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18
제318화. 작은 약혼식
버고스의 마차들이 일렬로 서서 출발 신호를 기다렸다.
진상품으로 가득했던 짐칸이 텅 빈 터라, 말들은 만족스럽게 앞발을 굴려댔다. 훨씬 가볍게 달릴 수 있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마부들은 채찍에 기름칠을 해대며 혀를 찼다.
“아이고, 고생해서 왔건만 빈털터리네.”
“그러게. 다른 나라도 이런가 몰라.”
응당 가는 게 있다면 오는 게 있는 법. 임명식 진상품으로 수두룩한 보석을 갖다 바쳤는데, 돌아온 것이라고는 여정 동안 소비할 음식뿐이다.
짐꾼들 역시 빈손을 탈탈 털어대며 볼멘소리를 해댔다.
“들어보니, 답례품을 면세로 받았다더라고요.”
“그래? 무슨 면세? 우리도 뭐, 혜택받나?”
“글쎄요. 그것까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윗분들만 노났지요. 고생은 우리가 하고. 크흠.”
“아이고, 저기 온다. 쉬잇!”
시종들이 본궁 앞으로 달려 나와 길을 트는 게 보였다. 곧이어 바리엘의 황태자라는 아이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버고스의 왕이 보인다. 그 뒤를 따르는 수십의 인파. 정복을 휘날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위용 찼다.
마부들은 채찍을 바짝 쥔 채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그래. 바로 출발하면 된다고.”
“예. 전하. 다시 한번 후계자 임명을 축하드리며, 귀한 자리에 초대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마부는 호기심에 고개를 슬쩍 틀어 황태자를 올려다봤다. 아무리 봐도 열댓 살에 불과한 아이인데, 목소리가 어찌 저리 단단한가 싶은 게다.
방금까지 진이 훌쩍거리고 왔음을 알아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버고스의 사람들 중에서는.
“그 전에, 잠시.”
진이 손짓하자, 시아오시가 고급 천 주머니를 가져왔다. 그 안에서 들려오는 잘그락 소리. 마부들의 신경이 곤두섰다. 한평생 동전 닢으로 급료 받아온 자들이니, 저것이 의미하는 바를 누구보다 기민하게 눈치챘다.
“내 전해 들었소. 어느 상황이든, 답례품은 그 아랫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관례라고. 하나, 이번에는 짐칸이 유독 가벼우니, 내 소소하게나마 치하하려 하네만.”
마부와 짐꾼들이 엎드린 채로 쾌재를 불렀다. 떡고물 하나 떨어지지 않아 불만이었는데, 역시 대국의 황태자시라. 다들 흥분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닙니다. 전하. 괘념치 마십시오. 면세라는 큰 선물을 주셨는데, 어찌 또 염치없이 받겠습니까. 넣어두십시오.”
다몬이 거절하기 전까지 말이다. 사실상 제대로 진상된 게 없는지라 면세 혜택을 누리지도 못하지만, 그 누구도 그걸 언질하지 않았다.
“아랫사람들이 아쉬워할 것 같네만.”
예예. 아쉽습니다. 아쉬워서 펄쩍 뛰어오를 지경입니다. 짐꾼들은 저들끼리 힐끗거리며 울상을 지었다. 왕께서 제발 허락하였으면 좋겠다는 듯이.
“이보게. 자네.”
“네? 저, 저 말씀입니까?”
“그래. 이리 와서 받으라. 제국의 축제이니, 모두가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게 맞아.”
진은 어쩔 수 없이 가까운 자를 지목하여 다가오라 명했다. 마부는 서늘한 주군의 시선을 받아내며, 우물쭈물 황태자 앞에 섰다.
짤랑.
“수고하였다. 다들 조심하여 가시라.”
“황, 황송하옵니다. 전하.”
“나머지는 알아서 공평하게 나누고.”
마부는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총총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안쪽이 금빛이다. 모두가 금화 한 닢씩 손에 쥘 수 있음이라.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다몬은 티모시에게 눈짓하여 마차에 올랐다. 진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만, 솔직히 곱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빈손으로, 되려 손해 보고 돌아가는 저들을 조롱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국의 위상을 자국민들에게 선전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자,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라.”
“출발을 준비해!”
히이잉!
티모시가 주위를 정리하며 마차를 점검하자, 귀족들 역시 관료들과 인사하며 작별했다.
진이 처음으로 맞이한 공식 외교단이 돌아가는 순간. 이안은 티모시에게 다가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티모시 사절.”
“이안 경. 잘 지내다 갑니다. 환대에 감사했습니다.”
“언제든지, 그대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습니다. 부디 조심히 들어가시고 몸조심하시오.”
이안이 먼저 악수를 청하자, 티모시는 존경의 뜻을 담아 두 손으로 맞잡았다. 짧은 시일이었지만, 황궁에서 이안이 보여주는 영향력을 절실히 느꼈으니까.
“예. 또 뵙겠습니다.”
“…그래요. 또 봅시다. 오늘과 같은 모습 그대로.”
무엇보다, 바리엘과 버고스의 관계가 그리 원만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안이 자신에게 내주는 호의가 의문스러우면서도 소중한 것 아니겠나?
왕국을 위해, 주군을 위해. 티모시는 사절이라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끔, 바리엘과 소통할 수 있는 창구임을 자처하고 싶었다.
스윽.
다몬은 마차 안에서 커튼을 걷으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서두르라는 듯이 마부석 쪽 창문을 두드렸다. 마부가 깃대를 올리자, 티모시가 몸을 돌려 마차에 몸을 실었다.
“출발하겠습니다!”
타닥타닥!
히이잉!
마차가 하나둘씩 움직여 황궁 입구 쪽으로 내달렸다. 스쳐 지나가는 다몬의 시선. 이안은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응수했다. 차가운 눈빛에 대적하는 온화한 미소다.
“갔군요. 아이고,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아직 클리포포드랑 루스웨나가 남았어요.”
“전하, 저희는 이만 업무에 복귀하겠습니다. 오늘 회의 보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 들어들 가시오. 수고했소.”
곧이어 버고스의 행렬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관료들도 흩어졌다. 떡하니 눈 마주친 이안과 진. 이안은 허리를 숙이며 아이를 칭찬했다.
“전하. 금화를 하사하신 것, 참으로 잘하셨습니다.”
이안도 몰랐던 것인데, 이게 의외로 효과가 괜찮을 듯 보였다. 제국의 관용을 보이기에도 적합했고, 무엇보다 버고스 지도자들에게는 낯부끄러운 일이라. 사용인들도 가져가는 이득을 취하지 못했다는 조롱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이안이 칭찬했으나, 진은 눈매만 가늘게 뜨고 반응하지 않았다. 뒤에서 지켜보던 로만드로가 ‘왐마나’ 하고 놀란 낯을 보였다.
“그래.”
“…전하?”
“그만 들어가시오. 나도 일이 많아서. 흠.”
진은 입을 비죽거리며 새침하게 몸을 틀었다. 아까 필리아의 약혼식에 오지 말라 한 섭섭함이 풀리지 않은 게다. 아이는 보란 듯이 발을 쿵쿵거리며 본궁 안으로 들어갔다.
시아오시가 인사하듯 고개를 까딱거렸으나, 그마저도 끝맺음 짓지 못했다. 아이가 서둘러 오라며 팔을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삐지셨네.”
“…버고스 마차가 중앙을 바로 나섰는지 확인하십시오. 혹여 다른 길로 들어선다면, 저지하지 말고 보고만 하라 하시고요.”
“삐지셨다고. 이안.”
“…클리포포드 쪽과 동맹 체결 계약서는 준비되었습니까? 그쪽도 오전 중으로 출궁할 것 같은데요.”
이안은 못 들은 척 계속해서 업무만 확인했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메모는 착실히 하는 로만드로. 주변에 보는 사람이 많아서 봐준다는 표정이다.
“이안.”
“로만드로 님.”
그리고 마법부로 돌아가는 마차. 둘만 남게 되자,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로만드로는 먼저 말해보라는 듯이 펜을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저번에 그러셨죠. 혹 전하와 다투었냐고요.”
“그랬지. 그런데 오늘 보니까, 자네의 일방적인 잘못이라. 황태자이시니 단단한 성정을 만들어드리기 위해 그리하는 건 알겠다만. 아, 그래도 아직 어리신데.”
“…제가 미리 언질을 못 드려서 미안합니다.”
이안은 턱을 괸 채로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로만드로에게 자신의 고민 겸 계획을 털어놓았다.
이제부터는 진과 자신이 갈 길이 완전하게 다르니, 가장 가까운 로만드로가 그걸 알고 있는 게 맞지 않겠나?
“로만드로 님. 황궁의 기둥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으십니까?”
황궁을 받치는 기둥은 적당한 거리로 벌어졌을 때 제일 이상적이라고, 현재 진과 자신의 거리는 너무도 가까워, 바람이 불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게 분명하다고. 이안은 처음으로 제 생각과 고민을 입 밖으로 꺼냈다.
마차가 크게 흔들렸으나, 로만드로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맞은편에 앉은 아이가 그의 온 신경을 바로잡고 있었기 때문에.
* * *
햇살이 유독 따사로운 어느 날의 오후.
거울 앞에 앉아있던 필리아가 놀라서 고개를 틀었다. 금빛의 머리칼이 흔들리자, 비비안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바로 잡았다.
“전하가 못 오신다고요?”
“부인, 움직이면 안 됩니다. 다시 빗어야 한다고요.”
“아, 죄송해요. 너무 놀라서.”
“업무가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다고 하시네요. 저도 아까 전해 들었어요.”
황자의 신분에서 황태자로 승격하셨으니, 이전과 비견할 수 없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사적인 친분이 있다 한들, 필리아는 작위 하나 없는 평민 출신. 게다가 약혼자는 변방의 소수민족 아닌가? 오히려 이 자리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저도 참, 분수에 맞지 않게 기대하고 있었나 봐요. 제국의 황태자께서 오실 자리가 아니긴 한데요.”
“무슨 소리세요? 전하께서 꼭 오겠다 약조하셨으니 그런 것이지요. 기대함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지 말고, 눈 감아보세요. 오늘따라 화장이 잘 되네. 어우, 예뻐.”
비비안나의 주책 어린 칭찬에 필리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저택 정원에서 진행되는 작은 약혼식. 초대할 손님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장관의 새아버지가 천려족이라는 게 공식화되면 난감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안은 별로 신경 안 쓰는 듯 하지만, 어차피 결혼식은 히엘로령에서 또 올릴 것이기에…….
쾅! 콰앙!
우당탕탕!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눈썹 그리던 비비안나가 멈칫했다. 어찌하여 바깥이 이리 소란스럽단 말인가? 비비안나는 문을 열고 경고했다.
“다들 조용! 왜들 그래요?”
“비비안나! 아니, 이 자식들이 자꾸 위층 올라간다잖아. 보면 안 된다고 하는데!”
“베릭, 이 꼬맹아. 좀 비켜봐. 천려족은 원래 혼인식 전에 신부 만나서 축하하는 게 전통이라고.”
“바리엘은 아니라고, 멍청이들아! 식 전에 신부 보면 안 된다했어!”
“너 결혼 해봤어? 짜식이, 한 적도 없으면서.”
“그러는 니는?!”
“나는 두 번 했다!”
콰앙!
필리아를 보러 올라오려는 천려족과 그를 막는 베릭 간의 소란이었다. 비비안나는 웃는 낯으로 벽을 내려치며 경고했다.
“다들, 조용히 내려가 주세요. 호호.”
“헉, 비, 비비안나 입만 웃는데?”
“시끄러워서 화장 할 수가 없네요. 호호호.”
어찌하여 손에 든 브러시가 무기처럼 보이는지 모를 일이다. 베릭은 전사들을 잡아끌며 계단을 내려갔고, 이내 정원 앞에 당도하는 마차를 발견했다.
“이안이다!”
이안과 로만드로 그리고 헤일을 비롯한 소수의 마법사들이 약혼을 축하하기 위해 온 것이다.
정장을 입은 이안이 정원을 둘러보며 웃었다. 약혼식이라 하기에는 고기 파티에 가까운 모습들이었으니. 곳곳에 장식된 꽃들이 아니었다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들이다.
“다들 오랜만이군.”
“이안 님, 얼굴 까먹겠습니다.”
“네르사른 님은?”
“저쪽에 있습니다. 전투할 때도 눈 하나 깜짝 안 했는데, 어찌 저리 긴장하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안이 천려족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마을의 꼬맹이들이 축제 가면을 쓴 채로 담벼락에 붙어댔다. 마법사들이 산다는 집에서 소란이 일어나니, 무슨 일인지 궁금한 것이라.
“보여?”
“아니, 안 보여.”
“사람 엄청 많네. 뭐 하나 봐.”
그때, 은근슬쩍 합류하여 담벼락에 붙는 아이. 마찬가지로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그 옆으로 삐죽 튀어나온 은발이 유독 반짝였다.
“엥?”
그리고 아이의 옆을 단단히 지키는 회색 머리칼의 남자. 꼬맹이들은 ‘누구세요?’ 하는 눈빛으로 그들을 돌아봤으나, 두 사람은 말 없이 안쪽만 계속 훔쳐보고 있었다.
“어, 결혼식이었나 봐! 신부 나온다!”
“봐봐, 어디?”
정원에서 백색의 드레스가 나타났다. 꼬맹이들이 수군거리며 구멍에 눈을 더더욱 가까이 대었다. 그리고 통시에 탄성을 내질렀으니.
“와. 천사다. 천사.”
“진짜 예쁘다.”
진 역시 꼬물거리며 틈을 비집고 안쪽을 살폈다. 필리아의 귀에 달린 압생트색 보석이 유독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