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1
제31화. 우선협상권
의원이 화분을 들여다보는 동안, 일족들은 뒤에서 초조하게 지켜봤다. 어서 저 노인이 그것이 실라스크라고 말해주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잎을 뒤적이며 이리저리 살피던 의원이 심사숙고 끝에 선언했다.
“실라스크가 맞습니다.”
“젠장! 세상에!”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그러면 어서, 그걸 달이자고! 응? 윈첸 님 숨 넘어가겠어!”
의원의 말에 터지는 짧은 환호성. 그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신에게 감사 기도를 올렸다. 가운데 중심을 지키고 있는 건 족장, 카칸티르뿐이었다.
“확실한 것인가?”
“네. 현존하는 기록과 비교하였을 때 실라스크가 확실합니다. 이파리의 수와 굵기, 색, 향, 뿌리의 형태가 모두 예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방인의 증언대로라면 꽃이 핀 이후 지지 않았다 하지 않았습니까?”
제일 중요한 특징은 이미 윈첸을 통해 확인받았으니 가타부타 덧붙일 게 없다. 족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채근했다.
“그러면 어서 약으로 달여라.”
“한데…….”
아주 작은 난색. 하지만 천막 안의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양이 문제입니다.”
“양?”
“기록에는 세 뿌리를 달여야 완치에 효과적이라고 했습니다. 윈첸 님은 이미 기력이 많이 쇠하신 데다, 여기 화분에는 두 뿌리뿐입니다. 아마 당장 급한 불을 끄는 정도에 그치겠지요.”
양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긍정적인 현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급한 불을 끄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서둘러 탕을 올려라. 먼저 한 뿌리만.”
“네. 카칸.”
“그리고 밖의 이안을…….”
명령을 내리던 그가 말을 흐렸다. 다들 무슨 일이실까, 의아하게 쳐다봤다. 카칸티르는 고민하다가 호칭을 정정했다.
“이안 브라츠 경을 모셔라.”
어찌 되었든, 그는 부족장을 도와주기 위해 실라스크를 제 발로 가져다주었다. 무슨 의도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족장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천려인으로서 이는 명백한 호의였다. 그들은 약속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차악-
이안이 담담하게 천막으로 들어왔다. 이미 밖에서 안쪽의 소란을 들은 듯하다. 그는 탁상 위에 놓인 화분을 보더니 웃었다.
“저것도 마지막인 것을 아는지, 오늘따라 유독 붉습니다.”
“이안 브라츠 경.”
그리고 그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인사를 올렸다. 네르사른이 저택에서 보여주었던 그 예법이었다. 카칸이 인사하자, 부하들 역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대의 도움에 진심으로 감사하오.”
“듣자 하니 양은 모자란다고 하던데요.”
“그래도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은 변치 않소. 그런 김에, 내 묻고 싶은 것이 좀 있는데. 일단 좀 앉으시겠나?”
확실히 바뀐 태도였다. 천려족의 족장이니 완전한 존대는 아니지만, 존중이 깔려 있는 언사였다.
“말씀하시지요.”
“브라츠에서 실라스크를 더 얻을 수 있겠는가?”
윈첸이 죽으면 부족 중 누군가가 그녀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자 역시 실라스크가 필요하겠지. 길게 봤을 때, 천려족에게는 붉은 꽃 재배가 필수적이었다.
“확신할 수 없습니다.”
“좀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말해주시오.”
“화분은 저의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정확히는…….”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화분의 정확한 출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필리아의 존재를 언급해야 했고, 그것은 곧 자신의 신분이 반쪽짜리라는 걸 시사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밝힐 일이지만, 그것이 지금의 타이밍에 적절한가는 다른 문제였다. 이안이 침묵하자, 천막 안의 모두가 숨넘어갈 것처럼 그의 입만 주시했다.
“이안 경?”
“죄송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것인데, 어떤 경위로 제게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에 알 만한 사람이 있긴 있습니다만, 당장은 만나지 못해요. 보름에서 한 달 정도 후에나 연락이 가능할 겁니다.”
실라스크를 얻기 위해, 여정이 불투명한 남국보다 며칠 내로 오갈 수 있는 브라츠가 유리한 건 사실이었다.
“데르가 백작도 실라스크의 존재를 모른다는 뜻인가?”
“브라츠 저택에서 그 꽃을 아는 자가 없었습니다. 저 역시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되었지요.”
아니면 정식으로 무역 물품 신청을 할 생각이었건만, 브라츠 내에서도 유통이 안 된다고 하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카칸이 생각에 잠기며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데 연락할 수 있는 시일이 왜 보름에서 한 달이나 걸리는 거지?”
마음만 먹으면 사나흘 내로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실라스크를 아는 자가 다른 곳에 가 있는 건가? 카칸의 짐작이 맞는다는 듯,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이 좀 있어 브라츠에서 보기 힘들 겁니다.”
“자세히 물어도 되겠소?”
“…사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그렇다면 한 가지 약조를 더 해주셔야겠는데요.”
이번에는 또 무엇일까. 이안 자신을 브라츠로 돌려보내 달라 요청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건 좀 곤란한데.’
“브라츠 백작보다 저에게 우선협상권을 주십시오.”
“우선협상권을?”
이안의 말에 뒤쪽에서 술렁임이 일어났다. 브라츠 가문 하나로 묶인 자들 아닌가? 아비와 아들 사이에서 우선협상권이라니. 그 말은, 안쪽에서 내분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과 같았다.
카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경은 아비를 꺾을 생각인가 보군.”
“강한 자가 우두머리의 자리에 앉는 것은, 천려족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래. 사실 뭐라 할 처지는 아니었다. 천려족이야 말로 강자생존이라는 법칙을 몸소 실천하는 자들이니. 카칸티르는 이 대화가 점점 흥미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미안하지만, 우선협상권의 경우는 들어줄 수 없소. 경은 당장 브라츠 병사들을 움직일 수도 없고, 우리에게 넘겨줄 곡식량을 늘릴 수도 없지 않은가?”
쥐뿔도 없는 너를 뭘 믿고 그런 약속을 하겠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부정하는 말과 달리, 카칸티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있음을 눈치챘다. 이안이 궁금증을 없애 주리라는 기대가 묻어있었다.
“좋습니다. 먼저 말씀드리지요. 대신 이것이 우선협상권을 좌지우지할 만한 내용이라 생각되시면 신에게 맹세하여 저와의 약속을 지켜주십시오.”
“맹세하지.”
손해 볼 게 없는 상황이었다. 카칸티르는 어서 말해보라는 듯 부드러운 양털 의자에 등을 기댔다.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이안의 말에 곧장 몸이 굳었지만 말이다.
“황궁에서 감찰반과 함께 군대가 내려올 것입니다. 혐의는 탈세로 인한 반역죄. 아마 한 달 안에 브라츠라는 이름이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겠지요.”
“뭐라고? 반역?”
“지금 저자가, 방금 뭐라 한 것인가?”
“황궁에서 군대가 내려와?”
술렁술렁, 폭탄 발언에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듯 떠들어댔다. 카칸의 짙은 갈색 눈동자가 이안을 빤히 쳐다봤다. 윈첸처럼 집시의 능력이 아니더라도, 그는 이안의 말이 사실임을 알아챘다.
“진실인가?”
“하늘에 맹세하여 진실입니다.”
“경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지?”
“화친식을 앞두고 중앙 정부에서 사람이 내려왔습니다. 제가 화친 대상으로 적합한지를 판단하기 위해서였죠. 그들에게 들은 것입니다.”
“브라츠가 멸문한다면, 자네 역시 무사하지 못할 터인데?”
“그래서 제가 이리 온 것입니다. 브라츠가 멸문한다면, 천려족 역시 곤란하지 않습니까?”
브라츠 가문과 천려족. 이들은 국경을 접하고 서로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우호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브라츠가 사라지고 그곳에 황제의 중앙군이 주둔한다면? 제국의 황제가 과연 데르가처럼 변방의 야만족을 어려워할까? 새로운 백작이 세워진다 한들? 그들과 교류를 할까?
정세가 완전히 바뀌는 엄청난 사건이 되리라.
“데르가 백작은? 알고 있는 건가?”
“모릅니다. 안다고 한들, 쓸데없는 피만 흘리게 될 테니까요. 반역은 황제의 아량과 상관없이 무조건 참수입니다. 저는 최소한으로 영지를 지키기 위해 사막길을 오른 것이고요.”
“그게 무슨 뜻이지?”
“아버지가 죽고, 영지가 비면 전사들을 이끌고 저와 브라츠 영지로 들어가 주셨으면 합니다.”
“말도 안 됩니다! 카칸!”
뒤에서 듣던 한 노인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와 달리, 카칸티르와 네르사른의 눈빛은 기민하게 빛났다. 지금 이안이 숨기고 있는 게 하나 더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카칸이 곰곰이 계산하듯 말했다.
“데르가가 죽으면 영지에는 황제의 중앙군이 있다는 걸 뜻한다. 그들과 맞서면 우리는 곤란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당신들과 마찰을 피하고자 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짜 반역을 준비하고 있으니까. 괜히 변방의 야만족에게, 그것도 전력이 확인되지 않은 적과 맞설 일은 절대 없다.
“어째서?”
“족장께서는 제게 상당히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건 알려줄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카칸티르가 탁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욱 빨라졌다. 생각이 복잡해졌다는 걸 뜻했다.
“천려족은 그저 제 뒤에서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런 식으로 한마디 얹어주시면 참 좋겠지요. ‘브라츠 와 오랜 세월 함께한 동맹의 입장으로, 천려의 가족이 된 이안 브라츠와 뜻을 함께 한다’ 같은.”
“그럼, 제국이 우리에게 검을 겨눌 수도 있을 텐데?”
“광활한 대사막과 최강의 전사들을 거느린 천려와요? 글쎄요. 오히려 그 반대겠지요.”
중앙 입장에선 이안이 영지를 관리해야 천려족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안의 마음먹기 따라서 영지 독립을 위해 전면전까지 갈 수 있다는 것도 암시할 수 있고.
만약 영지가 독립하면 그간 공들여 데르가를 숙청한 게 허사로 돌아간다.
“제국의 전쟁이란 꼭 검을 들어야만 하는 게 아니라서요. 제국은 쉽고 값싼 방법을 택할 겁니다. 혹시 무력 사태가 일어난다고 한들, 원치 않으시면 그대들은 다시 대사막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이안 경. 자네는 지금 엄청난 말을 하고 있네.”
“사막을 건너기 전부터 생각하던 것입니다. 저를 도와주신다면, 그래서 브라츠를, 정확히는 영지를 지키게 되면 지금껏 천려족이 누리지 못한 ‘진정한 동맹’의 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평화로 인해 군사 식량이 줄어들면 영지의 창고가 그득하게 쌓일 게 분명할 테니까. 이로 인해 모두가 배부르게 지낼 수 있다.
“잠깐.”
가만히 듣고 있던 네르사른이 손을 들었다. 뭔가 이해 안 가는 부분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말씀하십시오.”
“자네, 아니. 경께서는 반역이 멸문에 해당하는 중죄라 하였소. 경의 이름은 이안 브라츠, 반역자의 아들이지. 영지로 돌아가는 것 자체가 무리이지 않소? 아무리 우리가 감싼다고 해도 말이오.”
“역시 네르사른 님입니다. 맞습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에요.”
이안은 가볍게 박수 치며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저는 데르가의 친아들이 맞습니다.”
혈육임에는 문제가 없다는 걸 먼저 짚었다.
“하지만 법적으로는 아니에요. 저는 아직 입적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니 제 이름은 ‘이안 브라츠’가 아닌, 그저 ‘이안’입니다.”
“뭐라?”
술렁이는 장내. 하지만 이어지는 이안의 말은 모두를 입 다물게 하기 충분했다.
“-따라서 제국은, 법적으로 제게 반역죄를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브라츠의 새로운 영주가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물론, 삐끗하면 노예 처지지만 말이다. 굳이 천려족에게 알릴 필요는 없는 정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