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14
제314화. 비밀로 엮인 인연
“전하께서는-”
이안의 말끝이 늘어졌다. 밖에서 은근한 인기척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로만드로가 티모시에게 접근을 시도한 듯하다.
“-그리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대국의 존엄인 황제가 굳건하다는데, 어찌하여 버고스가 딴지를 거는지 모르겠다는 뉘앙스다. 웃음과 불쾌함이 공존하는 낯이라,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다몬은 날 세우지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응당 굳건하실 것으로 믿지. 하지만 3국의 왕들이 황궁에 모두 모였는데 그림자조차 비추시질 않으시어, 내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 말이다.”
“마음은 감사하오나, 불필요한 걱정은 불안을 부추깁니다. 감히 청하건대, 자중해 주시길.”
정중하되 예의 없는 처사다. 아무리 바리엘의 장관이라 한들, 다몬은 왕이었다. 감히 어디서 자중을 논한단 말인가? 왕이 어금니로 볼을 짓이겼고, 피 섞인 침과 함께 분노를 삼켰다.
스윽.
그런 다몬을 예리하게 살피는 이안. 왕의 자색 눈동자에 기백이 깃들어있다. 이동하다가 갑자기 마차에서 내려 소란을 피웠다고 하던데, 그 연유를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추측하기로는 두 가지.
‘취했거나, 아니면 비밀과 연관되어 있거나.’
다몬 왕의 비밀이라고 하면 이안이 아는 것 외 또 있겠는가? 회귀와 관련된 사안이다. 높은 확률로, 집시를 본 건 아닐까 의심되는 상황.
만약 그렇다면 이안도 할 일이 많아진다. 노파가 황궁의 추격을 제치고 중앙을 활보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이는 단순하게 기이한 존재의 행방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정예 조사단의 신뢰와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아무튼, 오인하신 것 같아 송구합니다. 기대를 충족시켜드리지 못할 것 같군요.”
“그대가 황태자 전하를 받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럼요. 궁금하시다면 직접 여쭈어보십시오. 무엇이 전하를 받치고 있는지.”
이안은 가볍게 기침까지 덧대며 고개를 돌렸다. 몸 상태도 별로 안 좋은데, 시답잖은 목적으로 온 것이라면 나가 달라는 몸짓이다.
“흐음.”
게임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서로 패를 보일 수밖에 없지만, 누가 먼저 내놓는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이안은 결례를 범하면 범했지, 대화의 주도권을 내주지 않겠다는 태세를 취한 것이라.
다몬은 무덤덤한 시선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것 봐라.’
밑바닥 서자 출신이, 제국 장관까지 오른 게 우연은 아닌 듯했다. 지금 보니까 앉아서 저를 맞이했던 것부터 가벼운 옷차림을 보인 것까지, 모두 계산된 수였다.
이안은 종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마차를 대기하라 전할까요?”
먼저 화두를 던져라.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고, 아쉬운 자가 한 걸음 다가서는 것처럼, 숙이고 들어오라는 뜻이다. 여기서 대화를 마무리하면 누가 손해일지, 잘 생각해 보라는 미소까지.
다몬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가볍게 누르며 눈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무언가를 결심한 듯 일렀다. 한숨처럼 가늘고, 무거운 말투였다.
“…황궁의 조사에 따르면, 집시가 타국으로 넘어갔다 하였지. 그런데 버젓이 중앙에 있더군.”
역시, 다몬이 집시를 만났구나.
이안은 종을 내려놓고 계속 말해보라는 뜻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소파와 책상인지라, 두 사람 사이에는 시선 높낮이가 존재했다.
“버고스를 위해 나선 자들은 정예가 아닌가? 상당한 유감을 느끼네.”
집시가 이안의 비밀을 품고 있다. 시간을 초월하여 황실 후광이 깃들어있는 비밀. 다몬은 이미 자신의 모든 걸 내었으니, 더는 그녀의 뱃속에 들어있는 걸 살필 수 없으리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저자가 돌아가면-’
홀로 속삭이며 누설을 확인해 보는 게 좋겠다 생각하는 순간, 이안은 깨달았다.
자신이 하려는 걸 다몬 역시 하였을 것이라고.
저자는 지금, 자신의 비밀이 누설되었음을 알고 있는 게다.
그걸 인지하자, 다몬의 행동이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뭐. 어쨌든 사안은 잘 마무리되었으니, 감사를 전하지.”
“별말씀을요. 면구합니다.”
집시를 만난 건 확실한데, 그래서 잡았나? 마차에 특이 사항이 있다는 보고는 받지 못하였는데? 황궁 안으로 데리고 온 게 아니라 바깥에서 확보 중인가?
온갖 물음이 이안의 머릿속을 어지러이 유영했다.
따악.
그러자 다몬이 손끝을 튕기며 이안의 시선을 가져왔다. 자신에게 집중해 달라는 듯이.
“보답이라 하기에는 그렇고, 황궁에서 어찌하여 집시를 잡지 못하였는지 내 일러주겠다.”
다몬은 품에서 작은 단검을 꺼냈다. 피가 끈적하게 묻어있는.
“그자는 바람처럼 가볍고, 물처럼 잡을 수 없는 존재. 하여, 손아귀에 들어온 즉시 잘라내는 수밖에 없다네. 다리가 없는 것은, 긴 세월 그자가 겪어온 고난이라.”
마주한 순간, 도망칠 수 없게끔 고통을 안겨주는 것.
이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몬을 바라봤다.
“기다림이 커서 그런지 제어가 안 되더라고. 실수하긴 했어. 검 끝에서 생명이 꺾이는 게 느껴졌거든. 아마 며칠 내로 죽을 것 같아.”
“…그렇습니까.”
이안은 집시와 만났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죽음 따위 두려워하지 않고, 되려 반기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나?
“그대도 내 배를 가르고 싶은가 보군. 하지만 어찌하여 내가 아직도 살아있는지를 명심하시게.”
배를 가르면, 뱃속에서 삭던 비밀이 세상으로 흘러나와 혼돈의 강을 만들 것이라. 거래했던 자들 또한 그 강물에 휩쓸려 어떤 위험을 맞이할지 알 수 없으리.
다몬 왕이 이걸 모를 리는 없고, 특별한 보고가 없었으니 저 주장을 거짓이라 여기는 게 합당하겠다만…….
‘무시하기에는 가능성이 없잖아 있다.’
현재 집시에게는 다몬의 비밀이 없다. 그러니 배를 가른다고 한들, 저와 무슨 상관 있겠나?
무엇보다 버고스는 바리엘을 위협하려는 속내를 품고 있다. 자신의 비밀이 털렸으니, 그에 상응하는 비밀이 먹혔음을 추측했으리라.
거기엔 황실의 무게만큼 적절한 게 없으니. 즉, 집시의 배를 가르면, 황실의 약점을 알 수 있다는 판단 아래 행했을 수도.
‘문제는 나만 집시와 거래한 게 아니라, 진 전하도 비밀을 주었다는 게다. 여기서 반응을 보이면 황실이 관련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무시하면 당장은 넘어가겠지만 위험 요소를 안고 가는 것.’
다몬이 던진 검이 날아드는 것과 같다.
피할 수 있지만, 잡아서 저지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잘하면 상관없지만, 아닐 경우 뒤에 서 있는 진까지 위험하다. 후자의 경우 손 하나를 내어주지만, 뒤에 서 있는 진은 확실히 지킬 수 있다.
“제게…….”
이안은 제 왼손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그래. 이것 하나 내어주는 게 무에 그리 어렵겠나? 저울에 올려 이것저것 재었을 때, 가벼운 위험을 선택하는 게 현명했다.
“집시를 보여주시겠습니까?”
“무엇하게?”
다몬이 웃자, 이안도 웃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지만, 원하는 바는 같았다.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는 것.
‘황실의 누가 내 비밀을 받아갔는가.’
‘진실로 집시가 죽어가는가.’
이번에는 이안, 네가 먼저 이를 차례라. 다몬의 흑빛 단발이 고갯짓을 따라 스르륵 흘러내렸다. 이에 이안은, 자신의 한쪽 손을 내어 검을 쳐냈다.
“집시에게 받은 것이 있어서, 돌려줄까 합니다.”
황실로는 나아가지 않게. 다몬의 시선이 자신의 발치에 뚝 떨어질 수 있게.
“제가 계속 들고 있으려니 무겁더군요.”
다몬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마침내 찾았다는 만족스러운 모습.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안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책상에 팔을 짚고, 내면을 들여다보듯 압생트 동공을 들여다봤다. 소곤소곤, 마치 진리를 일러주는 듯한 작태.
“밤하늘의 별조차도 한 번의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데, 하물며 두 번이라.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음은 당연하지.”
미련한 왕이여, 홀로 세상의 주인공이로군. 이를 감당하는 자가 또 있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이안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비소로 변하였으나, 다몬은 개의치 않고 중얼거렸다.
“과연, 그런 소문은 우연으로 나는 게 아니거늘.”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이안은 이내 알아챘다. 지금 다몬은 이안의 비밀을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이만 가로부터 제기되었던 출생의 비밀, 이안이 황족이라는 그 소문 말이다.
‘영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적당하군. 아마 알레나라가 에리포니에게, 그리고 에리포니가 다몬에게 흘렸을 터.’
“사실 황자보다 그대가 유력한 건 사실이었어. 그 어린것이 비밀이 있어봤자, 얼마나 있겠나?”
“다몬 왕이시어. 우리가 뜻깊은 인연으로 얽혀있는 건 사실입니다만, 상당히 불손합니다. 자중하십시오. 진 전하는 바리엘이고, 그대는 버고스입니다.”
이안이 그만하라고 단호히 일갈하자, 다몬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안은 황족이다. 그리고 자신은 미래를 알고 있다.
당연히 자신과 이안이 결탁하는 게 맞지 않나? 황족 피를 이은 실세가 이리 뒤로 물러서 있음은, 분명 숨겨진 문제가 있다는 뜻이니.
“이안 경. 우리는 그대 생각보다 더한 관계가 될 수 있다. 정통성을 차치하고 새로운 핏줄이 황좌에 앉으려면, 외세의 힘만큼 확실한 게 어디 있나?”
바리엘을 잘라 먹자. 그리하면 버고스도 성장할 수 있고, 이안도 피어날 수 있다.
다몬의 제안을 들은 이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하가 어찌 집시를 찾아다녔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전 생에서는 전하를 비롯하여 버고스의 운명이 참으로 가혹하였지요.”
이전에도 그러했고, 이번에도 그러했다.
죽임을 당하고 행하는 자만 달라졌을 뿐, 가족끼리 피 흘린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여, 다른 미래를 꿈꾸시는 것이지요. 융성한 시대와 비옥한 토지 그리고 번영의 나라.”
다몬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뒤로 물러났다. 이안의 태도가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비밀로 엮인 인연이건만, 어찌하여 저러는지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기회란 말이다, 저와 함께 손잡는 것은!
“그런데, 그것 아십니까?”
다몬의 뒤로 테이블이 닿았다. 살짝 흔들리는 화병. 이안은 안타깝게 웃으며 일종의 선언과 같은 저주를 내렸다.
“아아. 모르시겠지요. 알고자 집시를 찾아다녔으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집시가 그러더이다. 다몬 왕께서는 전생과 다를 바 없는 운명을 걷게 되실 것이라고.”
아득.
다몬의 어금니가 강하게 맞물렸다. 헛소리다! 이미 많은 것이 바뀌었고, 앞으로도 바뀔 것이다.
“정확히는 버고스의 운명이 그러하답니다. 그러니, 다몬 왕께서 미래를 알고 있다 한들 저에게는 그리 큰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허튼소리.”
“허튼소리인지 아닌지는 집시에게 물어보시면 되겠군요. 곧 있으면 숨넘어간다고 하니, 서둘러 물어보셔야 되겠습니다.”
이안이 턱짓으로 문을 가리키자, 다몬이 살벌하게 흘겨봤다. 무얼 안다고 무엄한 소리를 지껄이는가. 자신이 버고스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어떤 짓을 하였는데.
하늘에 태양이 두 개일 수 없는 것처럼, 버고스가 영광을 차지하면 바리엘의 것은 자연스레 바래버린다. 그걸 가만두고 볼 이안이 아니었으나, 다몬은 빈 퍼즐을 맞추려는 것처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재밌군. 황태자가 그대의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떤 국면을 맞이할 줄 알고?”
“증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비밀로 엮인 인연 아닙니까.”
자신의 비밀이 새어나가면, 다몬 역시 무사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어미와 아비를 이간질하여 죽인 자 아닌가. 게다가 본국에는 수많은 서자가 남아있다. 이런 행태가 밝혀지면 왕권에 위협을 받을 게 자명하였으니.
안 그래도 보석 담보 사건으로 귀족들의 신임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상황, 다몬은 손끝에 잡히는 화병을 이안에게 집어던졌다.
째앵!
책상에 맞아 산산아 조각나는 유리. 이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웃어 보였다.
“전하.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
“귀하신 몸에 상처라도 나면, 제가 곤란해집니다.”
“그래? 그거 마음에 드네. 피 내는 것으로 그대를 그리 만들 수 있다면.”
이안은 조각을 지나쳐 다몬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 우선적으로 알고 싶은 것은 하나다.
뒤에 서 있는 진이 다치지 않는지, 그러니까-
“집시가 죽어가는지 눈으로 봐야겠습니다. 버고스 사절을 조사해 보도록 할 것이니, 협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