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20
제320화. 돌아갈 시간
비비안나는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흰 장갑을 낀 채로 손뼉을 두드렸다. 모두에게 집중하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작은 손님들은 발끝을 데롱거리며 기대하듯 숨 죽였다. 시끌벅적했던 전사들의 호탕한 웃음과 피아니스트의 선율까지 멈췄다. 짹짹거리는 새소리만 간헐적으로 울리며 평화를 전할 뿐.
“이제 식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름다운 부부의 시작점에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이로군요.”
“저희 또한 영광입니다!”
“필리아, 부족의 일원이 된 걸 축하하오!”
“그럼 너희도 바리엘 식구가 된 건가? 축하해!”
전사들이 잔을 들어 올리자, 베릭 역시 맞장구치며 잔을 치켜들었다. 비비안나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음료든 잔을 까딱였고, 이안은 옆에 앉은 작은 손님에게 잔을 건네주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우유를 가득 따라서.
“자리에 함께한 전사들, 그리고 필리아의 아름다운 아들에게 특히 더한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필리아와 네르사른, 모두가 보는 앞에서 운명을 맹세해 주세요.”
비비안나가 손짓하자, 피아니스트는 팔까지 걷어붙이고 따스한 음정을 누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휘파람과 탄성이 터졌다.
필리아와 네르사른이 마주 섰고, 사내는 연인의 베일을 조심스럽게 걷어 올렸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손이 달달 떨리는 게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네르사른 님, 베일이 그렇게 무겁습니까?”
“하하하! 돌아버리겠군. 카칸티르 님이 저 모습을 봤어야 하는 건데.”
평소의 네르사른이었다면 눈을 가늘게 뜨며 자중하라 일렀을 텐데, 그것조차 까맣게 잊었다.
오늘만큼은, 네르사른이기 전에 필리아의 연인이었으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바보스러워지는지, 모두가 생생하게 지켜보는 순간이다.
“네르사른 님.”
필리아가 수줍게 웃으며 손을 내밀자, 그는 오래된 반지를 끼워주었다. 빛바래고, 보석 하나 달려 있지 않은 것이다.
의아함을 느낀 헤일이 이안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반지는 저것이 답니까?”
대제국 마법부 장관의 어머니이신데 너무 소박한 것 아닌가 싶은 게다. 진 역시 궁금했는지 은근히 귀를 쫑긋거렸다.
“네르사른 님이 아주 어릴 때부터 끼고 있던 거라 하더군. 조부께서 만들어주신 거라고. 히엘로에 내려가서 카칸티르께서 반지를 하사해 주실 거라던데. 여기에 온 게 워낙 갑자기였던지라.”
아, 그렇지. 내란으로 인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자들 아닌가.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필리아는 아주 만족스러운지 연신 입술을 가져다댔다. 행복이라는 게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비비안나가 성혼 선언지를 펼쳤다.
“지금부터, 필리아와 네르사른은 서로에게 유일한 사랑이 되기로 맹세할 것입니다. 혹여 반대하실 분이 있다면 지금 말씀하시거나, 아니면 영원히 침묵해 주십시오.”
“지금 말해도 영원히 침묵당할 것 같은데요?”
“없습니다! 완전히 찬성합니다!”
“나도! 나도!”
하지만 유일하게 조용한 한 사람. 모두의 시선이 이안에게 집중되었다. 땅땅땅! 피아니스트도 건반 하나를 빠르게 치며, 아들의 대답을 종용했다.
이안은 두 손을 가볍게 든 채 웃었다.
“어머니가 행복하다면, 물론 찬성입니다.”
“그럼. 난 너무 행복해.”
필리아가 반지를 보이며 환하게 웃자, 비비안나가 잔을 들어올리며 공표했다.
“좋습니다. 필리아와 네르사른의 성혼이 성사되었음을, 자리한 모두가 보았습니다. 우리는 성스러운 증인이요, 옆에서 저들을 영원히 지켜볼 친우이니. 다 함께 축배를 듭시다.”
“축배를 들어라!”
“으아악! 뽀뽀한다! 뽀뽀!”
“아이고, 아기들은 눈 가리자.”
“싫은데요? 방금 선언에서 지켜보라고 했잖아요!”
쨍! 째앵!
잔끼리 맞부딪치면서, 나름 숨죽였던 소란이 터지고 말았다. 전사들은 네르사른 놀리는 것에 진심인지, 연신 농담을 멈추지 않았으며, 베릭은 의자 위로 올라가 쥔 술병을 흔들어댔다.
“내가 한 곡 할게! 이런 날 빠지면 안 되지!”
“거하게 해봐라! 응!”
쿵쿵! 쿠웅!
발까지 굴려가며 박자를 맞추자, 전사들이 손뼉으로 화답했다. 우렁차게 긁어대는 베릭의 노래. 다들 어이없어 진심으로 터지고 말았다.
“…저 새끼 끌어내.”
“엉망진창이네. 무슨 자신감이야?”
“아, 놔! 놔보라고! 뒷부분은 괜찮아!”
“연주자님, 쟤 무시하고 계속 피아노 쳐줘요.”
연주자가 베릭의 소리를 지워내려는 듯, 건반을 있는 힘껏 두드려댔다. 하나둘씩, 자연스럽게 테이블 주위에서 춤추며 돌아다니는 전사들. 주인공인 필리아 옆에는 아이들이 빙글빙글 돌며 환호성을 질러댔다.
필리아는 어색하게 드레스 자락을 흔들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안이랑 거기 옆에, 음, 작은 손님도 춤추고 싶으면 그리해. 좋은 날이니까.”
비비안나와 춤추던 로만드로가, 이안의 어깨를 쿡 찔렀다.
그러자 되려 당황한 진. 허물없이 뛰어노는 아이들이 조금 부럽다고, 아주아주 조금 생각했을 뿐인데. 들킨 기분이었다. 혹 가면 아래로 표정이 보이나? 괜히 겉면을 더듬거리기만 했다.
스윽.
이안이 웃으며 일어나자, 헤일은 충격 먹은 것처럼 멈칫거렸다. 그 이안이 지금, 춤이라도 추려는 겐가? 그 이안이?
“연주자. 내가 한 곡 할 터이니, 좀 쉬시오.”
그럼 그렇지. 그 이안이 그럴 리 없지.
이안은 연주자에게 피아노를 내어달라 부탁하고 대신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기억을 떠올려 손가락을 움직였다.
부드러운 봄바람과 같은 연주다.
살랑살랑, 저절로 고개가 기울여지는 그런 음악.
“이안 님이 피아노도 칠 줄 아는군요.”
“수준급입니다. 와, 정말 듣기 좋아요.”
언제부터? 필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브라츠에서 양자 교육받았던 나날을 떠올리고 쓰게 웃었다. 그때 배운 것이리라.
“아가.”
필리아는 홀로 앉아있는 진에게 손짓했다. 괜찮다면 이리 와서 함께 춤추자는 듯이.
진은 당황하여 손끝만 꼼지락거렸다. 사교계에서 추는 것들을 익혀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어울리는 법은 배우지 못하였으니.
보다 못한 동네 꼬마 중 한 아이가 진에게 달려가 팔을 잡아끌었다.
“어? 어어?”
“뭐 해? 끼어줄 때 같이 놀아야지.”
고만고만한 아이들 사이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말았다. 진은 우스꽝스러운 아이들의 몸짓을 보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이내 필리아와도 손잡고 빙글빙글 돌며 음악을 즐겼다.
베릭이 난입하여 끼어들자, 전사들은 술이나 먹자며 멱살을 잡아끌었고, 이안은 그 모습을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았다.
아이는 모를 것이다.
“아하하하!”
지금 처음으로, 자신이 큰 소리 내 웃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안 역시 모를 것이다.
“이안이 봐봐.”
“어우, 저렇게도 웃네.”
스스로 보기 드문 웃음을 짓고 있다는 걸.
* * *
타닥타닥!
히이잉!
저녁 거리를 내달리는 마차 한 대.
마부석 뒤에는 황궁 마법부 소속임을 알리는 깃발이 꽂혀있었다. 일몰이 내려앉은 주택가였으나,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유독 도드라졌다.
“저쪽입니까?”
“그런 것 같소. 가까이 붙어 내려주시오.”
마부는 마법사의 부탁에 고삐를 바짝 쥐었다. 로만드로의 저택 앞에는 이미 마차 두어 대가 서 있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채 주위를 둘러보는 마법사. 그는 조심스럽게 현관 앞 종을 흔들어댔다.
딸랑-
쿵! 쿵쿵!
“계십니까?”
정원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아직 아무도 잠들지 않은 게 분명하다.
곧이어 열리는 문.
베릭이 얼큰하게 취해서는 코를 킁킁거렸다.
“뭐여? 어디서 왔는데?”
“이안 님이랑 로만드로 님 여기 계시지? 마법부에서 나왔다. 서둘러 불러주어.”
“어, 잠만. 이안아아아! 로마아안!”
베릭이 소리치자, 테이블에서 술 마시던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의 로만드로도 마찬가지. 가볍게 취한 이안과 달리, 로만드로는 반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마법부에서 사람 왔다.”
“무슨 일이지?”
“이안 님, 로만드로 님. 휴가 중에 죄송합니다.”
평소와 다르게 셔츠만 가볍게 입고 있는 모습. 팔도 걷어붙인 것으로 보아, 완벽하게 자리를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이안은 마법사가 건넨 서신을 받았다.
“이게 무엇이지?”
“수상님의 전언입니다. 꼭 직접 전달하라는 명을 받아서 이리 왔습니다. 자세한 것은 들은 바 없고요.”
“지금 입궁하여야 하는가?”
“아닙니다. 대신, 내일 아침 일찍 회의를 연다고 하십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몸 상태가 안 좋아 오늘 일정을 모두 취소하였거든요.”
마법사의 말에 로만드로가 뒤를 힐끔거렸다. 그 황태자 전하, 지금 동네 꼬맹이들이랑 보드게임 중이시네, 하는 말이 목구멍으로 치솟았다.
이안은 손끝으로 서신의 두께를 가늠하며 중얼거렸다.
“내일 아침이면, 휴가 반납이군.”
“송구합니다. 취임하고 처음이신데.”
“되었다. 네가 송구할 게 무엇 있어. 조심히 가거라.”
“예. 이안님. 회의 준비는 미리 해놓겠습니다. 궁에서 뵙지요. 그럼.”
끼이익.
쿵!
휴가를 이틀 내었는데, 그조차 다 채우지 못하다니! 로만드로는 이럴 줄 알았으면 덜 먹을 걸 그랬다며 툴툴거렸다.
찌익, 이안은 봉투를 찢어 내용을 살폈다.
“왜 그러는 가, 이안?”
“확실히 수상께서 연락하실 만합니다.”
이안은 벽에 기대어 중얼거렸다. 조금 성가신 일임을 알아챈 것이다.
“클리포포드 사절단의 귀국 일정에 차질이 생긴 것 같다 하는군요.”
“뭐? 클리포포드에? 그쪽에서 연락이 온 건가?”
“아닙니다. 인근의 경비대가 급파로 보고를 올렸다 해요. 밤중에 영지 밖에서 소란이 일어 확인해 보니, 도적의 흔적이 여실했다고 합니다. 그 위치하며, 시일이 클리포포드의 귀국 일정과 일치한다는군요.”
“그러면! 크, 노아 왕자가 도적을 만났다고?”
로만드로가 경악하며 두 볼을 그러쥐었다. 엄청난 사안 아닌가? 귀빈들이 귀국하다가 바리엘 영지 내에서 도적을 만났다니!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거였다면 차라리 다행. 의문 없이 뒷수습만 하면 되니까.
“클리포포드가 습격을 받은 건 분명해 보이는데, 문제는 당사자가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클리포포드 쪽에서는 문제없이 국경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전서구가 들어왔답니다.”
“그, 뭐야?”
“그러니까요.”
로만드로가 이해 안 간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황상 확실한데, 오히려 아니라고 주장한다니.
클리포포드 입장에서는 오히려 바리엘에게 사사로운 것이라도 문제를 제기하는 게 이득이었다. 곧 있으면 동맹을 앞두고 있었으니,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서 그만한 전략이 또 어디 있겠나?
“이해가 안 가.”
“수상께서도 그리 생각하셔서 회의를 소집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안은 슬쩍 웃으며 서신을 곱게 접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로만드로는 알 수 있었다. 이제껏 모셔온 자신의 상사 아니신가.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안의 낯을 살폈다.
“뭐지? 이안?”
“뭐가요?”
“어찌 내 눈에는 자네가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으음?”
“많이 취하셨나 봅니다.”
“아닌데? 나 안 취했는데?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서 일러주게.”
이안은 종이를 주머니에 넣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저 멀리, 제 또래 아이들과 웃고 떠드는 작은 손님을 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한숨 섞인 지시였다.
“이제 아이들은 집으로 돌려보내는 게 좋겠어요. 헤일에게 부탁하여, 작은 손님들을 모시라 하지요.”
시아오시가 있지만, 해가 지고 있지 않나.
분위기에 취한 필리아가 손을 흔들자, 이안 역시 손을 흔들었다. 가면 쓴 아이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밤이 옵니다. 돌아갈 시간이지요.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