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2
제32화. 숨긴 것
“입적하지도 않은 자식을 보내다니! 이것은 기만입니다!”
“맞아요! 어찌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가!”
이안은 느긋하게 앉아서 장로들이 분 터트리는 것을 지켜봤다. 화친이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리 당했다는 게 믿기지 않은 눈치였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저는 아버지의 자식이 맞습니다. 그 부분은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친모는?”
“글쎄요.”
카칸티르의 물음에 이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알아서 해석하라는 무언의 대답이었다. 안 그래도 험악해진 상황. 여기서 사창가 출신이라는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내용도 아니었고.
“당장이라도 목을 부러트리고 싶군.”
“하지만 족장님은 천려족의 지도자십니다. 분명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겠지요.”
카칸티르는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으르렁거렸다. 이안을 제국의 손님으로 대접하겠노라 선언한 이상, 이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이것은 신념의 문제였다.
‘그렇다고 브라츠를 칠 수 있는가? 아니. 중앙에서 군대가 내려오는 것을 안 이상, 이 또한 무모한 짓이다.’
“자네.”
카칸티르는 황당한지 구룻잎을 말아 씹었다. 경이라 칭하는 호칭도 입에서 떨어진 지 오래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아직까지 이안의 목이 붙어있다는 게 존중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계속 나불대 보지. 더 말할 게 있나?”
“족장께서 원하시는 게 있다면, 있겠지요.”
뒤에서 장로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이안은 방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아. 있으시겠군요.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말입니다.”
“흥미로웠으면 좋겠어. 시끄러운 내 머릿속을 단번에 정리해줄 만큼.”
카칸티르의 시선이 집요하게 이안의 목덜미를 노렸다. 충동을 억제하느라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천려족의 도움으로 제가 브라츠 영주가 된다면, 저는 브라츠를 바리엘에서 제일가는 영지로 만들 것입니다.”
“왜지?”
“그것만이 변방 출신인 저를 받쳐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힘을 충분히 쌓은 다음엔, 중앙으로, 정확히는 황궁으로 갈 겁니다.”
카칸티르의 갈색 눈이 번들거렸다. 이 조그만 것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중앙으로 가겠다고? 이는 제국의 아가리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가겠다는 뜻이다.
가서 무엇 할지는 둘째 치더라도, 영주가 자리를 비운 영지가 어떤 식으로 몰락하는지 몰라서 그런 것인가? 내부자들의 부패로 곯아 터지던지, 바깥의 침략으로 박살 나는 게 수순이다.
“이 모든 것이 입적도 하지 않은 제가 도망치지 않고 사막을 건넌 이유입니다. 카칸티르. 우리는 이제 달라질 필요가 있어요.”
진정한 동맹과 평화.
단순히 서로 무역품을 교류하고, 숫자와 글자로 묶이는 관계가 아니었다. 영주가 등을 내줄 수 있는 상대. 그것은 천려족을 변방의 야만족이 아니라 우방으로 보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흥미로운지는 모르겠고. 확실히 잡생각은 사라졌다.”
“다행입니다.”
카칸티르가 구룻잎을 다시 말아 씹을 때. 네르사른이 손을 들었다.
“이안 경.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중앙군이 도착하면 데르가에게 시간적 여유가 있습니까? 전언을 보낼 여유 말입니다.”
와우. 이안은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카칸티르. 자네는 상당히 괜찮은 자를 옆에 두고 있구만. 족장의 책사답게 생각의 깊이가 상당했다. 아무도 생각지 못한 부분을 언급한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조사가 진행되어야 하니까요. 그 기간이 넉넉잡아 보름입니다. 사실상 중앙에서는 확신하고 내려오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더더욱 문제군요.”
“네르사른. 무엇이?”
카칸티르를 비롯한 다른 장로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입니다. 벗어날 기회가 없다면, 데르가에게 남은 것은 참수. 그것도 멸문입니다. 군대를 일으켜 대항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려족에게도 도움을 요청하겠지요.”
그들은 불과 며칠 전에 화친 협약을 맺은 동맹이었으니까 말이다. 카칸티르는 그제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거절할 수 없다.”
“그렇습니다. 특히나 화친 직후이니 더더욱.”
신념 이전에 정치적으로 하면 안 되는 행동이었다. 명분 없이 화친을 깨면 천려족 스스로가 야만족이라 선포하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나중에 제국에게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 카칸은 이런 상황이 불쾌했다. 이러나저러나 제국의 손에 놀아나는 꼴이 아닌가.
“화친이 문제다. 화친 때문에 우리 입장이 난처해졌으니 이부터 해결해야겠는데. 무를 방법은 없나?”
네르사른이 고개를 저었다.
“쉽지 않습니다.”
“어째서? 놈들은 우릴 속였다. 입적도 하지 않은 자식을 보냈어.”
“카칸, 입적이 되진 않았지만 어쨌거나 이안은 데르가의 아들이 맞습니다.”
“그렇지요. 옳은 주장입니다.”
이안은 네르사른의 말에 맞장구쳤다.
“게다가 아버지는 화친 이전에 제가 서자임을 밝혔지요. 또 제가 중앙과 결탁해 입적을 미루었다는 사실도 모를 테니, 이쪽에서 이의를 제기하더라도 소용없을 겁니다.”
“마치 죽여달라 재촉하는 것 같군. 계속 지껄여 보시지.”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이안의 선언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카칸티르도 입을 꾹 닫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모든 역사는 명분 위에 세워지는 법. 그리고 모든 명분은 사람에게서 만들어지는 법이죠. 제가 만들어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이지?”
“화친을 파기할 명분이요. 또한 데르가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거절할 명분까지.”
그리고 이안은 탁자 끄트머리에 놓인 구룻잎을 집어들었다. 이것이 그 답이라고 말하는 눈빛이 형형했다.
“아버지가 저에게 은밀히 지시했습니다. 내년 생일날 브라츠로 잠시 돌아갈 때, 구룻잎을 밀수해 오라고.”
“세상에. 하하!”
척척 나오는 이안의 대답에 카칸티르는 실소를 터트렸다. 사막을 건너기 전부터 결심했다더니, 과연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주가 밀수를 지시한 것입니다. 그것도 절대 금지 품목인 구룻잎을, 평화의 상징인 화친 대상을 통해.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갈아먹어도 시원치 않은 뒤통수니. 충분하고도 남는다. 증거는?”
“아쉽게도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윈첸 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이거라면 입적 건도 얹어서 강력하게 항의할 수 있다. 항의? 아니지. 그저 일방적으로 파기하여도 상대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물론 저는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요.”
“그대가 오늘 한 말은 윈첸 님을 넘어서 신께 맹세할 내용일세.”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미치겠군. 브라츠는 대체…….”
덜떨어진 핏줄 못 속인다고, 데르가에게는 첼처럼 멍청한 것들만 있을 줄 알았다. 이안이 보내온 친필 서신은 그 확신을 더 해주었다.
한데, 지금 분위기를 보라. 금발에 녹안인 외지인이 천려의 지도자들을 주도하고 있지 않은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인가? 천려족이 그대를 지지한다는 성명.”
“충분합니다. 나머지는 제가 처리할 것입니다.”
이리 재도 저리 재도 딱히 흠잡을 것 없는 거래였다. 따지고 보면 조금 유리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 이안은 목숨을 잃겠지만 천려족은 그저 사막으로 돌아오면 될 일. 중앙이 침입한다면 하던 대로 사막을 등에 업고 싸우면 된다.
그는 탁자를 두드리며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우리는 자네를 위해 피 흘릴 생각이 없다.”
“저 또한 원치 않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전혀요.”
호기로운 이안의 태도. 카칸티르는 순전한 호기심으로 물었다. 한참 어린 것이, 기백은 천려족의 전사를 압도했다.
“저는 한번 죽었다 깨어났거든요.”
“멋진 각오로군.”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지만, 카칸티르는 알아채지 못했다. 하긴, 무슨 수로 알겠나. 이안이 두 번째 삶을 살고 있으며, 이는 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뜻임을.
게다가 아직 숨겨놓은 패도 있었다.
바로 그가 마법운용자라는 것이다.
“실라스크의 추적을 포함하여, 천려족이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종이에 남기지.”
“시간이 많습니다. 조율하는 즐거움이 있을 겁니다.”
이안은 방긋 웃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아직 멍하니 서서 상황을 지켜보는 의원을 돌아봤다.
“약, 안 달이십니까?”
“네? 아아! 예에. 갑니다! 가야지요!”
의원이 화들짝 놀라며 화분을 들고 일어섰다. 한 뿌리만 먼저 먹여서 효과를 지켜볼 셈이었다. 남은 것을 어떻게 쓸지는 나중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
후대를 위해 재배할 것인지, 아니면 호전 상태를 보고 윈첸에게 바칠 것인지.
“그럼 저도 이만.”
이안 역시 천막 입구를 걷었다. 카칸티르는 그를 붙잡으며 반쯤 기대하지 않은 채 물었다. 어느새 거칠던 말투도 많이 사그라져 있었다.
“이안 경. 중앙으로 가려는 것이, 황제의 정신과 관련이 있는 건가?”
카칸 입장에선 참으로 궁금한 아이다. 아비는 변방의 귀족인데, 정신은 황궁과 연관되어 있다? 분명 어미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쪽에 단서가 있는 것 같다. 이안은 그가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 그저 웃기만 했다.
바깥으로 나오자 일족들이 죄다 모여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나왔다!”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는데, 죽지 않았어.”
“오오오. 진짜네.”
이안과 베릭이 한 걸음 다가오자, 홍해처럼 인파가 갈라졌다. 그 가운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수였다. 이안은 그녀에게 다가가 부탁했다.
“수.”
“어? 어어.”
“시간이 남는다면, 우리를 좀 도와주겠나?”
“어떤……?”
당황스럽게 흔들리는 눈동자. 하지만 이내 이안의 말에 별처럼 빛났다.
“베릭 훈련.”
* * *
“멍청이! 굼벵이!”
“안 닥쳐?”
“사막 개미도 너보다는 빠르겠다!”
“와, 저게! 너 잡히면 진짜 코피 터질 줄 알아!”
촤아악-!
이안은 그늘에서 과일을 먹으며 모래바람이 이는 것을 지켜봤다. 베릭의 발길질과 수의 몸짓이 만들어내는 흔적이었다. 땡볕에서 벌써 두 시간째 뛰고 있는데, 둘 다 지치는 기색이 없다.
“베릭! 괜찮아?”
“뭐가?”
“…됐다.”
“말 걸지 마! X발!”
촤악!
확실히 습득하고 받아들이는 게 빠르다. 며칠 있었다고 더위에도 적응한 모양. 게다가 환경이 환경인지라, 모래는 훈련 강도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베릭. 너 정말 대박이다.”
“발이 자꾸 빠져서 그래!”
“아하? 그래? 난 안 빠지는데? 다리 살이 얼마나 덕지덕지 쪘으면 너만 빠지냐?”
“이거 근육이야! X!”
“네네. 그러시겠죠.”
쉬익! 쉭!
둘이 계속 합을 주고받는 동안, 이안은 달콤하고 시원한 과일만 우물거렸다. 천천히 공들여서 천려족을 포섭할 생각이었는데, 실라스크로 인해 아주 쉽고 빠르게 상황이 정리되었다.
브라츠로 돌아가는 그때까지, 이안은 대사막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아! 실로 얼마 만에 마음껏 쉬는 것이란 말인가. 신이 주신 진정한 선물은 이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안 님.”
그때, 일족 중 누군가 이안에게 다가왔다. 새 포도주와 이안의 화분을 쟁반에 든 채였다.
“윈첸 님께서 드디어 눈을 뜨셨습니다.”
“오. 그런가?”
윈첸은 이안에게 인사함과 동시에 혼절했다. 실라스크 달인 물을 조금씩 입으로 흘려보냈더니, 차도는 느리지만, 확실히 나타났다. 심박 수가 안정되고, 발작이 사라졌으며, 혈색이 돋아난 것이다.
“다행이군.”
“…감사합니다.”
이름 모를 일족이 조심스럽게 감사 인사를 남겼다. 마을 분위기가 눈에 훤했다. 축제 저리 가라겠지. 이안은 그저 잔을 홀짝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 빠른 시일 안에 이안 님을 정식으로 환영하는 연회를 열 것이라 합니다.”
“그래? 지금도 연회와 다를 바가 없는데.”
“…아무튼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가 이안 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별말씀을.”
“아차. 그리고 흙까지 통째로 옮기다 발견한 것인데요.”
그는 화분을 내려주었다. 빈 화분 안에 들어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목걸이였다. 은빛 줄에 호박색 보석이 달린.
“이안 님 것, 맞으시죠? 숨겨두신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