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32
제332화. 일촉즉발
황제 이안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끝없이 타오르는 벽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희멀건 피부가 따뜻하게 물들고, 서늘한 인상의 눈매 역시 녹아드는 듯했다.
그날은 그가 처음으로 전쟁에 나갔다가 승전보를 갖고 돌아온 밤이었다. 바깥에서는 바리엘의 승리를 축하하는 소란이 들려왔으나, 이안의 집무실은 적요하기만 했다.
“폐하.”
무기력하게 고개만 돌리는 이안. 나움이 문에 비스듬히 서 있었다. 옆구리에 보고서와 상자가 들려있는 것으로 보아, 또 처리할 일이 들어온 게라.
하지만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일어나서 책상으로 가야 하는데, 힘이 나질 않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의지가 없다고 해야지. 황제라는 권위로,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 이안이 사람을 죽였으니까.
“괜찮으세요?”
“안 괜찮을 게 무엇 있어. 보고서인가?”
나움은 천천히 이안에게 다가가 무릎 꿇었다. 시선을 맞추자, 벽난로의 불빛으로 황제의 눈동자가 일렁이는 게 보였다.
과연 타오르는 불 탓일까? 아니면 어린 황제의 죄책감으로 인한 일렁임일까? 나움은 소파 아래로 늘어진 황제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정돈해주며 위로했다.
“폐하께서는 훌륭히 해내셨습니다. 바리엘 모두가 안도하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응당 치러야 할 대가가 필요한 법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래서 내가 그리했다. 죽이라 하고, 태우라 하고, 버리라 하였어.”
어린 소년 황제의 귓가에는 아직도 적들의 비명이 맴돌고 있었다. 살려달라 외치는 자들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고, 자신을 위해 막아서는 아군을 뒤로한 채 내달리는 혼돈. 나움은 안쓰럽게 고개를 기울이며 달래주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뎌질 것입니다.”
“무뎌지는 것 또한 무섭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폐하께서 다치십니다.”
나움이 이안의 오른쪽 손목을 붙잡았다. 무엄하게 걷어 올린 소매 안쪽에는 길게 베인 자상이 나 있었다.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넘길 수도 없는 상처다. 나움이 눈을 흘기자, 이안이 웃으며 변명했다.
“적의 수장 머리가 떨어지는 동안 나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노라, 그것이 바리엘의 자긍심 아닌가.”
“자긍심이되, 폐하를 갉아먹는 아픔입니다. 이런 것에는 무뎌지지 마세요.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 속앓이하는 것들은 모두 뱉어내십시오.”
상자에서 연고와 붕대가 나왔다. 함께 전장에 나섰던 나움은 모든 걸 알고 있었나 보다.
이안은 그에게 치료를 맡기면서도 여전히 벽난로만 바라봤다. 전장에서 타오르던 불길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으니.
“…황제의 눈물은 세상을 가득 채우고, 한숨은 세상을 무너트린다.”
“그러다 폐하께서 쓰러지면 세상이 쓰러집니다. 저는요…….”
이안이 너무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하여, 그때 이안을 말린 것이라 말하고 싶었다.
안 그래도 외롭고 힘든 황제의 길. 마음 터놓을 친우 하나 변변치 않은 자가 그 무게를 어찌 감당하겠나? 할 수는 있겠지. 자신의 삶을 갉아먹으면서.
“저는요, 폐하. 마법부 장관입니다.”
“알아. 그리고 나는 황제지.”
그나마 나움이 이안의 유일한 버팀목인데, 그는 마법부 장관이었다. 순수하게 우정으로만 엮이는 게 아니라,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개입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이안에게 어떠한 목적 없이 순수한 친우가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움은 이안의 상처를 소독하며 일렀다.
“혹여 내려놓기 힘드시면 따라만 해보십시오. 그리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프다’.”
“싱거운 소리.”
“해보십시오. ‘아프다’ 혹은 ‘마음이 불편하다’.”
“…나움.”
“아니면 그것도 좋겠네요. ‘힘들다’.”
이안은 턱을 괸 채 희미하게 웃었다. 타닥타닥, 나무 타는 소리가 이상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이안은 나른하게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붕대를 매는 솜씨가 어설프기 그지없다.
“나움. 아프다. 살살해.”
* * *
이안이 눈을 떴다. 몽롱한 정신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국적인 무늬의 천장. 인지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움과 얘기하고 있었는데, 여기는 어디지? 어찌하여 알싸한 냄새가 나는 것일까? 손이라도 움직일까 하여 힘을 주는 순간, 온몸의 근육이 비틀리며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신음. 고통이 한순간에 현실감각을 일깨웠다. 그때, 시야로 들어오는 어린아이의 머리통.
하나, 둘, 셋.
“일어났다.”
“일어났네?”
“일어났군!”
주황빛 머리칼에 늘어진 실눈. 누가 보아도 노아와 형제자매인 아이들이다. 꼬마들은 이안의 침대 주위에 상체를 걸치고는 쫑알거렸다.
“신기하다. 피를 그렇게 흘렸는데도 안 죽어.”
“마법사잖아. 당연하지.”
“마법사는 안 죽어? 영원히 살아?”
무어라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기운이 하나도 없다. 이안이 포기한 것처럼 눈을 감으려고 하자, 아이들이 밖으로 달려나갔다. 이안이 깨기만을 기다렸건만, 이대로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바리엘 장관 일어났다!”
“일어났다아!”
“마법사들 어서 와봐!”
청명하게 울리는 꼬마들의 목소리. 이어서 우당탕탕, 쿵쿵거리는 소음이 이어졌다. 저 멀리서 사람들이 복도를 내달리는 것이라.
아니나 다를까, 문이 벌컥 열리며 인파가 들이닥쳤다. 절반은 왕궁의요, 또 절반은 마법사들이었으니.
“이안 님! 괜찮으십니까? 정신 좀 드세요?”
“세상에, 제 말이 들리나요?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잠시 비켜보세요. 안정제를 놓겠습니다. 의식이 돌아왔으니 고통을 감당하기 힘들 것입니다. 이봐!”
“이안 님. 저 알아보시죠? 말씀 좀 해주세요.”
“진정제가 아니라, 마력을 더 넣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지금 여유 있는 사람? 오트릭?”
“내가 할게. 다들 도와줘,”
“이안아아아!”
콰앙!
내달리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문에 부딪힌 베릭. 사람들을 밀어내며 이안이 누워있는 침대로 달려왔다. 의사들이 비켜달라 외쳤지만, 그는 물론이고 마법사들조차 쉬이 물러서지 않았다.
“이안아, 몸은 좀 어때?”
베릭이 고개를 들이밀며 속삭였다. 이제껏 본 적 없이 초췌한 모습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안을 둘러싼 마법사들이 모두 그러했다. 안 그래도 없는 마력,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모조리 들이부어서 그런 것이라.
아마 누워있는 자신은 더욱 심각한 몰골이겠지. 이안은 슬며시 웃으며, 습관적으로 괜찮다는 말을 하려 했다.
“해보십시오. ‘아프다’ 혹은 ‘마음이 불편하다’.”
나움과의 기억이 떠올라서 멈추었지만.
이안은 자신을 바라보는 동료들을 가만 바라보다 깊이 한숨 쉬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진중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했다.
“…아프네.”
“그치. 아프지? 너 피 진짜 미치게 많이 흘렸어. 대체 뭘 어쨌길래 그래?”
“다들 미안하다. 계획에 차질이 생겼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다만, 문제가 없었더라면 진즉 바리엘에 귀환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마법사들은 괜한 말 하지 말라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말씀 마세요. 사신 것만 해도 기적입니다.”
“그리 심했나?”
“응접실 카펫을 적시다 못해 밖까지 흘러나왔습니다. 저희는 정말로…….”
“이안 님 정신 사납게 하지 마. 그나저나, 이안 님. 어찌 그러신 것입니까? 원인은 좀 아시겠습니까?”
클리포포드 측에서는 연신 자신들과 무관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안의 입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계속 날 선 경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 그래.”
이안은 천천히 손을 들어 제 심장 부근을 매만졌다. 계약 마법을 실행하려는 순간, 손으로 잡아 째는 듯한 고통이 밀려오지 않았던가. 그것이 퍼지고 퍼져 다른 장기까지 전이된 것이고.
이안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인 실수였다.”
“네? 이안 님이요?”
마법사들은 이안의 대답에 상당히 놀라며 주춤거렸다. ‘그’ 이안이, 마법을 실수로 발동하여 이 지경이 되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실행에서 오차를 보인 적 없었고, 실수라 함은 맞춤법에서조차 본 적이 없건만. 다들 어색하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안 님이 말씀하기 곤란해하시는 것 같지?’
‘그러게. 그럴 리가 없는데.’
‘우선 넘어가자.’
그들이 소곤대는 동안, 이안은 눈을 감고 멜라니아의 발언을 떠올렸다. 서자 이안이 러더포드와 했다는 맹세. 하여 거스를 수 없을 거라는 의미가 바로 이것이었다니.
솔직히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의 서자 이안은 아주 어렸고, 무엇보다 계약 마법을 행할 만큼 마법사로서 숙달되지도 않았을 터. 그러니 아예 가능성을 헤아리지 않았는데…….
‘치밀하고, 의아하다.’
계약 마법은 상대를 불문하고 이중으로 맺을 수 있다. 한데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은, 서자 이안의 첫 번째 계약에 그것을 금하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뜻이다.
이드갈 제조를 비롯하여 서자 이안을 완전히 옭아매는 작태. 러더포드를 속히 추격하여 그 의문을 해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맹세를 맺었는지, 그쪽에서는 무엇을 걸었고 이쪽에서는 무엇을 약속하였는지 말이다.
“이안아.”
이안이 담백한 시선으로 침묵하자, 베릭이 걱정스레 불러왔다. 그 뒤로 문밖에 쪼르륵 머리를 내밀고 있는 노아 왕자의 형제자매들. 이안은 웃으며 베릭의 머리를 토닥였다.
“정신 차렸으니 회복은 시간문제다. 참,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지? 바리엘에 전언은?”
“일주일 넘었어.”
베릭은 침대에 엎드린 채 꿍얼거렸다. 출혈의 강도로 보면 일주일 만에 깨어난 게 참으로 다행이었지만, 이안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 놀란 듯 보였다.
“일주일이 넘었다고?”
“너 쓰러지고 나서 다음 날 전서구 날렸어. 답신이 올 때가 되긴 됐는데, 아직.”
마법사들 역시 침묵으로 긍정했다. 국경을 넘어서 전서구의 마력이 문제를 일으킨 것일까? 황궁의 반응이 올 때가 되었는데, 감감무소식인 게 마음에 걸렸다.
똑똑.
그때 들리는 인기척.
뒤를 돌아보자 클리포포드의 왕과 노아 왕자가 서 있었다. 의사들이 넙죽 엎드리는 것과 달리, 마법사들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했다.
“이안 경, 정신을 차려서 참으로 다행이군.”
“송구합니다, 전하. 놀라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렇지. 마법의 힘이 양날의 검과도 같다 하였지만, 이리 눈으로 볼 줄은 몰랐어. 하하. 어찌, 상태는 좀 괜찮은가?”
“예. 덕분에요.”
이때다 싶었는지, 아이들이 와다다 달려와 왕의 허리춤에 매달려 이안을 구경했다. 노아는 한숨을 내쉬며 마법사들을 둘러봤다. 모두들 성정이 온화하여, 왕궁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에 관하여서는 일렀는가?”
“아니요. 아직이요.”
이안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까딱거리자, 노아가 팔짱을 꼈다. 저를 이해하라는 듯이.
“필릭이라는 자를 고문했다.”
“…예?”
“마법사가 어떤 존재인지는 잘 알고 있으나, 사태가 심각하여 클리포포드에서는 모든 진상을 확실히 알 필요가 있었어. 마법사들의 동의 아래 행한 것이니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말게. 물론, 필릭이 죽은 건 아니라.”
고문을 했다는 말에, 왕이 어린 자식들의 귀를 지그시 눌러주었다. 이안이 마법사들을 쳐다보자, 그들은 눈을 피하며 변명했다.
“모두 필릭 그 새끼 때문에 이리된 것 아닙니까?”
“말로 해서는 안 통하니 어쩔 수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이안 님. 하지만 바리엘에서는 연락도 없고, 저희로서는…….”
이안은 이마를 짚은 채 작게 한숨 쉬었다.
“그래. 내가 없는 동안이니. 너희들의 선택이었다면 존중한다. 우선은 그런데-”
필릭 문제는 차치하고, 바리엘에서 답신이 없다는 게 참으로 걸렸다. 무슨 반응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황궁으로 날린 전서구에 무슨 마력석을 썼습니까?”
“그건 어찌 물으세요?”
전서구가 멀리 떨어진 거리를 문제없이 찾을 수 있는 것은 마력석 덕분이었다. 비둘기에 매단 것과 목적지의 것이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며 반응하여 그 길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왕궁에서 황궁으로 보내는 것이니, 필시 원래 쓰던 것이 있을 터. 이안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클리포포드 국경에 마력이상반응이 있습니다. 혹 그것 때문에 전서구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요.”
뜻밖의 대답에 다들 입이 떡 벌어졌다. 이안이 마지막으로 보낸 것은 국경 안, 바리엘 영지에서 보낸 것이지 않나.
그렇다면, 지금 황궁에서는 이안과 마법사들의 행방을 찾아…….
“다들 뒤집어졌겠는데? 혹시 병사들 오고 있는 거 아님?”
베릭이 코를 훌쩍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