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31
제331화. 이드갈을 쥐는 자
적당히 시원한 온도와 달짝지근한 냄새, 보드라운 천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음악. 따로 안내받은 마법사들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편히 기댄 채로 고단함을 달랬다.
정신 차리고 보니 국경을 넘어 클리포포드 왕궁 입성이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었다. 마법사는 아직도 꽁꽁 묶인 채 엎어져 있는 필릭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이게 다 따지고 보면 저 새끼 때문에 하는 고생 아녀? 오트릭, 이제 말해봐. 필릭이 대체 뭘 어쨌는데?”
“나도 자세히 모른다니까.”
“오트릭한테 말 걸지 마. 쟤 또 운다.”
“안 울거든? 아까는 놀라서 그래!”
마법사들이 투덕거리는 와중, 베릭은 왕궁이 내어준 과일을 주워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포도 나라라는 명성에 맞게, 알 하나하나가 꿀처럼 달고 새콤한 것이 썩 일품이지 않나.
“다들 그럴 시간 있으면 배부터 채워. 집에 안 가?”
“포도 몇 알 먹는다고 채워질 마력이 아니거든.”
“그래? 그럼 내가 다 먹을게. 아, 이 집 잘하네.”
와앙, 베릭이 포도송이를 통째로 입에 넣으려는 순간.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인기척 없이 좌우로 젖혀지는 문. 땀과 피로 흠뻑 젖은 시종 한 명이 아연실색한 낯으로 숨을 헐떡였다.
벌컥!
“저기, 크,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 이안 히엘로 장관께서…….”
이안이라는 이름이 거론되자마자, 베릭이 먹던 것을 내던지고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시종에게 덤벼들 것처럼 달려들었다.
채앵!
바르사베가 검으로 그 앞을 막아 쳐냈다. 질겁한 시종은 비틀거리며 주저앉아 버렸다.
“베릭. 진정해.”
“이안이가, 왜!?”
“그, 그것이…….”
“X발, 어버버 하지 말고!”
놀란 마법사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로브를 챙겼다. 제아무리 마법사라고 한들, 이곳은 바리엘이 아니라 클리포포드다. 또한, 노아 왕자는 이드갈로 자신들을 견제하려고 했었지.
“이, 이안 님이 쓰러지셨습니다아아!!”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시종은 팔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마치 마지막 발악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자 베릭이 검을 내리며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이전에도 몇 번 쓰러지긴 했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상태는 괜찮아 보였는데?
“뭐? 어째서?”
“그, 그건 저희도 모를 일이라, 전하께서 서둘러 마법사님들을 모셔오라고…….”
“진작 그렇게 얘기할 것이지!”
“으앗! 잠깐, 제가 걸을게요!”
“닥쳐! 다들 빨리! 어디로 가?!”
“오른쪽! 오른쪽으로 꺾으십시오! 으아악!”
베릭이 시종을 어깨에 들쳐 메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르는 마법사들. 바깥으로 나가니, 왕궁의와 그 조수들이 줄지어 걸음 하는 게 보였다. 어수선하면서도 다급한 모습으로 보아, 제대로 사달 난 것이라.
타닥타닥!
활짝 열린 응접실.
문 앞에 도착한 베릭은 놀라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바닥은 피로 흥건하여 바다를 이루었고, 옆으로 쓰러진 이안의 안색은 시체라 할 정도로 창백했다.
스르륵, 시종을 떨구고 그에게 다가가는 베릭. 말문이 턱 하고 막힐 정도다. 자신이 아는 이안이 맞나? 이안이라면 이럴 리가 없는데?
“이, 이안아. 너 왜, 왜 그래?”
“아…….”
“이안아. 정신 좀 차려봐.”
식은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로 이안의 눈가가 젖어있었다. 정신이 온전치 않은지, 그는 앓는 소리만 내며 손을 휘저었다. 베릭이 단단히 붙잡아주었지만, 그것마저 고통에 묻혀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헉, 이안 님!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피, 피가 대체…….”
“피 좀 멈추게 해봐! 피!”
마법사들이 이안에게 달려가는 반면, 바르사베는 노아 왕자를 주목했다. 그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바르사베는 검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으며 일렀다.
“왕자님. 무례함을 알고 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자초지종을 말씀해 주셔야겠습니다.”
황궁친위대가 마법부를 견제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이안은 바리엘의 마법사이자 장관이었고, 자신은 그를 감시 및 호위하기 위해 이리 조사단에 참가한 것이지 않나?
노아는 두 손을 들어보이며 결백을 일렀다.
“정말 모르는 일이다. 계약 마법을 맺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저렇게 쓰러졌다고.”
“계약 마법이요?”
“그래. 바리엘과 클리포포드가 우호적인 동맹을 맺고자 하는 계약. 맹세코, 우리는 책임이 없어.”
바르사베가 눈을 흘기자, 왕궁 병사들 역시 검에 손을 올렸다. 팽배하게 맞서는 대립. 클리포포드의 왕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 어깨 너머로 이안의 상태를 살폈다.
여기서 이안이 죽으면 실로 곤란해진다. 일방적이었지만 마차를 두고서 무력 충돌이 한 번 있었고, 거기에 이어 마법부 장관이 클리포포드 왕궁에서 죽었다?
여지없다. 여지없이, 오해받을 것이다. 클리포포드에서 바리엘을 견제하기 위해 마법사를 처치하였노라고. 이드갈과 맞물려서 그 의혹은 더더욱 신빙성을 갖추겠지.
“어, 어떡해? 치유 마법 쓰는 사람이 없는데.”
“마력이라도 불어넣어 보자. 왕자님. 왕궁에는 마법사가 한 명도 없습니까?”
“…아쉽게도.”
숨을 내뱉을 때마다 이안이 피를 쏟아냈다. 무릎 꿇은 마법사들의 옷자락이 빨갛게 물들 정도로. 그들은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며 이안의 팔과 손 따위를 붙들었다.
지이잉. 지잉.
“다들 있는 거 다 쥐어짜.”
“이안 님.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맞습니다. 이대로 쓰러지시면 안 돼요.”
“젠장, 다들 집중해!”
일렁이는 마력의 흐름.
왕과 왕자를 비롯한 시종들이 멈칫거리며 그걸 멍하니 지켜봤다. 금빛으로 물드는 마법사들의 눈동자, 밀폐된 공간에서 살랑거리는 머리칼, 따스한 무언가가 살아있는 것처럼 주위를 휘감았으니.
“계속! 계속!”
“윽…….”
한 마법사의 코에서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이미 그들도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지 않나. 남아있는 마력이 없어서 포탈을 열지도 못했는데, 온힘을 다하려 하니 벌써 무리가 온 것이다.
마법사는 아무렇지 않게 손등으로 피를 훔쳐낼 뿐, 마력 넣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다들 뭐 하십니까? 움직이세요!”
“아, 예예! 따뜻한 물과 천을 새로 가져와라!”
바르사베의 외침에 의사들 또한 바삐 움직였다.
클리포포드의 왕은 참으로 경이롭다는 듯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법의 힘이 위대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다수에 의해 행해지니 마치 기적을 목도하는 기분이다.
노아가 제 아비의 팔을 붙잡으며 속삭였다.
“아버지. 아버지는 먼저 자리를 뜨심이 어떠신지요.”
혹여, 지금 이안이 죽게 된다면? 왕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문제 될 여지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저 마법사와 마검사들이 흥분하여 무력 충돌이라도 벌어진다면, 왕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클리포포드의 왕은 제 아들의 손등을 토닥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아. 걱정은 알고 있다만, 그럴 수는 없다.”
“하지만, 아버지.”
“클리포포드 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내가 책임이고, 소임이니. 걱정하지 말고 가서 동생들과 함께 있어. 소란으로 인해 불안해할 것이다.”
왕의 명령에 노아가 마지못해 걸음을 떼었다.
천천히 닫히는 응접실의 문. 마지막으로 보이는 것은, 각혈하는 마법사들과 그 가운데서 영원히 잠든 것처럼 누워있는 이안 그리고 무릎 꿇은 채 울상인 베릭이었다.
끼이익.
쿵!
문이 닫히자, 노아는 잠시 이마를 매만지며 고민했다. 이걸 바리엘에 알려야 할까? 이미 국경선에서 이안이 전서구를 날려 보내지 않았던가?
하나, 그 내용을 짐작할 수가 없으니. 이안의 상태를 알렸다가 바리엘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할 수 없었다.
“미치겠네.”
노아는 벽을 내려치며 중얼거렸다. 마법사 견제를 위해 이드갈을 받아내려 했던 게, 이렇게 꼬일 일인가? 그는 성난 발걸음으로 몸을 돌려 시종들에게 물었다.
“묶인 채로 왔던 마법사, 그 필릭이라는 놈. 어디 있어?”
“손님들이 계셨던 응접실에 있을 겁니다.”
“따라와. 그쪽으로 간다.”
왕의 명령에 소집되는 왕궁 시중들을 거슬러 지나치며, 노아는 방치 중인 필릭에게 향했다.
* * *
진은 턱을 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부터 소집된 긴급회의에 오전‧오후 일정이 모두 취소된 탓이었다.
필리아의 약혼식이 고작 어제저녁인데, 어쩐지 아주 먼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지금쯤 무엇 하고 있을까? 듣자 하니, 천려족의 축하 풍습은 하루 이틀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던데. 아마 오늘 저녁도 술과 고기 따위로 즐겁게 지내리라. 동네의 꼬마들도 갔으려나?
똑똑.
“전하.”
잡생각에 매몰되어 있던 진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틀었다. 한 쪽도 넘어가지 않은 책장. 진은 서둘러 종이를 뒤적거리며 응했다.
“무슨 일인가?”
“국경에서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이안 경이 보낸 것 같은데, 확인해 보심이 어떨지요. 수상도 이를 전해 듣고 막 도착했습니다.”
바깥은 땅거미가 내려앉아 있었다. 늦어진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전서구로 인한 전언이라니. 무언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진은 책을 덮은 채 들어오라 허락했다.
끼이익.
“전하. 갑작스레 찾아와 송구합니다.”
“무슨 소리. 이안 경이 전서구를 보내왔다고?”
“예. 여기 있습니다.”
수상의 눈짓에 시종이 금쟁반에 쪽지를 내어 건넸다. 꼬깃꼬깃한 것이, 이걸 적어 내릴 때의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는 걸 짐작게 했다.
-클리포포드의 마차와 접선하였습니다. 도적의 습격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마차에 문제가 생긴 것은 맞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보석이 분실되었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클리포포드 왕을 알현하고자 합니다. 로만드로에게 제가 맡겨둔 서류를 받으시고 검토하여 주십시오. 동맹 내용에 관한 것인데, 바리엘에 유리한 쪽으로 다시 수정하시어 준비해 주십시오.
보석이라고 하면 버고스에서 진상한 금빛 다이아몬드를 뜻하는 것이다.
“역시 버고스인가?”
“아니요, 전하. 그랬다면 이안 경이 그 부분을 확실히 짚어주었을 것입니다. 뒷장도 있으니 보시지요.”
-이드갈을 제조하는 상단 조사가 필히 필요합니다. 무슨 의도인지는 아직 모르겠다만, 클리포포드에 이드갈을 무상에 가까운 대가로 공급하려 했습니다. 버고스와 루스웨나 측도 조심해야겠습니다.
진은 내란 당시 이드갈의 효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당사자였다. 마리브가 쏜 화살에 무력화되었던 마법사들. 주변국에 이드갈이 공급된다면, 바리엘이 가진 거대한 힘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드갈…. 마법부에서 연구한다고는 들었습니다만, 그 상단이 생각보다 넓은 범위로 움직이는가 보군요.”
“로만드로를 불러야겠다. 밖에 누구 없는가? 시아!”
“네. 전하.”
진이 시아오시에게 명하는 와중, 수상은 심각한 얼굴로 쪽지만 내려다봤다. 세월이 깊게 베인 눈주름이 그의 시선을 따라 조금씩 움직였다.
“전하.”
그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진이 고개를 틀었다. 수상은 아주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이드갈 조사는 마법부에 맡길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조사단을 꾸려 전하께서 직접 하시는 게 어떠하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마법부에서는 이드갈 제조자들을 척결하려 하겠지요. 당연한 이치입니다. 마력봉인석과 같은 효능을 지닌 것인데, 그 수가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마법사들에게 부담이니까요.”
이드갈을 쥐는 자가 마법사의 목숨줄을 쥔다.
이는 황궁에 기거하는 이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
“타국에 공급되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 하지만 황궁이 직접 관리한다면 말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수상.”
“전하께서 통제하셔야 합니다. 마법부를 견제할 아주 좋은 수단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