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21
제321화. 동이 트다
서늘한 새벽 공기를 헤치며 마차가 들어섰다. 임명식이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서 그런 것인지, 평소 밤낮 가리지 않고 환하던 마법부조차 곤히 잠든 새벽이다.
마부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객실 쪽 창문을 열었다.
단정한 자세로 창가에 기댄 채 잠든 이안. 그리고 괴로운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리고 기절한 로만드로. 너무 피곤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마부는 잠시 고민했다.
“…저기, 도착했습니다.”
“흡! 허억, 그래. 도착.”
아주 작은 속삭임에도 기민하게 반응하는 두 사람이었다. 로만드로는 경기 일으키는 것처럼 깨어났고, 이안은 눈만 살짝 떴다.
낮부터 밤까지, 온종일 웃고 떠들며 마셔댔던 하루의 다음이다. 출근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그리했건만, 이럴 줄은 몰랐다. 로만드로는 찌뿌둥한 어깨를 돌려대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으아아, 죽겠네! 죽겠어! 작작 마실걸.”
“전언 들은 뒤로는 안 드셨잖습니까. 어쩔 수 없지요. 자네도 수고했네. 교대자를 불러오고, 들어가게.”
“바로 나오십니까?”
“서류만 챙길 것이다.”
이안은 마부에게 서둘러 들어가라는 듯 손짓하곤 마법부로 들어섰다.
텅 빈 로비. 당직들을 제외한 마법사들도 오랜만에 ‘퇴근’이라는 것을 즐기고 있음이라. 저 멀리, 머리를 벅벅 긁으며 걸어오는 헤일이 보인다.
“헤일.”
“아, 이안 님. 오셨습니까. 피곤하시겠습니다.”
“마차에서 눈 붙였더니 괜찮다. 어린 손님들은?”
헤일은 이안의 지시로 어린 손님들의 귀가를 담당했다. 그중 특별히 신경 썼던 자는 당연지사, 가면 쓴 아이.
어색하게 궁으로 들어갔던 황태자의 뒷모습이 유독 인상 깊었다. 아닌 척하기에는 정체가 들통났고, 황태자임을 시인하기에는 너무 즐겁게 놀았으니까.
헤일이 궐련을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습니다. 안전히 들어가셨습니다.”
“그래. 그러면 되었다.”
이안은 회중시계를 확인하며 그를 지나쳤다. 저택에서 준비를 다 하고 온 터라, 자료만 들고 다시 나가면 된다. 로만드로는 질질 끌리는 발걸음으로 이안의 뒤를 따랐다.
사락.
마법사가 준비한 회의 자료는 책상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이안은 잠시 서서 그걸 훑어보았고, 이내 로만드로에게도 숙지하라는 듯 넘겨줬다.
“로만드로 님. 눈 제대로 뜨고 읽어보십시오.”
“응? 나 지금 눈 감고 있나?”
“예. 두쪽 다요.”
이상하네. 그럴 리가 없는데.
로만드로는 손등으로 눈두덩이를 비빈 다음, 정신을 집중하여 서류를 살폈다. 급하게 소집하는 회의치고는 꽤 상세한 보고였다. 지방 경비대의 상세한 전언을 바탕으로 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회의에 들어가기 전, 저희끼리 짚고 넘어갈 게 있습니다.”
“잠시만. 일러주시게.”
몽롱한 와중, 로만드로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수첩을 꺼냈다. 그는 펜을 단단히 잡고 다시금 눈을 끔뻑였다.
“경비대 쪽에서는 클리포포드가 도적의 습격을 받은 게 거의 확실하다고 보는 중입니다.”
“마침 그곳이 들판이 아니라 숲 아래쪽이라 더더욱 그리 여기는 것 같아. 아무래도 이런저런 흔적이 다채롭게 남으니.”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죠.”
“무엇을?”
“단순한 행상인 무리도 아니고, 일국 지도자의 귀국 행렬입니다. 어지간한 도적 떼라면, 길목에서 지키고 있었다 한들 부담스러워 건들지 못할 규모란 말입니다.”
“그, 그렇긴 하지.”
호위병들이 한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사사로운 짐꾼과 시종들을 합하면 백 단위가 훌쩍 넘어가는 사람 수였다.
지금 바리엘에서 파악한 도적 무리 중, 그만한 세력에 맞붙을 만한 놈들은 없다. 심지어는 이안이 지나온, 도적의 피해가 극심하다는 카렌나 지역에서조차 쉬이 덤비지 못할 터.
로만드로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반쯤 감겨있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렇다면 혹 도적을 만난 건 사실인데, 별다른 피해가 없어서 멈춤 없이 돌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바리엘에 사실을 알리면 조사니 뭐니 하여 늦춰질 게 분명하지 않나. 노아 왕자의 상태도 좀 그렇고, 서둘러 돌아가고 싶어 에둘렀지 않았나 싶어.”
“그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리엘과 동맹을 앞둔 지금, 국경을 벗어나기 전 그런 일을 당했다면 필시 공론화하려 했겠지요.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입장을 취하기 위해서요.”
피해가 없었더라도 드러누워 어떤 식으로든 보상해 내라 했을 터.
하지만 클리포포드는 되려 어떤 반응도 보이질 않고 있었다. 보고서에 올라온 노아 왕자의 전언은 아주 짧고 간결했으니.
-우리는 문제없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귀국하여 아버지께 바리엘의 의중을 전하고, 만남의 시일을 고민하도록 하겠습니다.
의심스러웠다. 아무리 사소해도 일국 왕자의 안전과 관련된 일이다. 자신이 노아였다면, 무슨 일인지 되묻고 확실하게 인지하려 했을 터.
로만드로는 펜으로 물음표만 그려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황궁 차원에서 조사가 필요하긴 하군.”
“회의에 가면, 아마 버고스가 거론될 것입니다.”
이안이 슬슬 나가자는 뜻으로 문손잡이를 잡았다. 클리포포드의 입장이 어떠하든, 바리엘 경비대의 소견으로는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걸 만들어낼 수 있으려면, 오합지졸의 도적들로는 불가하지. 비슷한 체급끼리 얽혔다고 보는 게 맞지 않겠나?
“…버고스. 그래! 버고스면 동기도 있지. 카켈, 금빛 다이아몬드가 클리포포드로 넘어갔으니 도적을 가장하여 되찾으려는 수작일 수도.”
보석들이 지닌 의미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세공된 광물이 아니라, 다몬의 입지와 귀족의 결속 그리고 나아가서는 정세의 흐름을 결정짓는 것이었으니.
무모하긴 해도 영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복잡하게 스며든 이해관계를 뒤로 미루고, 확실하게 보석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였다.
“이놈들, 처음부터 내가 마음에 안 들었지. 진상을 조사하여 명명백백 밝힘이 맞겠어. 아주 혼쭐을-”
“글쎄요.”
감히 바리엘 제국을 속이려 들었다며, 로만드로는 허공에 분노의 삿대질을 해댔다. 이안은 그의 손가락을 살포시 내려주었을 뿐.
“잘 생각해 보십시오. 버고스가 보석을 탈취하려 했다 합시다. 이는 이견 없이 바리엘에 대한 적대적 행동이지요. 병력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명분입니다.”
바리엘의 영토에서, 황태자가 내어준 보석을 무력으로 탈취? 클리포포드를 몰살할 계획이 아니라면, 단박에 드러날 사실이다.
“혹여 그럴 의지가 있었다면, 바리엘 안에서 그럴 게 아니라 국경 넘어서 했겠지요. 또한-”
버고스와 클리포포드 그리고 바리엘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더더욱 불가했다.
3국의 동맹을 끌어가고자 했던 다몬에게, 노아와 이안의 동맹은 상당한 부담. 여기서 노아가 보석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그 입장이 어떻게 되겠나?
“황태자가 보증금으로 내어준 보석을 잃어버렸고, 하필 그것은 세상에 둘도 없는 것이지요. 클리포포드에 대한 바리엘의 영향력이 더욱 짙어질 겁니다.”
“그렇긴 하지. 자, 잡아 먹혀.”
“…표현이 이상하지만, 정정하진 않겠습니다.”
보석을 빌미로 클리포포드를 옥죌 것이다. 이는 동맹을 넘어선 완벽한 결속. 이것을 감내할 만큼, 보석의 값어치가 있는가?
“버고스의 귀족들은 어쨌거나 버고스에 속해있지요. 내부에서 처리 가능한 사안. 클리포포드를 완전히 내어주면서까지 돌보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접경한 나라이지 않습니까. 그곳에 바리엘의 입김이 세진다면, 버고스는 더더욱 말라갈 터.”
다몬 왕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이려다 말았다. 괜한 사족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로만드로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멈칫하다가, 재빨리 이안의 뒤로 따라붙었다. 무엇이 진실인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
“다몬 왕이 클리포포드와 바리엘의 관계를 알아챘다면? 그래서 3국 동맹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클리포포드를 잘라내기 위해 습격하였다면?”
유연하고 다양한 사고(思考) 확장은 상당히 중요했다. 하여, 로만드로는 계속해서 가설을 내밀었고, 이안은 계단을 내려가며 반론했다.
“그랬다면 노아 왕자가 전서구를 무사히 보낼 수 없었겠지요. 클리포포드를 잘라내려 했다면, 이른 시일 내 격돌을 의미하는 것 아닙니까. 노아 왕자를 살려 보냈을 리 없습니다. 아니, 무조건 처리하는 게 맞지요. 바리엘 영지 내에서 노아 왕자가 죽었다면, 클리포포드를 제 편으로 잡아챌 가능성이 생기는 거니까.”
“거참, 알다가도 모르겠네! 어, 출발 준비합세!”
머리 굴리다 보니 잠 깨서 좋은데, 한편으로는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로만드로는 기둥을 짚은 채, 계단 아래 마부를 불렀다.
멈춰선 로만드로를 보던 이안. 저 멀리 동트는 것을 보며 중얼거렸다.
“…로만드로 님.”
“우욱. 베릭 이놈이 폭탄주에 이상한 걸 탄 것 같아. 원래 내가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든.”
이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거 같이 마셨는데요, 하는 눈빛. 그는 농담을 삼키곤 나지막이 속삭였다.
“도적도 아니고, 버고스도 아니라면 말입니다. 당연히 루스웨나도 아닐 가능성이 있지요.”
“버고스와 루스웨나는 제대로 손잡았으니.”
“하면, 누가 남을까요?”
분명한 건 하나다. 혼란을 원한다는 것.
왕국 사절단과 맞먹을 만큼 세력이 거세고, 버고스와 클리포포드 사이에 끼어있는 존재.
로만드로는 눈썹을 가만 찌푸렸다. 여명이 터오는 하늘. 바람이 불며 이안의 금빛 머리칼이 흔들렸다. 그리고 저 멀리, 위용 넘치는 바리엘의 제국기 또한.
“지금 이안 자네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주시할 필요는 있습니다.”
황궁 내 누군가가 가담한 소행. 모든 게 순조로이 나아가던 중, 이를 방해하기 위한 수작질이라.
로만드로는 밝아지는 하늘의 변화를 눈에 담으며 대답했다.
“주, 주시는 당연히 하면 좋지. 하지만 누가 나라 간의 관계를 어그러트린단 말인가? 어째서?”
“그 답은 국경으로 나아가고 있는 클리포포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석을 제대로 품고 있는지를 보는 게 맞겠지요. 혹여, 사라졌다면-”
사라졌다면, 그다음을 생각할 수 없다.
버고스와 클리포포드 그리고 바리엘을 하나로 잇는 보석이다. 그 작은 반짝임이 어떤 파동을 만들어낼지…….
“제이럿 쪽일까?”
로만드로는 화들짝 놀라며 이안을 돌아봤다.
황궁 내, 이안의 견제 세력이 결집하고 있음은 모두가 암암리에 아는 터. 그걸 이안이 원하였다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누군가 기득한 상황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 여부는 반대파의 공격권으로 쓰일 수 있다.
“제이럿 대장은 신의 있는 자이지요. 정도(正道)를 걷는 자입니다. 특히 잘못했다간 되려 바리엘에 해가 될 수 있는 사안인데, 이를 묵인하고 이용했을 리 없습니다.”
“하긴, 대장이 그럴 성격은 아니지. 솔직히, 그렇게 하기도 힘들고. 아, 무시하는 발언은 절대 아닐세. 나는 그를 존경하고 있어.”
“압니다. 저 또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그때, 마부가 손을 크게 흔들었다. 출발 준비가 끝났으니, 언제든 내려와도 된다며. 이안은 로만드로에게 가자는 듯이 고갯짓했다.
“우선 회의에 갑시다. 저도 단편적인 정보로만 추론한 것이라, 모두와 의견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이른 시간이라 참석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요.”
“으응. 그래.”
로만드로는 속을 부여잡으며 한 발 떼었다.
그때, 문득 드는 생각.
회의에는 수상과 태자 전하를 비롯한 고위 관료들이 모인다. 개중에는 분명 이안을 견제하는 자가 포함되어 있지. 그럼에도 불구, 가서 이것을 논의하자는 것은…….
“이안.”
적어도 회의에 참석하는 자 중에는 경계할 자가 없다는 뜻이로다. 이안이 돌아보자, 로만드로는 서류로 제 얼굴을 덮으며 탄식했다.
“…마법사군.”
이안은 말없이 짧은 미소만 지은 채, 다시금 계단을 내려갔다. 때때로 침묵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주는 법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