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09
제309화. 아래를 보지 마시라
바-리엘!
신께서 품고 있는 광영의 시작이라-
비 내리면 금빛으로 물드는 가이아의 심장이라-
높게 높게 고갤 들라, 그리하면 보이리니-
저기 높은 곳의 빛이, 바리엘의 등불이라-
병사들이 찬가를 선창하며 줄을 잡아당기자, 수백 개의 바리엘 제국기가 동시에 올라가며 성벽을 가득 덮었다.
황궁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은 임명식의 시작을 알아채고 설레는 비명을 질러댔다.
바-리엘!
셀 수 없이 많은 자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바리엘의 영광을 부르짖었고, 이는 본궁에 닿을 정도로 강한 힘을 보였다.
필리아는 귓가에 흘러들어오는 소란을 알아채고, 고개를 틀었다. 창밖,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 열기가 뜨겁게 다가왔다. 내리쬐는 저 정오의 햇살처럼.
“왜 그러세요, 부인?”
“조금 긴장되어서요. 살면서 감히, 황실 행사에 참석하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그것도 황자 저하의 공식 후계 임명식이라니.”
비비안나가 인자하게 웃으며 필리아의 손등을 잡아주었다. ‘감히’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엔 그녀는 이미 충분히 귀한 여인인데, 그걸 모르는 듯하다.
“마법부 장관의 생모이시자 진 저하께서 아끼는 분이시거늘. 그런 말씀 마세요. 여기 모인 귀족들이 면구스러워 할 것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그 누가 저하께 손수 선물을 건네받을 수 있겠습니까?”
비비안나는 코를 찡긋거리며 장난스레 팔을 쳐댔다.
진상된 보석 중 저하께서 손수 골라 내어주신 것이라며 이안이 작은 상자를 내밀 때, 필리아는 정말 기절하는 줄 알았다. 다시금 감격이 올라오는지,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부인. 우시면 아니 되어요. 모두가 우리를 보고 있는걸요.”
비비안나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속닥거렸다.
우선 그들의 자리가 황실과 타국의 왕들 바로 아래, 귀빈 자리라는 것부터가 시선 집중이거늘. 한데 그 여인의 미모가 심상치 않고, 심지어는 이안과 쏙 닮아있지 않나.
임명식이 시작되기 전인 지금. 이 자리가 누구를 위한 자리인지 헷갈릴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타국 세 왕의 시선도 그다지 다를 바 없다.
“엘더트. 저 여인은 계속 중앙에 머무는가?”
“정보로는 임명식 이후 내려간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자리를 위해 올라왔나 보군.”
에리포니는 이안과 진 사이가 생각보다 더 돈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엘더트의 답이 영 시원치 않다.
“송구합니다. 필리아 부인에 관한 건 다들 침묵으로 일관하여. 다만 확실치 않은 소문으로는 천려족과 인연을 맺었다더군요.”
“천려족? 내가 아는 그 대사막의 포식자?”
“히엘로와 천려의 동맹 이면에 필리아 부인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루스웨나는 하완 왕국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대사막의 사정을 종종 전해 듣곤 하였다. 그 과정에 필리아가 중심 역할을 했다는 건가?
에리포니는 의아한 눈길로 필리아를 훑었다. 그러다 문득, 그 아랫단에서 느껴지는 열렬한 눈빛.
알레나라다.
스윽.
알레나라는 에리포니에게 인사 올리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만찬의 밤, 아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첫 만남이다.
에리포니가 눈썹을 까딱거리며 알은체를 하자, 알레나라의 안면에 웃음이 깃들었다.
“모두 기립해 주십시오!”
그때, 임명식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낮게 깔리던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묵직해지며 사람들의 집중을 모았다. 본궁 앞에 기마병과 군악대가 당도하여 대기하는 모습이 통창으로 훤히 보인다.
필리아와 비비안나가 드레스를 붙잡으며 일어서자, 입구의 거대한 문이 좌우로 젖혀졌다.
끼이익!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바리엘 제국의 수상이었다.
정복을 갖춰 입은 수상과 그의 뒤를 따르는 수많은 관료. 금빛 쟁반에는 공식 후계자에게만 허락되는 금관이 놓여있었다.
이른바 황태자, 황제의 뒤를 이을 자에게만 허락되는 명칭. 몇몇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 황자들을 떠올렸으나, 이내 박수 소리와 함께 흘려보냈다.
관료들은 좌우로 갈라져 정렬했고, 이어서 계속하여 고위직들의 입장이 이어졌다.
“지금부터…….”
수상은 마법사가 받쳐주는 마도구를 가까이 당기며 일렀다.
“바리엘 대제국 14대 황태자 임명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이는 모두 황제 폐하의 이름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뜻입니다.”
황제의 남은 숨이 한 줌조차 되지 않는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그중 대부분은, 진이 황태자가 되면 황제가 승하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거리낄 것 없이 정통성을 인정받는다 한들, 어린 황태자가 무얼 할 수 있겠나? 황좌에 오를 때나 앉을 때나, 이안의 손이나 잡겠지.
스윽.
이어서 나타난 마법부. 앞장선 이안의 표정이 엄중하다 못해 딱딱하다. 불손한 자들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눈빛.
그가 회장으로 들어서 귀족들의 자리를 살피자, 자연스레 시선이 흩어졌다. 눈이 마주쳤노라 오인한 자들의 반응이다.
‘이안!’
오로지 필리아만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열심히 쳐댔다. 비비안나도 마찬가지. 이안의 뒤에 서 있는 로만드로에게 손짓하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일렬!”
“일렬!”
마지막으로 황궁친위대가 입장하여 검을 치켜들었다. 그중 끄트머리에 서 있는 베릭. 필리아와 비비안나가 놀라서 입을 틀어막았다.
아주 대견하게도, 붉은 머리칼을 제외하면 그다지 어긋나는 행동이 없다. 한 달 치에 달하는 고기 식사의 위력이다.
쿠웅! 쿵쿵!
심장까지 파고드는 음악. 친위대가 검을 바닥에 받치어 섰고, 드디어 이날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꺼운 황태자 망토를 길게 늘어트린 채.
천천히-
“세상에.”
에리포니가 저도 모르게 어금니를 깍 깨물며 중얼거렸다. 저것이 성인에게도 얼마나 무거운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 의젓해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이라니!
‘…귀여워.’
시종들이 망토 끝을 정리해주며 함께 입장하자, 아이의 걸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진이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그의 가슴팍에 달린 배지와 보석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스윽.
수상 앞에 마주한 진.
원래 절차대로라면 무릎 꿇는 것이 관례지만, 아이의 키가 너무 작은 탓에 이는 생략이다. 에리포니는 아예 부채로 하관을 가려버렸다.
“진 베로시온.”
진은 두 손을 가볍게 모으고 기도하듯 이마에 가져다 댔다. 황실의 전통 예법이자, 신께 올리는 감사의 인사다.
수상은 황제를 대신하여 그의 가슴팍에 달린 배지를 하나씩 떼어주었다. 황자의 자리에서, 황태자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니. 이전의 것은 과거의 산물이다.
“지금부터 이르는 것은 진실로 황제 폐하의 하문입니다. 소명하고 맹세하여, 모두에게 의지를 보이십시오.”
“무엇이든, 내 진실을 다하여.”
“진 베로시온, 바리엘 대제국의 5황자는 제국에 대한 의무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자신의 운명으로 삼을 결단을 하였는가.”
제국에 대한 의무.
진은 오른쪽 손을 들어 선서했다.
“나, 진 베로시온은 제국에 대한 의무를 이해했다. 그것은 바리엘의 무궁한 영광과 드높은 긍지를 위하여 베로시온이라는 이름으로 사명을 다한다는 것이요, 황실의 번영과 안정 그리고 제국민들의 온전하고 뜻깊은 삶을 위해 걸어간다는 것이다. 바리엘의 국경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나의 분신이고, 영혼을 다하여 사랑할 존재이니.”
진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일렀다. 흘러가는 발음 하나 없이 모든 게 완벽한 선서다.
아이는 문득,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떠올리곤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인 황제, 어머니인 딜라이나, 그리고 형제들. 모두가 이 순간을 바라였겠지만, 지금은 누구도 없지 않나? 오로지 자신만이 살아남아, 이리 서 있다.
“바리엘을 위하여, 내 운명을 모두 바치겠노라. 바리엘을 위하여, 나의 눈물과 나의 피를 바치겠노라. 이를 거스르는 자는 내 담대하게 베어낼 것이고, 이를 방해하는 자, 내 거침없이 잘라내리라.”
마법부의 자리에서 그걸 지켜보는 이안 역시 가슴 한쪽이 이상하게 아려왔다. 자신의 대관식을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진의 자리에 자신이, 그리고 지금 자신의 자리에 나움이, 하나의 시간선을 두고 이어지고 있다는 게 참으로 묘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움. 너는 이 자리에서 나를 보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가. 이리도 가슴이 아팠나? 아니면 대견하였나?’
기억력이 좋은 이안이었지만, 이상하게 그날은 나움과 눈 마주친 기억이 없다.
그저 새겨진 것은, 제 머리에 놓이는 왕관의 무게.
크로니의 포옹.
귀족들의 무거운 박수 소리.
그리고 제 어깨를 짓누르는 망토…….
“신께 맹세하여, 나는 그리할 것이다.”
진이 선언을 끝내자, 다시금 박수가 터져 나왔다. 새로운 황태자의 탄생을 모두가 반긴다는 듯이.
수상은 금관을 조심히 들어 올렸고, 아이는 고개를 숙였다.
“진 베로시온.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그대를 바리엘 대제국 14대 황태자로 임명한다. 이는, 다음 역사서가 그대의 이름으로 시작한다는 걸 허락한다는 뜻이로다.”
스윽.
진이 황태자 관을 썼다. 제 주인을 찾은 것처럼 아주 알맞게 꼭 들어맞았다. 아이의 가슴팍에는 새로운 배지가 달렸고, 그의 왼손에는 황태자 봉이 들렸다.
귀족 모두가 무릎을 꿇으며 새로운 황태자에게 경외감을 표했다. 3국의 왕들도 마찬가지.
“진 베로시온 황태자 전하.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황태자 전하!”
“제국의 앞길에 신의 축복이 들기를!”
곳곳에서 터지는 축하 인사에 진이 가볍게 미소지었다. 친위대는 검을 다시 치켜들어 진의 퇴장을 호위했고, 관료들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이제 귀족들이 아닌, 제국민들과 마주할 시간이다.
히이잉! 히잉!
“모두 행진을 준비하라!”
“황궁 문을 모두 개방하라!”
“진 황태자 전하께서 출궁하신다!”
거대한 황금 마차를 중심에 두고, 기마병과 군악대가 움직였다. 위용 있는 트럼펫 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울리자, 말들이 반응했다.
진은 개방된 마차에 올라 허리를 바짝 세웠다.
“전하. 이제 출발할 것입니다. 소요 시간은 두 시간 정도로 예상하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방어진이 쳐있습니다. 이쪽 밖으로 손을 내지 마시고…….”
이안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르다가 멈칫거렸다. 금관을 쓴 채로 경청하는 아이의 눈빛이 이전과 다르게 늠름했기 때문이라. 더 이상 자신이 주의 주지 않아도, 모든 걸 잘 해낼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황태자의 맹세에 이런 힘이 있었나?
자신도 즉위 전과 후가 이렇게 달랐을까?
“이안 경?”
어찌 말을 하다 마시는 건가? 진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금관의 무게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는 없었지만.
“아닙니다. 잘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음. 내 로만드로와 수상에게 계속 듣긴 했지.”
“예. 그럼 곧 출발하겠습니다.”
“이안 경.”
마법사들의 부름에 이안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진이 그의 손등에 손을 올렸다.
“황실의 그림자에서 금관의 주인이 되기까지, 이안 경의 노고가 있었음은 내 잘 알고 있어.”
“전하.”
“고생했네. 그리고, 고마워.”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원래 이럴 자격이 있는 분이라고, 원래 이리 귀하신 분이라고 이르려 했다. 하지만 진의 눈가에 눈물이 가득 차 있음을 알아챘고, 이어진 말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안 경. 앞으로도 계속, 나를 이리 도와.”
대답하라고, 꽉 쥔 아이의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긴장과 불안으로 배어 나온 땀이다. 이안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진을 올려다봤다.
“전하. 아래를 보지 마세요.”
“…이안 경.”
“출발하겠습니다! 이안 님!”
“준비 끝났습니다! 군악대 선두로!”
이안은 대답 대신 손수건을 건네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제발, 아래를 보지 마시라.
그리하면…….
“눈물이 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