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15
제315화. 딜레마
살얼음처럼 바삭거리는 침묵. 로만드로와 티모시가 바깥에서 귀를 바짝 세우고 있음이 분명했다.
다몬이 저도 모르게 소파를 긁어낼 때까지, 집무실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안의 시선이 다몬의 손끝을 타고 흘렀다. 희게 변한 끄트머리에서, 그가 얼마나 힘주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소파가 질겨서 다행입니다.”
아니었으면 진즉 바닥의 화병처럼 본모습을 잃어버렸으리라.
이안의 농담에 다몬이 살벌한 시선으로 응했다. 머릿속이 꽤 복잡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비밀은 밝혀졌는데, 그로 인한 이득은 하나도 없었으니.
“당장 출궁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사를 서두르도록 하지요. 혹시 황궁에 머무르는 동안 다른 자들과 주머니가 바뀌지 않았는지 꼭 확인해 주십시오. 티끌만큼이라도 문제 될 소지가 있다면, 곤란하실 것입니다.”
나라의 고위급 지도자들끼리 만났는데, 단순히 하하 호호 즐겼을 리 없다. 가문 대 가문 혹은 관료 대 관료로서, 크고 작은 거래가 물밑에서 오갔을 터.
그것이 건설적인 것이라면 황궁에서도 치하하는 바지만, 간혹가다 불법적인 것이 적발되는 게 문제였다. 이안은 그 대가로 받은 금은보화 주머니를 조심하라 경고한 것이다.
“집시가 진실로 그런 예언을 했나?”
“버고스의 미래에 관한 예언 말씀이십니까?”
이안은 여유롭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다몬이 집시의 생사를 들이밀어 원하는 걸 얻어낸 것처럼, 이안도 그리하려는 것이다.
“집시가 죽기 전 물어보시면 되겠군요. 그자는 비밀을 먹는 자이지, 예언을 지키는 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데리고 있다면, 하여 진실로 집시의 숨결이 희미해지고 있다면 당장 가서 물어보면 될 일. 그렇지 않은가?
진위 여부를 가려줄 수 없다는 이안의 태도에, 다몬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바로 고민에 마침표를 찍으며, 시인했다.
“…집시는 없다.”
이곳은 황궁이요, 상대는 마법사다. 조사가 들어가면 어차피 밝혀질 사안. 괜히 버티고 서 있는 것보다 비킬 때는 비켜주는 것이 이득이라.
“없는 게 확실합니까?”
“그래. 단검의 피 또한 집시와 관련 없는 자의 것.”
이안은 아쉽다는 듯 웃어 보였으나, 속으로 안도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음에도 어쩔 수 없었을 만큼 이는 중요 사안이다. 겨자씨만큼 작은 위험이라도, 감히 바리엘의 미래에는 놓일 수 없으리라.
“그렇군요. 하면, 조사가 아니라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비슷한 말이었으나, 내포한 의미가 확연히 달랐다. 그저 다몬의 증언이 사실인지만 보겠다는 것. 왕은 카펫 아래로 흘러내리는 물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집시 그것이 어떤 식으로 미래를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그자가 틀렸다.”
이미 많은 것을 바꿨다. 그리고 곧 더한 것들이 바뀔 것이다. 본래 시기보다 이르게 죽어 없어진 왕과 왕비가 그 증거였고, 자신과 마주한 이안의 존재 역시 그러했다.
“이전과 같다고? 너는 그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너와 황태자의 존재 자체도 의문 속에 가라앉을 터이니.”
“무슨 말씀입니까?”
이안이 되물었다.
다몬 전생에는 진과 이안이 없었다는 걸 우회하여 이르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황제 이안의 삶에서 진의 초상화를 확실히 보았다.
다몬은 딱히 일러줄 생각이 없는지, 고개만 단호하게 돌려 자세를 갈무리했다.
“하나 확실히 하지. 내가 두 번의 삶을 살고 있다는 건, 그대도 인정하는 바. 지금 내 뒤를 따르지 않는 걸 후회하게 될 것이라.”
“오. 그거, 벌써 아쉽습니다. 미래에는 바리엘이 전복되기라도 한답니까?”
웃기는 소리. 백 년 후까지 바리엘은 건재하다. 황제 이안의 존재가 무너졌을 뿐. 믿지 않는다는 투로 대꾸하자, 다몬이 노골적으로 경멸감을 표했다.
“신의 존재에 가까운 자들이라 하더니, 생각보다 아둔하군. 버고스의 성문을 열어두겠다. 언제든지, 생각이 있다면 발을 디뎌도 좋아.”
그는 앉아있는 이안의 어깨를 손끝으로 툭툭 밀어냈다. 경고하듯, 웃음과 함께 드러나는 치아. 다몬은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혹여 이번이 아니더라도 나는 계속해서 원하는 미래를 만들 것이고, 언젠가는 이긴다. 지금 그대의 웃는 낯짝을 내 똑똑히 새겨둘 터라.”
중의적인 발언에 이안의 시선이 반짝였다.
이번이라는 게 어떤 뜻인가?
황궁에서 비밀을 들킨 지금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두 번째 삶?
후자라 하면, 세 번째 삶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지 쉬이 짐작하기 어렵다. 이안은 제 어깨를 쳐대는 다몬의 손끝을 가볍게 쳐냈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나움에 의해 시간을 거슬러 왔다만. 다몬은 어찌하여 회귀할 수 있었을까? 집시의 말로는 그저 동생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자도 마법사였나?’
다몬이 회귀 비밀을 알고 있다면, 그걸 이용하여 자신의 비밀 또한 풀어낼 수 있으리라.
그러니 여지를 남겨두자.
혹시 모르니까, 아주 자그마한 여지만.
“저는 단지 집시의 예언에 믿음을 부과한 것입니다. 왕께서 미래를 알고 있다 한들 흐름이 변하지 않는다면, 먼 훗날 일기장 보며 추억하는 노인과 다를 바 없고…….”
원하는 대로 흐름이 변한다면, 미래를 아는 게 아무 의미 없지 않나?
본질을 꿰는 물음이었다. 정곡을 찔린 다몬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상당하군. 소문보다 더더욱.”
“원래 소문을 넘기가 어려운 법인데요. 칭찬으로 받들겠습니다.”
다몬이 옷매를 정리하자, 단발 머리칼이 유려하게 흔들렸다. 이안과의 대화에서 내어준 게 너무 많다는 걸 깨달은 참이다.
침묵은 회피하기에 적합하면서도 그 흔적을 남긴다. 이안은 궤변 아래 다몬의 진짜 속내가 숨어있다는 걸 알아챘다.
변화시키고 싶은 미래와 그리되면 무용지물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회귀 정보. 그 간극에 서 있는 왕이라.
“하나만 마지막으로 묻겠다. 그대 말대로 우리는 인연으로 묶여있으니, 진실로 답해주길 바란다.”
“하문하십시오.”
“티모시는 알고 있나?”
집시와 다몬과 그리고 이안의 비밀을 말이다.
진실은 이의 없이 하나였으나, 지금 상황에서 쉬이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무슨 말을 하든, 티모시가 곤란하다.’
알고 있다고 하면? 이안과 결탁하여 주군을 배반, 농락한 자가 된다. 반대로 진실을 말해도 문제가 되는 것이…….
‘나는 바리엘의 편에서 다몬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런 내가 저런 질문을 받았을 때, 자연스러운 공격은 티모시도 알고 있노라 이르는 것이다. 그리하면 쉽게 관계를 망가트릴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아니라고 한다면? 티모시는 비밀을 모르고 있다고, 관련이 없다고 말하면?’
이것 또한 의심하겠지. 자신이 티모시를 감싼다고 오인할 수도 있다. 진정한 딜레마라, 어떤 식으로 답하든 티모시는 다몬의 신뢰를 잃을 것이다.
이미 저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불신을 품고 있기에 그런 것이겠지만.
“아니요. 모릅니다.”
“모른다?”
“관련이 없다고 하는 게 맞을 것입니다.”
이리해도 문제, 저리해도 문제라면 진실을 이르는 게 맞다. 부디 자신의 걱정이 과한 것이기를.
이안은 고개를 숙이며 정성껏 답했고, 다몬은 자색 눈빛으로 그 뒤통수를 내려다봤다.
딸랑.
다몬은 직접 책상 가까이 가 종을 흔들어댔다. 기다렸다는 듯 벌컥 열리는 집무실 문. 로만드로와 티모시가 동시에 들어오며 소리쳤다.
“부르셨습니까? 이안 님!”
“전하, 문제없으십니까?”
어이쿠. 어두운 집무실에 어찌 이리 냉기가 흘러? 로만드로는 멈칫거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를 살폈고, 이안을 돌아봤다. 다친 곳 없는지, 입을 벙긋거리며 묻는 모습이 꽤 우습다.
“제가 실수로 깬 것입니다. 시종을 시켜 정리하도록 하세요. 다몬 전하께서는 돌아가신다고 합니다.”
“아하, 그래요? 이안 님이 실수로 깼구나. 그렇구나. 그, 수백 장짜리 보고서도 완벽하게 처리하시는 분이 실수라, 어허. 그것도 다몬 전하 앞에서. 으음.”
중얼중얼, 로만드로는 다몬을 힐끔거리며 연신 꿍얼거렸다. 전혀 믿지 않는 눈치다.
아무리 왕이라 한들 바리엘 장관 집무실에서 이런 행패라니! 그것도 마법부 장관인데! 유례도 없고, 사례도 없는 작태다!
“전하. 마차를 부를까요?”
“그래. 이안 장관. 내 즐거운 담소 나누고 가오.”
잘그락.
다몬은 보란 듯이 유리 조각을 으스러트리며 집무실을 나섰다. 응접실에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우르르 쏟아지며 그 뒤를 따랐고, 곧이어 모퉁이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로만드로가 큰 소리를 냈다.
“이런, 미친!”
“괜찮습니다. 로만드로 님. 진실로 제가 깬 것입니다.”
“베릭이라면 또 몰라,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겐가? 화병을 어디로 던진 게야? 귀한 얼굴에 생채기라도 나면, 이거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가만 못 있지!”
이안은 로만드로의 과장된 열변이 재미있는지, 웃기만 했다. 상대를 열 뻗치게 하여 만들어낸 결과이니, 제 지분도 어느 정도 있지 않겠나? 이안은 도로 책상에 앉으며 물었다.
“통행증은 문제없이 건네주었습니까?”
“응. 영문을 모르는 것 같았지만, 품에 잘 넣었네.”
“그래요.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왜 그런 것을 주었어? 티모시 경은 외교관이라 큰 쓰임새가 없을 텐데. 혹여 다른 뜻이 있다면 일러주게. 내 괜찮은 선물을 물색해볼 터이니.”
사절단에 특별히 접촉할 사안이 있는지 묻는 것이다. 티모시라면 뇌물 따위 통하지 않을 것 같지만, 어쨌거나 마법부 차원에서 무언가를 해볼 수는 있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그러지 말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정으로 순수한 제 선물입니다.”
나움을 존재케 해준 선조에게 줄 수 있는 작은 배려. 주기 전까지도 고민이 많았지만, 어차피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면 위안이라도 되게끔 하고 싶었다.
“…다몬 왕을 보아하니, 그걸 쓰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무슨 말인가?”
“아닙니다. 로만드로 님. 집시가 아직 중앙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직접 나서서 처리하는 게 좋을 듯하니, 사람을 적당히 모아주십시오. 그리고…….”
집시가 지금처럼 온 세상을 자유로이 떠돈다면 문제없겠지만, 다몬의 손아귀에 들어가면 곤란해진다는 걸 알았다. 진의 비밀이 그녀의 뱃속에 남아있었으니까. 그러니, 다몬이 잡아내기 전 이안이 잡아내는 게 나을 것이라.
“집시가 아직 중앙에 있어? 거참, 그자도 대단하군. 알겠네. 이번에는 친위대 쪽이랑 연합하여 조사단을 꾸려보지. 그리고?”
“버고스로 사람을 하나 보낼 것입니다.”
로만드로가 메모하던 것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버고스는 집시 찾아 이쪽으로 들어오고, 이쪽에서는 버고스로 들어가? 뭔 일이래?
“사람? 누구로 선별하면 되겠나?”
“날쌔고 정보 수집에 능한 자면 좋겠군요.”
“임무는?”
다몬이 궤변 아래 무언가를 숨기고 있으니, 손수 파헤칠 수밖에. 그의 전생과 현생 사이의 가장 큰 구멍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할 것이다.
“다몬 왕의 형제들을 좀 알아보고 싶습니다.”
“형제?”
부부 사이를 이간질했던 수많은 이부, 이모 형제들. 전생에서 자신을 파국으로 이끌었던 동생이 태어나지 않길 바랐다면, 그저 부부 사이를 멀어지게 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형제가 있었나?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
“죽은 자들까지 포함하겠습니다. 소문이라도 좋습니다. 형제라는 이름을 단 자들에 대한 정보라면, 무엇이든 알아오라 하세요.”
일하면 일할수록 당최 이안의 속내를 알 수 없다. 로만드로는 한탄하면서도 착실하게 이행할 거리를 적어냈다.
“알겠네. 적당한 자를 추려서 보고서로 올리지. 그런데 그 전에, 다음 주는 유동적으로 일정을 비우는 것 잊지 마시게.”
“다음 주요? 아아.”
이안은 책상의 달력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축제 기간이 끝나고, 드디어 필리아와 네르사른의 약혼식이 열리는 게다.
잊지 않았겠지? 로만드로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노려보자, 이안은 피식 웃었다. 살얼음 같던 사위를 단숨에 녹이는, 따뜻한 웃음이었다.
“알겠습니다. 꼭 참석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