다. 수상께서 임명식의 절차를 다시 짚어주실 것이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응. 그, 그래. 알겠네.”
“저하.”
아이의 자세가 딱딱하게 굳어 있다. 그걸 본 이안이 안쓰러운 미소를 지으며 눈 높이를 맞췄다.
“오늘이 무슨 날이라 하였지요?”
“임명 본식.”
“그리고요?”
진은 저도 모르게 이안의 어깨를 꽉 쥐었다. 긴장을 떨쳐내어 이안에게 주려는 듯.
이안은 기꺼이 받아주며 그의 팔꿈치를 받쳐줬다.
“…바리엘의 새 시대가 열리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