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11
제311화. 영원한 비밀은 없다
“황태자 전하께서 좀 늦으십니다.”
관료들이 와인을 홀짝이며 진의 부재를 인지했다. 행진을 끝내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지 몇 시간째인데, 아직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은 것이라. 몇몇이 괜한 소리를 한다며 잔을 흔들어댔다.
“아침부터 고생하셨지 않습니까. 피곤하시겠지요. 공식 일정은 아니니, 좀 쉬셔도 괜찮습니다.”
“그렇긴 합니다만, 자리가 비어있으니 귀빈 대접에 잡음이 들릴까 염려하여…….”
그들의 시선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커튼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시종들의 움직임. 세 나라의 지도자들이 황실의 간섭 없이 모여있는 게다.
축제 기간 내내 일정이 겹치지 않게 신경 썼거늘, 이리 마지막에 틈이 생기다니.
“마법사들도 거의 없고요.”
“입궁하여 쓰러진 자가 두엇이랍니다. 누구는 피도 흘렸다 하던데. 흠흠. 아무튼,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지간히 알아서들 조치하고 있을 터이니. 우리는 대국적인 경사를 즐기면 됩니다.”
“맞습니다. 황궁 아닙니까. 몰래 나눌 수 있는 말 따위는 없습니다.”
“이런, 그럼 아까 한 말은 취소입니다. 하하!”
“저도 취소하지요. 하하하! 오, 안녕하시오!”
“오랜만입니다. 만찬 날에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황궁 밖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소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껏 황실의 사달은 모두 공식 후계자가 없어서 생긴 일이다. 진이 아직 어리긴 하지만 정통성을 인정받아 단단히 자리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대성할 것은 자명했다. 어찌 아니 웃을 수 있겠나?
귀족들은 입장이 또 다르겠지만.
‘신났군.’
에리포니는 커튼 사이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궁 한가운데서 체면 따위 잊은 듯 웃고 떠드는 모습이라니. 확실히 축제는 축제인가 보다.
타악.
살벌한 이곳과는 다르게.
다몬은 보석으로 세공한 체스 말을 앞으로 내어가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어디 응수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듯이. 유연한 노아의 눈매가 더더욱 가늘어졌고, 게임을 잇는 손길에서 가시를 느낄 수 있었다.
에리포니는 엘더트에게 속닥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왜들 저러는 겐가? 들어올 때부터 저러고 있는데, 계속 저 상태로다.”
“원래 사이가 안 좋은 나라인지라…….”
짐작할 거리가 워낙에 많다는 대답이다. 에리포니는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받친 채 두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날, 세르오 가의 여식과 밀회하느라 이들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한 게 문제다. 이후로는 황궁의 의도적인 일정 분배 탓에 그림자도 못 보지 않았나?
겨우 만났는데, 겨우 자리를 모았는데 이런 분위기라니. 이곳이 에리포니의 궁이었다면 당장 체스판을 두 동강 내어 박살 냈으리라.
“이보십시오들.”
타악.
참다못한 에리포니가 한마디 내뱉는 순간. 노아가 체스 말을 거칠게 내려놨다. 손길과 상반되게 생글거리는 낯이라니. 그녀의 삼백안에 짜증이 깃들었다.
“예. 에리포니 왕이시어.”
“임명 본식이 끝났으니 곧 있으면 각자의 나라로 돌아갈 것인데요. 만남이 귀합니다. 어찌 체스에만 몰두하시는지, 원.”
“함께 하시겠습니까?”
“…무어라고요?”
“이리 가까이 와주십시오. 왕이시어.”
에리포니는 기가 찬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감히 누구보고 오가라 하는 것인지, 원.
하지만 맞은편의 다몬도 그렇고, 저들의 보좌관들 역시 루스웨나 측을 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에리포니는 부채를 거칠게 접으며 두 남자에게 다가갔다.
여차하면, 정말 저 망할 체스판을…….
타악.
“……!”
에리포니가 옆에 앉자, 노아가 다시 말을 움직였다. 그러자 줄눈이 반짝이며, 빈칸에 희미한 글자들이 떠오르는 것 아닌가?
“이게, 무슨.”
지금 저들끼리 침묵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게다. 마법사의 도청을 우려한 방책으로 버고스에서 준비한 비기인 듯했다.
에리포니가 불쾌함을 숨기지 않으며 인상을 찌푸리자, 다몬이 달래듯 일렀다.
“게임 중간에 들어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래. 알레나라 영애와 잠시 대화하느라 늦었지.
“체스는 원래 두 명만이 온전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말씀하셨다면, 자리를 내어드렸을 터지요.”
늦게 왔고, 와서도 아무 말 없이 아래층만 내려다보던 에리포니다. 그러니 저들도 하던 대화를 계속한 것이라. 틀린 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아지는 건 아니다.
“하, 그래서 지금 누가 이기고 있습니까?”
“글쎄요. 섣불리 수가 안 나는군요.”
타악.
다몬의 차례다.
-클리포포드가 3국 동맹에 관한 의지가 있다면, 담보 보석에 어떤 권리도 없다는 걸 인정하여 증서를 발행해 주십시오. 이는 바리엘 측에 함구 될 내용입니다.
실물 보석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권리가 없다는 걸 문서화해서 넘겨달라는 요청이다. 이리하면 버고스 귀족들의 반발을 우선 넘길 수 있다. 바리엘 황궁 문만 젖히면 되찾을 수 있다는 걸 시사했으니.
하지만 노아는 난감하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3국 동맹에 관한 의지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해하실 거라 여겨집니다. 담보는 주인이 되찾기 전, 보관자가 성심을 다해 관리하고 감독할 의무가 있지요. 권리 없는 의무는 없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권리 포기 증서를 발행한다면, 이는 클리포포드가 바리엘의 제안에 불복한다는 뜻-
타악.
-버고스에게 칼자루를 내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러기에는 지나온 역사가 너무 뚜렷하지 않습니까?
동맹, 좋다. 하지만 증서 발행은 존재 자체만으로 바리엘에 대한 적대다. 이걸 버고스에서 되려 약점 삼아 뒤통수치지 않는다는 법이 있나?
역사는 종이에 새겨진 글자에 불과한 게 아니다. 상대를 가늠할 수 있는 길잡이요, 과거를 잊지 말라 이르는 선조의 목소리.
-동맹에 관한 의지가 없다는 걸 돌려 말씀하십니다.
-돌려 말하는 게 아니라, 증서 발행에 대한 안전장치를 내어달라는 게지요. 고급 비료를 현재의 절반 값으로 수입하게 해주시고, 저희 쪽에서 수출하는 포도주 관세를 제하고, 물량을 두 배로 늘려주십시오.
그게 말처럼 쉽겠나. 바리엘처럼 창고가 그득한 것도 아니고, 버고스 내에서 반(反) 클리포포드 세력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
다몬은 체스 말을 만지작거리며 노아를 바라봤다. 태도를 보아, 클리포포드의 동맹 참가는 물 건너간 게 확실했다.
-아직까지 여독이 풀리지 않으셨나 봅니다.
그날은 노아, 너의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여서 대화가 안 되는 줄 알았는데, 지금도 안 통하는 걸 보니 여전해 보인다는 뜻이다.
생글생글 웃던 노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럴 리가요. 원래 눈은 마음의 창문이라 하지 않나요. 다몬 왕께서 불편하시어 제가 불편해 보이나 봅니다.
-노아 왕자. 3국의 동맹은 오늘 황태자 임명식보다 훨씬 깊이, 역사서에 남을 일입니다. 판도를 뒤집는 거국적인 사안인데, 무리한 입장만 취하시다니. 실로 유감입니다.
타악.
에리포니가 의아해하는 엘더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그리 살벌하게 체스를 놓았는지 알겠다는 눈빛이다. 이런 식으로 끝나지 않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으니, 원.
똑똑.
“실례합니다.”
그때, 밖에서 낯선 자의 안내가 들려왔다. 체스 놓으려던 다몬의 손이 멈췄다.
“진 황태자 전하께서 건강상의 연유로 불참하신다는 전언입니다. 귀빈들께서는 자유로이 일정을 진행하시어 아쉬움을 달래라 덧붙이셨습니다. 혹 필요하신 게 있다면 편히 하명하십시오.”
“이런.”
진이 자리에 오지 않는다면, 그리고 3국의 동맹 또한 불발된다면, 있을 이유가 없다. 다몬은 체스 말을 그대로 엎어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노아 왕자. 제가 진 것으로 해드리지요. 게임 즐거웠습니다. 역시 클리포포드는 재미를 즐길 줄 아는 나라입니다. 다만, 즐기는 법만 알아서 조금 아쉬워요. 즐길 때 즐기더라도, 이기는 게임을 하는 게 좋을 터인데.”
노아 왕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뒤에 서 있던 메이의 입매는 단단히 굳었다. 저것은 클리포포드의 민족성을 무시하는 발언이나 마찬가지.
“에리포니 왕이시어. 그대도 계실 것입니까?”
“아니요, 굳이. 있을 자리와 아닌 자리를 구분하는 것도 군주의 미덕이지요.”
다몬의 물음에 에리포니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3국을 포함한 축제가 아니라, 그저 바리엘의 축제다. 무엇을 위해 자리하겠나? 차라리 나가서 못다 한 업무를 보는 게 낫다.
“함께 가시지요. 아무래도 버고스가 제일 먼저 출궁할 것 같아서요. 한가로이 앉아 있을 수는 없군요. 마법부와의 마력석 거래를 마무리하는 게 낫겠습니다.”
“저도 일이 있어서. 노아 왕자. 반가웠어요.”
“그럼 이만.”
두 왕은 앉아 있는 노아를 내려다보며, 미련 없이 등 돌려 나갔다. 한 치의 멈칫거림도 없이 말이다. 티모시가 체스판을 수거했고, 엘더트 역시 두 사람을 따라 사라졌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노아. 턱을 괴며 의미심장한 신음을 흘렸다.
“흐음.”
“왕자님.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 불편하지는 않고, 신경 쓰이네.”
“너무 심려치 마세요. 버고스가 혀에 독 바른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니. 그쪽 말고. 루스웨나.”
“예? 루스웨나는 왜요?”
메이가 노아에게 시원한 잔을 챙겨주며 되물었다.
에리포니는 그들이 체스로 대화하는 도중, 단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았다. 심기를 거스를 만한 행동도 없었고. 되려, 체스판의 비밀을 뒤늦게 알았으니 그쪽에서 불쾌해할 일이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는데요.”
“…그래서 신경 쓰인다는 게다.”
바리엘 대 3국.
클리포포드의 경제력이나 국력이 두 나라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서 더더욱 필요한 존재였다.
고만고만한 나라들끼리 뭉쳐서 바리엘에 대항하는 것인데, 한 나라의 부재가 얼마나 큰 구멍을 가져올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짐작 가능했다.
다몬은 동맹을 주도한 입장이니 그렇다 쳐도, 루스웨나는 걱정되지 않는 것인가?
“보아하니 루스웨나는 버고스와 관계 깰 생각이 없어 보였어. 클리포포드가 바리엘 측과 가까워진다는 걸 짐작했으니, 동맹의 존재가 밝혀질 게 시간문제인데 말이다.”
클리포포드 없이, 버고스와 둘이서만 동맹을 유지해도 위험을 상쇄할 수 있다는 방증이다.
아무래도 자신이 저주에 걸린 그날 밤, 두 나라가 밖에 나가 모종의 거래를 한 것 같은데…….
“버고스와 루스웨나가 삼고 있는 비밀이 있다. 찜찜해. 그걸 알아보는 게 좋겠어.”
“우선 움직여보겠습니다. 곧 출궁인지라 시간은 별로 없지만요. 확실히 수상하기는 하네요. 제가 루스웨나나 버고스의 왕이었다면 바로 3국 동맹을 파기했을 것입니다. 이어간다니, 수상해요.”
메이가 이해했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앞서 나간 왕들과 시간을 계산하여,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리엘 쪽으로 뱃머리를 틀긴 했지만, 주인 없는 자리를 즐길 만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 * *
타닥타닥.
조용히 흔들리는 마차.
티모시는 창문 밖으로 멀어져가는 루스웨나 측의 마차를 살폈다. 무언가를 생각하던 다몬이 그를 부를 때까지.
“마력석관리부의 대장이 아코렐라라는 자라고?”
“네. 드래곤 전염병으로 출궁한 자입니다. 진정 보실 예정이십니까?”
“거의 치유되었다 하지 않았나? 들어올 수 없으니, 우리가 나갈 수밖에.”
“번거로우실까 봐 그렇습니다.”
별궁 건설에 필요한 마력석을 수출하려 하는데, 권위자가 현재 궁에 없다 하여 논의되지 못한 사안이 있었다.
이를 처리하기 위해 아코렐라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당연히 마법사를 대동하여.
“허튼소리.”
“그런데 실로 문제입니다. 클리포포드의 입장이 생각보다 너무 이르게 정해졌어요.”
“…그래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저들 없으면 안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겠지만, 동맹이 계속되면 생각할 거리가 많아질 수밖에.”
끼이익!
마차가 마법부 앞에서 멈추었다. 티모시가 내리려고 하자, 경비가 다가와 창문으로 일렀다.
“송구합니다만, 출궁 동반할 마법사님이 먼저 나가셨습니다. 담당이 교체되며 착각하신 것 같더라고요.”
“이런. 그렇소?”
“주소지는 마부에게 일러두겠으니, 바로 나가시면 됩니다. 그럼.”
마법사들이 행진 때문에 몇 쓰러졌다고 하더니, 진실인가 보다.
마부는 경비에게 쪽지를 건네받고서 바로 채찍을 휘둘렀다. 그에 따라 버고스 측의 호위병들 역시 말머리를 돌리며 뒤따르기 시작했다.
마차는 달리고 달려, 황궁 밖으로 나아갔다. 처음 들어왔을 때보다는 조금 한산한 거리다. 아무래도 몇 날 며칠 즐긴 주민들이 기력을 다한 탓이겠지.
타닥타닥!
마차가 중앙 옆길을 달리고, 어수선한 인파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풍경. 그중 다몬의 시선에 확 들어오는 노파가 있었으니.
‘……?!’
깊게 팬 볼, 보릿자루와 같은 몸체.
비밀을 먹는 집시가 웃으며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