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16
제316화. 알레나라를 통하여
“그래서, 그 다음은?”
“다음이랄 게 있습니까? 민망해서 지방으로 도망갔지요. 그 뒤로 들려오는 소식이 없습니다.”
에리포니는 푹신한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긴 담뱃재를 털어댔다. 낮은 웃음과 함께 흐트러지는 연기. 맞은편에 앉아있는 알레나라가 퍽 재미있는 말을 들려준 덕이다.
사는 것 다 똑같다고, 바리엘이나 루스웨나나 귀족들의 사교계란 죄다 엉망진창이었다. 에리포니가 머리칼을 뒤로 넘기자, 눈치 빠른 알레나라가 곧장 담뱃재의 불씨를 키워줬다.
“알레나라, 귀족 영애치고는 손이 부지런해.”
“감사합니다.”
후, 에리포니는 보란 듯이 그녀에게 연기를 불어댔다.
속없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만찬 날 밤, 필사적으로 올라오려는 모습부터가 은근히 마음에 든다 하였는데, 이모저모 참으로 쓸모가 있다. 조잘대며 수다를 늘어놓는 것 같았지만, 그 속에서 타국인이라면 알 수 없는 정보가 즐비했으니.
“하여서, 하이만의 재산은 조각나서 총 열 개의 은행으로 바뀌었다고. 제일 크게 진행되는 곳은 어디지?”
“라크셔 가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아아. 차남이 말 타다 가랑이 찢겼다는?”
“네. 본인 다리 짧은 것을 말에 화풀이하였지요. 보다 못한 상인이 종마로 사 갔는데, 그 새끼들이 대국 경마에서 줄줄이 일등을 차지했다 합니다.”
“하하하! 그것참, 가랑이만 찢긴 게 아니라 속도 찢어졌겠군.”
알레나라는 에리포니가 소리 내어 웃을 때마다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의 가치가 증명되는 기분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왕께서는 제 오라비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 차라리 자신이 왕에게 의미 있는 자가 되는 게 나을 듯싶었다.
“전하.”
“응?”
그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엘더트가 모습을 보였다. 손님이 찾아온 것이라. 황궁에서 그녀를 찾을 만한 자라면 몇 없을 터인데…….
“다몬 왕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흐음. 그래?”
어제, 다몬이 마법부로 따로 걸음했다는 걸 들었던 차라 궁금하긴 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안을 보았는지 말이다. 에리포니는 흐응, 알 수 없는 중얼거림과 함께 알레나라를 힐끗거렸다.
“저는 그만 물러나겠습니다. 전하.”
“아니, 되었다. 다몬 왕을 안으로 모셔.”
에리포니가 상체를 일으키자, 알레나라는 제 머리칼을 정돈했다. 드디어, 버고스의 왕과 대면하는 게다. 이 또한 놓칠 수 없는 기회였으니!
알레나라는 단단히 정신을 바로하며 문쪽을 바라봤다. 곧이어, 다몬이 엘더트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다몬 왕이시어.”
“즐거운 시간을 방해했습니까?”
“무슨 섭섭한 소리.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인걸요.”
“길게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황태자의 명으로 인해 제일 먼저 출궁하는 버고스였다. 아마 모든 준비를 마치고, 본궁을 거치기 전 잠시 들른 것이리라.
“그대가 알레나라 영애인가?”
“처음 뵙겠습니다. 알레나라 세르오입니다.”
“괜찮은가? 담배가 전체적으로 독한 듯한데.”
배려하는 말투였으나, 속뜻은 자리를 비켜달라는 것이다. 당연히 알아들은 알레나라가 일어서려고 하는 순간, 에리포니는 담뱃대를 들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가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는 명이다.
“괜찮습니다. 이제껏 같이 있었는데요, 새삼스럽게 무슨. 안 그런가, 영애?”
“…예. 저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다몬 왕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황태자 뵙기에도 촉박한 시간에 저를 찾아오심이, 영광이라.”
서둘러 본론을 이르시오, 에리포니가 재촉하자 다몬이 인상을 찡그렸다. 알레나라가 몰락하여 타국에 붙어먹으려는 귀족이긴 하나, 이런 자리까지 함께하는 게 과연 합당한가?
다몬이 다시금 축객령을 내릴까 고민하였으나, 시간이 별로 없음을 인지하고 관두었다.
“버고스가 요청한 사안을 다시금 확인하고자 합니다. 에리포니 왕이시어.”
“물론이지요. 국가 간의 거래 아닙니까? 귀국하여 체결이 진행되는 대로 경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무슨 대화일까. 알레나라는 멋쩍게 시선을 내리깔며 귀만 쫑긋거렸다.
버고스와 루스웨나 사이에서 무언갈 주고받는 듯한데, 뭉뚱그리는 탓에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공식적인 것이겠지? 국가 간의 거래라고 하였으니.
“그리고 마법부의 이안 히엘로 장관에 관하여-”
다몬은 언급하면서도 계속 알레나라를 살폈다. 과연 제 조국을 잘라먹을 논의를 듣고서도 가만있을까? 아무리 봐도 위험 요소인 것 같은데.
에리포니는 무슨 생각인지, 계속 생글생글 웃기만 했다.
“-그쪽을 먼저 신경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흐음. 황궁의 실권이니, 응당 그것이 맞긴 합니다만. 언급하시는 연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어제 마법부를 찾으셨다고요.”
“대면해 보니 알겠더이다.”
“무엇을요?”
“그쪽이 쉬워요.”
쉽다? 에리포니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다몬의 의중을 알아챘다. 그러니까, 바리엘 성문을 열기 위해서 힘주어 두드리는 것보다 안쪽에서 불내는 게 낫겠다는 의미인 것이라.
“황태자가 마법부에서 거처를 옮겼다고 합니다.”
“들었습니다. 내란으로 부서진 궁을 수리했다지요.”
다몬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고작 그것만이 전부이겠는가? 제국의 황태자 거처 문제였다. 그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들어 갔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황궁에서 황태자를 중심으로 마법부 장관 견제가 들어갈 것이다.’
자명했다. 임명식 축제 기간, 황궁에 머무르며 보았던 정세의 흐름이 그걸 확연히 보여주고 있었다. 온갖 사사로운 일에도 중심을 차지하던 마법부. 그리고 이견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던 타 부서까지.
테이블 위만 쳐다보던 알레나라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기, 송구하옵니다만.”
“무슨 일인가.”
“들리기로는 황궁친위대가 마법부와 마찰을 겪은 적이 있다 들었습니다. 당시 새로운 인재 선발 시기였는데, 마법부가 친위대와 방위부 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거든요. 그때 이후로 조금씩 친위대의 위상이 올라가고 있다는 소문이 돕니다.”
알레나라가 쫑알쫑알 정보를 늘어놓자, 에리포니가 웃었다. 이것 보아라. 참으로 쓸 만하지 않는가? 살아남기 위해 바닥을 기는 귀족의 자존심. 이만치 재미있는 게 또 없다.
그녀는 자신이 훈련시킨 강아지를 보는 것처럼, 흡족한 얼굴로 애정을 담아 알레나라를 쳐다봤다.
“황태자가 거처를 분리했다면, 몸 사리고 있던 반대파가 반응을 보이기 쉬울 것입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네요. 이안 경, 그자가 만만치 않아서.”
황태자는 너무 어리고, 마법부는 적수가 없다. 될까 싶지만, 되기를 원하며 달려드는 자가 있을 것이라. 방금 알레나라가 말한 황궁친위대와 같은.
“솔직히 버고스와 루스웨나 입장에서는 이안 장관을 상대하는 것보다, 진 황태자를 상대하는 게 쉽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저도 진 황태자가 더 귀엽더라고요.”
견제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면, 진 쪽을 밀어주자는 게다.
관료들이 밀어붙이는 것만큼은 아니겠지만, 충분히 중요한 순간에 흐름을 돕거나 끊을 수 있다. 바리엘이 자신의 팔과 다리를 잘라내는 걸 도와주어, 꼼짝달싹 못 할 때 잡아먹으면…….
“생각보다 쉽겠네요.”
“예. 제 말이요.”
에리포니는 손톱을 탁탁 튕기며 고민했다. 예를 들어, 국가적 차원에서 마법부를 공식 초청하여 인력을 분산시키거나, 아니면 마력석 가격을 높일 수도 있다.
하면, 황궁에서는 적정선을 논의하기 위해 명분을 가지고 마법부 물자를 조정할 수 있겠지. 기타 등등, 무궁한 수가 있었다.
“그런데 버고스에서는 마법부과 마력석 거래를 체결하지 않으셨습니까? 불발되는 건가요?”
“아니요. 그건 진행할 예정입니다. 보아하니, 그게 기폭제 같더라고요.”
별채 건설을 하니 마니, 황궁과 마법부의 갈등이 그걸 중심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걸 전해 들었다. 그러니 당연하게, 땔감을 넣어줄 수밖에.
“우선, 저의는 알겠습니다.”
황태자를 중심으로 황궁의 반대파가 검을 겨누고, 그 반대에서는 타국이 이안의 등에 화살을 조준하리라.
어쩌면 좋을까, 불쌍한 것. 에리포니는 고고하던 이안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비웃었다.
‘그래. 이안이 황궁에서 자리할 곳이 없어지면, 루스웨나로 데려와도 되겠다. 재수는 좀 없지만, 그 실력만큼은 역사적일 정도라 하니. 이전의 웨슬리 장관을 월등히 능가한다고.’
날이 가면 갈수록, 이안이 몰락하길 바라는 자들이 늘어났다. 황궁 안에서나, 밖에서나.
딸깍.
다몬은 회중시계를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으로 짧은 순간만이 허락된 참이다.
“그럼, 자세한 건 귀국하여 서신 하겠습니다.”
“벌써 가십니까?”
“황태자께서 대회의에 참석 중이라 하시더군요. 덕분에 아주 잠깐의 틈이 난 것이니, 늦지 않게 일어나야겠습니다.”
출궁 전 인사를 위함이라. 에리포니는 아쉽다는 듯 탄성을 내질렀지만, 전혀 아쉽지 않은 눈빛으로 그를 배웅했다.
어서 썩 가버려라, 자신은 알레나라와 잡담을 할 것이니.
“그럼 이만.”
“예. 조심히 출궁하시고, 또 뵙지요.”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티모시가 에리포니에게 꾸벅 인사했다. 눈빛으로 주고받은 인사 후, 버고스의 사절단은 사라졌다.
알레나라가 다시금 소파에 앉으며 에리포니 왕의 담뱃대에 불씨를 넣어줬다. 왕이 저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고 떠났으니, 일이 터 버렸다.
“그런데 전하.”
“왜 그러느냐.”
“황태자께서 이안 경 견제에 실패하면 어찌 됩니까?”
견제에 실패해? 그러면 생각할 것 있나?
타악! 에리포니는 대리석 테이블을 담뱃대로 내려치며 웃었다.
“진짜 새로운 시대가 열리겠지. 혼란과 함께.”
그 혼란이 가져오는 안개는 외세에게 길을 만들어 줄 것이고, 그러면 이러나저러나 타국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전하. 그런데 루스웨나도 곧 있으면 출궁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우리가 제일 마지막에 나간다.”
알레나라는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까, 고민했다.
다몬 왕과의 대면에서도 저를 물리지 않을 정도이지 않나? 짧은 시간 동안 신임을 꽤 얻은 게 분명한데, 저에게 어떠한 약조도 해주질 않고 있다.
귀국할 때 함께 가든가, 아니면 귀국하여서 세르오 가문을 부르겠다는 것 따위의 약조 말이다.
“루스웨나를 가본 적이 없어서요. 듣기로는 정말 아름답다 하여…….”
데려가 달라. 아니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증표를 달라. 알레나라가 그리 이르자, 에리포니는 연기를 내뱉었다.
“아아. 그래. 내 그렇지 않아도 이르려 했다.”
“하명하십시오. 전하.”
“귀국하여 초대할 것이니, 그 전까지 중앙에 남아 매일 같이 내게 서신을 보내다오.”
중앙에 심어둘 귀가 필요한 것이라.
에리포니가 활짝 웃으며 명하자, 알레나라가 멈칫거렸다. 언제까지?
“그리할 수 있지?”
“그, 그럼요. 전하. 영광입니다.”
“오기 전, 내 루스웨나에 그대에 걸맞은 자리가 있는지 세심하게 봐두어야겠다.”
희망이 가득한 가슴에 불안 한 방울이 퍼지는 느낌. 하지만 알레나라는 애써 무시하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더는 떨어질 곳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으음. 귀엽네.’
쓸 만한 눈과 귀가 생겼는데, 그걸 어찌하여서 돌아가겠나?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 두어야지.
에리포니는 삼백안으로 알레나라를 훑으며 그리 생각했다. 마치 먹잇감을 가지고 노는 뱀의 모습과 닮아있다는 걸, 자각하지 못한 듯했다.
* * *
한편, 본궁으로 내달리는 마차. 촉박한 시간을 맞추기 위해 마부의 채찍질이 연신 이어졌다.
이안은 크게 흔들리는 내부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은 채, 계속 서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축제가 끝나고, 드디어 처음으로 손님이 떠나는 날이다. 시작만큼 중요한 것이 마무리였기에, 이안의 업무 또한 여전히 밀려 들어왔다.
“로만드로 님. 다음 서류 주십시오.”
“응. 여기 있네. 그리고 이안, 세르오 가의 여식이 또 에리포니 왕의 별궁에 들었어.”
“그렇습니까?”
“이거 가만두어도 되는지 몰라. 아무리 생각해도 좀 불손하지 않나?”
걱정하는 로만드로와 달리, 이안은 눈썹만 까딱거렸다.
“불손하라고 그리 두는 것입니다.”
“응? 무슨 말인가?”
“에리포니 왕이 사사로운 자도 아니고, 들러붙는 자를 진심으로 가까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중앙에 둘 눈과 귀 정도로 여긴다면, 그들 역시 마찬가지로 여기면 된다. 에리포니를 들여다볼 눈과 귀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