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30
제330화. 클리포포드 입성
얼마나 내달렸을까.
하늘에 노을이 내려앉는 시간. 계속되는 질주에 지루해진 베릭이 인상을 찌푸렸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울창한 수풀밖에 없는데, 제대로 가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이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앞서 나아가는 노아의 뒷모습을 보며 다들 그리 생각하고 있으리라.
결박당한 채 얹혀있는 필릭은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안 보였다.
“이보시오, 얼마나 더-”
마법사가 메이에게 물어보려는 순간. 노아가 고삐를 잡아당기며 속도를 늦췄다. 수풀을 빠져나온 것이다.
저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이 보인다. 자로 그은 것처럼 완벽한 일직선을 자랑하는 나무들. 굵직한 넝쿨과 탐스럽게 매달린 포도가 풍요롭게 늘어지고 있었다.
노을로 물든 푸른 이파리. 마치 붉은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밭 일부분을 적시고 있었으니.
“이곳이 클리포포드다.”
고개를 까딱이는 노아 왕자의 머리칼 역시 더욱 짙은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뒤로 클리포포드의 왕궁이 보인다. 높다란 상앗빛 돔들은 햇빛을 그대로 받아내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다.
데엥-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리자, 밭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습을 보였다. 신께 인사를 올리기 위함이다. 오늘도 성스럽고 신성한 노동을 완수하였으니, 신께서는 보시고 마음 깊이 기뻐하시라.
아- 오아-
그들은 손을 들어보이며 흥얼거렸다. 단순히 반복되는 음과 가사였지만, 듣다 보면 어쩐지 편안해지는 느낌이다.
밭 사이로 난 대로를 걸으며, 베릭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간혹 눈 마주치는 농부들이 모자를 벗으며 인사해 왔다.
“근데 어찌 밭밖에 없네. 사람들은 어디 살고?”
“여기는 외곽이니까요. 바리엘은 황궁을 중심으로 주거지와 상업지의 구분이 없지만, 클리포포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 바깥은 모두 농업지로 사용해요. 한정된 토지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매이가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손님은 손님. 그것도 클리포포드의 운명을 결정할 귀빈 아닌가. 그녀가 성심성의껏 설명하는 동안, 몇몇 농부가 노아를 알아보곤 기쁜 얼굴로 허리를 숙여댔다.
“멈추고 신분을 밝히시오.”
“왕실통행증이다. 문을 열라.”
“왕자님이십니까? 어찌 마차도 없이…….”
“사정이 있었으니.”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성벽 위에서 문지기들이 분주하게 움직여댔다. 곧이어 좌우로 젖혀지는 거대한 문. 그 틈으로 클리포포드의 삶이 한눈에 들어왔다.
끼이익.
바깥은 고요하고 성스러우며 자연 그대로였건만, 어찌 성문 하나 넘었다고 이런 별천지가 되나?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빙글빙글 춤추는 무리 사이로 술독 멘 상인, 아치형 지붕에서 담배 피우는 노인들, 깔깔거리는 웃음과 의미를 알 수 없는 노랫말, 건물 벽은 죄다 넝쿨로 덮여있고, 사방에서는 상큼한 포도 향이 진동했다.
“와, 뭐여!”
“한눈팔지 말고 바로 따라오십시오. 다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쉬는 시간입니다. 인파가 거리로 쏟아지니, 초행자는 길 잃어버리기 십상이지요.”
“이안아! 우리 일 보고 여기 나와서 한잔하자. 응?”
“베릭. 고삐나 제대로 잡아.”
이방인인 걸 알아챈 상인이 포도주 따위를 건네며 환영한다는 듯 손짓했다. 무리 중에 그걸 받아먹은 자는 베릭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들은 곧이어 왕궁에 당도했다. 사절단의 도착이 늦어져 걱정하던 차다. 귀환을 반기는 것도 잠시, 의아한 눈길로 뒤쪽을 힐끔거렸다.
“왕자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마차는요? 다른 사절들은 어찌하고 혼자 이리…….”
“저자들은 누구입니까?”
“우선 아버지를 뵙겠다. 이들은 바리엘의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와 그 부하들이다.”
“마, 마법사!”
“장관이시라고요? 그 장관 말입니까?”
시종들이 놀라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안을 비롯한 마법사들이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하자, 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손님맞이에 나섰다.
“이쪽입니다.”
본궁으로 안내받으며 가는 와중, 베릭이 키득거리며 이안에게 속삭였다. 노아랑 메이만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어쩐지 클리포포드 사람들이 다 비슷하게 생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안아. 여기 사람들 진짜 다 똑같다. 그치? 머리카락 색도 그렇고 실눈인 것도 그렇고.”
“쉬이. 베릭.”
이안이 자중하라며 언질하는 순간, 시종이 응접실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노아, 어찌 지금 와?”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요?”
“형님. 마차 없이 오셨다면서요? 무슨 일이십니까?”
열 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노아와 판박이인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와 왕자의 품에 안겨들었고, 이내 왕과 왕비가 모습을 보였다.
“헙.”
베릭이 놀라서 한마디 하려고 하자, 바르사베가 재빠르게 그 입을 틀어막았다.
가슴팍까지 오는 작은 키와 동글동글한 볼, 가는 눈매와 더불어 웃는 상의 입꼬리. 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친근하고 푸근한 인상이지 않나. 왕비 또한 거울처럼 닮아있다.
노아도 나이를 먹으면 저리 되나? 동생들은 꽤 귀여운데 말이지.
“바리엘의 마법부 장관, 이안 히엘로이시라.”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이리 결례를 범하게 되어 참으로 송구합니다만 워낙에 급한 일인지라. 용서를 구합니다.”
이안이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인사하자, 마법사들 역시 그를 따라 했다. 클리포포드 왕은 소파 쪽으로 손짓하며 손님 접대를 명했다.
“장관은 자리하고, 부하들은 여독을 잠시 풀지.”
“옆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시종을 따라 나가는 마법사들. 노아의 동생들 또한 눈치를 보더니 그를 쫓아 쪼르르 달려갔다. 클리포포드에는 마법사가 없다고 하니, 그 얼마나 호기심을 자극하겠는가?
“그래. 노아, 잘 다녀온 것이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만 조금 마른 것 같아서 걱정이로구나.”
“아닙니다. 아버지.”
“자아, 그러면 어서 일러보렴. 무엇이 바리엘의 장관을 이곳까지 오게 하였을까. 응?”
클리포포드의 왕은 생긴 것처럼 말투 또한 온화 그 자체였다. 왕이라기보다 자상한 아버지에 가까운 느낌. 아까 모여있던 노아의 동생들도 그렇고, 왕실 분위기가 상당히 좋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형제끼리 검을 겨누고, 아들이 아비를 헤치며, 어미가 자식을 죽이려 했던 바리엘과는 다르게.
“사실은…….”
노아는 임명식 기간 동안 있었던 일을 하나씩 일렀다. 고개를 끄덕이며 열심히 듣던 왕은, 저주가 들통났다는 대목에서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아버지.”
“…그러니까, 지금 이안 경이 왕가의 저주를 알고 있다고?”
“정확히는 저와 제 측근들이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 비밀을 유지 중이니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아직이라는 단어의 선택이 얼마나 많은 걸 내포하고 있는지, 그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다. 왕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노아가 고개를 떨구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아니, 아니다. 지금은 그걸 논할 게 아니니. 그래서? 그 이후로는 어찌 되었다는 것이니?”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어긋난 버고스와의 동맹, 비료 계약, 그리고 진이 하사한 금빛 다이아몬드와 습격, 이드갈까지. 왕의 낯빛은 어두워졌다가 파리해졌다가 하얘지는 등, 쉴 틈 없이 변하며 볼만한 재미를 주었다.
모든 보고가 끝나자, 응접실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수습 방도를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머릿속이 정지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결국, 이안이 먼저 침묵을 깼다.
“왕이시여.”
왕은 멈칫거리며 이안을 돌아봤다. 곱씹을수록 사태가 참으로 심각한 것이라. 버고스 측을 잘라낸 상황에서 바리엘과도 척을 지게 되면 클리포포드는 진정으로 고립된다.
“…말하시게.”
“이번 일은 참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자국을 생각하는 왕자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 역시 바리엘의 사람이자 황궁의 종인지라 쉬이 넘어갈 수 없지요.”
“결례를 인정하네. 클리포포드에서는 최선을 다하여 바리엘에 그 뜻을 보이겠어.”
왕이 그리 이르자 노아는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잘 해내고자 했는데, 결국 아버지의 입에서 저런 말까지 나오게 하다니. 참으로 비통하고, 비참하며, 한탄스럽기 그지 없다.
“저도 클리포포드와 바리엘의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걸 원치 않습니다. 이제 막 함께하여 한 발 떼려고 하는데, 고작 작은 장애물 하나로 갈라져서야 하겠습니까”
“그, 그리 말해주니 내 참으로 기쁘다.”
“하여, 바라옵건대. 바리엘과 계약 마법을 맺으시지요.”
계약 마법.
천금보다 무거운 것이 말 한마디라 하였다. 그 무게를 마법으로 형상화하여 심장에 새기고, 숨이 다할 때까지 이행하여 완전한 믿음을 보이는 것.
효과는 굉장했지만, 그만큼 신중히 할 필요가 있었다. 딱 한 번. 한 번의 맹세가 한 사람의 영원까지 이어지니. 물론 상호합의 하에 해지할 수도 있었지만, 마법까지 써서 묶어두는 판에 그게 쉬울 리 없었다.
“어떠십니까? 동맹에 의지가 있으시다면 클리포포드 입장에서도 상당히 괜찮은 제안 같은데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클리포포드가 우호적인 관계와 협조를 맹세한다면 자연스럽게 바리엘 역시 그리할 것이니.
“내가, 자네와 말인가?”
“어찌 제가 왕께 계약을 맺자 청하겠습니까. 제 주군께서는 황궁에 계시는데요. 우선적으로 계약을 맺을 거라는 계약을, 저와 맺으시지요. 그리고 노아 왕자님도 함께.”
계약을 위한 계약. 이안은 싱긋 웃으며 노아에게 고갯짓했다. 시일이 조금만 더 지나면 노아가 왕위를 이어받게 될 터이니, 저자 역시 엮어두는 게 당연지사 아니겠나?
“…내용은?”
“잠시 종이와 펜을 내어주시겠습니까?”
이안의 부탁에 왕이 눈짓했다.
빳빳한 고급 용지를 한 번 쓸어내리던 이안은 망설임 없이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노아 왕자와 나누었던 비료 관련한 계약 내용이었다. 토씨 하나 틀림없이, 완벽하게.
“본 계약은 이것이었습니다만,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귀책 사유는 알고 계실 터이니 따로 설명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어느 정도 말인가?”
“가격을 조정하지요. 버고스보다는 낮게 수출하겠습니다만, 이전과 같은 가격으로는 무리입니다. 자세하진 않지만, 기간 역시 조정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황궁과 논의하라며 한 발 빼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이안의 의도대로 될 것임을.
“그저 본계약이 이리될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자비를 베푸신다면 상당 부분 달라지겠지만요. 다음은 군사적 동맹에 관한 부분입니다. 각국에서 정의한 비상사태는 다음과 같습니다. 외세가 허가 없이…….”
이안이 펜을 놀릴 때마다, 왕과 왕자는 마른 입술만 축였다. 결국, 참지 못한 노아가 손으로 저지하며 그를 말렸다.
“그만. 어차피 본계약은 황태자와 맺을 것이라 하지 않았나? 미래의 것을 논하지 말고, 지금 그대와 할 것을 일러.”
이안은 싱긋 웃으며 펜을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할 말은 아주 간단하지.
“클리포포드가 바리엘과 우호적인 동맹을 맺는 것입니다.”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클리포포드 왕과 왕자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 동맹이란, 상호 합의적인 관계. 조율 과정에서 절대적인 갑과 을이 정해질 터.
하지만 여기서 계약을 거부한다면…….
‘주변국 사이에서 고립됨은 물론, 특히 바리엘에서는 보석 건을 통하여 명분을 확보한다. 다국 간의 전쟁 시, 클리포포드를 먼저 차지하려는 움직임이 생길 수 있어.’
거부한다면 끝없는 아수라장이다. 노아는 앞서 나서며 다시금 부탁했다.
“계약은 나와만 해도 충분하지 않겠나? 아버지는 클리포포드의 왕이시니, 황태자와 하는 것이 격에 맞아.”
“안 됩니다. 왕자님은 책임감이 너무 강하세요.”
너무 강하여, 스스럼없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자. 계약을 맺었다가 그가 자결이라도 하면 낭패이지 않나?
“대신 클리포포드 쪽도 득이 있어야지요. 어디까지나 계약이니까요. 바리엘과 우호적인 동맹을 맺겠노라 맹세하신다면, 왕가의 저주에 대해서는 절대 함구를 약속합니다.”
왕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잘 생각했다는 듯 소매를 우아하게 걷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게 손을 맡겨주시겠습니까?”
“아, 아픈가?”
“그럴리가요.”
지이잉. 지잉.
이안이 마력을 발동시키자, 맞잡은 두 손에서 환한 빛이 새어나왔다. 긴장한 왕과 달리 이안은 연신 웃으며 그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리고 마법을 발동하려는 순간.
“……!”
콰악!
수천 개의 바늘이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으니.
이안은 저도 모르게 왕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온몸의 충격이 엄청났다.
“이, 이안 경?”
“허억, 허억…….”
“왜, 왜 그러시는가?”
“밖에! 밖에 누구 없는가?”
“가서 마법사를 불러오라! 왜, 왜 갑자기…….”
장기가 갈가리 찢기는 고통.
이안은 정신이 아득해짐과 함께 원인을 알아챘다. 서자 이안이, 이미 이전에 누군가와 계약 마법을 맺은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