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36
제336화. 포도밭 그 마법사들
이안이 정신을 차린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다시금 의사들이 놓아준 진정제와 수면제 따위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마법사들은 교대하며 그 문 앞을 지켰다.
연락이 닿지 않는 게 마력이상반응 탓이라는 걸 알았으니, 이제는 전서구가 아니라 직접 사람을 보내 연락 취할 일만 남았다.
마법사들은 포도를 하나씩 따먹으며 걱정을 늘어놨다.
“바리엘에 연락이 된다고 해도, 이안 님 옮길 수가 있을까? 지금 상태로는 침대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실 것 같은데.”
“상태 봤잖아.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고.”
“바리엘에 남아있는 애들이 와서 마력 보충해주는 수밖에 없어.”
“어느 세월에? 보름 정도 걸리겠다.”
“그 전에 이안 님 나으면 더 좋고.”
끔찍했던 고비를 넘기니 그나마 농담도 슬슬 나온다. 마법사들은 청명한 하늘 아래 펼쳐진 포도밭을 보며 각자의 사념에 잠겼다.
왕궁 안에서 특별히 재배한다는 녹색 포도알이 푸른 잎과 어우러져 싱그러움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클리포포드가 생각보다 살기 좋은 나라라는 생각을 하였고, 또 누군가는 저 포도밭 사이 움직이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했다.
한 마법사가 창문에 붙어 바깥을 살피다, 이마를 짚었다.
“세상에. 베릭, 쟤는…….”
“내버려 둬. 왕자님이랑 공주님이 어려서 그런가, 베릭이랑 죽이 잘 맞네.”
“그건 실례되는 말이지. 죽이 잘 맞기보다, 신기해한다는 게 맞아.”
베릭을 둘러싼 세 명의 아이. 그들은 짐승에게 먹이라도 주는 것처럼 계속해서 포도를 권하고 있었다. 배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계속해서 음식이 들어가니,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그 얼마나 놀랍겠는가?
“이것도 먹어보아라, 베릭.”
“그다음에는 이것도. 말캉말캉할 때가 제일 달아.”
“이것도 포도예요? 아, 나 포도 너무 먹어서 좀 물리는데. 고기 없어요, 고기? 꺼억.”
“고기? 있지! 이거 다 먹으면 줄게. 아까처럼 먹어봐. 한 번에.”
“오케이. 잘 보세요. 마지막이니까.”
“우와아아!”
입에 쏙 넣었다가 빼니까, 앙상한 가지만 쑤욱 나온다. 저것도 장기라면 장기지. 마법사들은 어처구니없어 하며 창가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원래 이 시간대라면 마법부에서도 한창 바쁠 때인데, 이러고 있으려니 휴가라도 온 것처럼 모든 게 평온했다. 이안이 무사히 깨어나지 않았더라면 지옥이었겠지만.
그때, 누군가가 모습을 보였다.
스윽.
“이안 경은?”
“오셨습니까? 아까 의사가 다녀간 뒤로 계속 주무시고 계십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아직 무리인 것이, 충분하고 긴 치료가 필요하다 하였습니다.”
“그래?”
노아 왕자였다.
분명 보고를 따로 받았을 것인데, 이리 묻는 연유가 무엇이겠는가? 자고 있는 이안에게 볼일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마법사들은 눈치껏 노아 왕자가 자신들에게 볼일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무슨 일이신지…….”
“서신을 직접 전달할 병사가 왕궁을 막 나섰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바리엘에서도 이 사실을 알면 클리포포드의 배려와 친절에 깊이 감명할 것입니다.”
사실 이안을 살리기 위해 보낸 것은 아니다. 오해로 인해 전쟁이 나지 않게끔 조치한 것이니까. 노아 왕자는 의자를 하나 끌어와 앉으며 모두에게 자리하라 일렀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상황이 조금 복잡했다. 정확히는, 이안 없이 마법사들끼리 대처하기에 조금 복잡하다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클리포포드는 바리엘의 동맹을 뒤로하고 이드갈을 확보하려 하였으며, 그것이 들통나 이안과 계약 마법을 맺으려 했다.
하지만 보다시피, 모든 것이 일시 정시된 상태. 마법사들은 노아 왕자가 무슨 말을 꺼낼지 긴장하며 촉을 세웠다.
“마법사 중, 필릭이라는 자 말인데.”
노아는 그런 마법사들의 심경을 잘 알고 있다는 듯, 한껏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원체 웃는 인상이긴 한데, 눈가가 더욱 휘니 되려 의미심장한 분위기를 풍겼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무엇이라 하던가요?”
“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를 배신하고 클리포포드랑-”
“야야야.”
“그, 아무튼 뭐라 일렀는지 알려주십시오.”
어째서 마법부를 배신하고 클리포포드에게 접근한 것인지, 그 당사자 앞에서 언급하기에는 조금 뻘쭘한 상황 아닌가. 노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개의치 않는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 전에,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어.”
“그게 무슨…….”
“이드갈이 이안 경과 관련이 있다고 하던데.”
“예?”
적막이 흘렀다. 마법사들은 지금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노아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연신 사실만을 말하고 있노라, 다시금 맹세하듯 가슴팍을 툭툭 쳐댔다.
한순간에 깨지는 적막. 마법사 몇몇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팔을 걷어댔다.
“미친 새끼가, 당장 죽여버려.”
“참아, 참아. 고문 때문에 제정신이겠어?”
“아니, 시발. 혓바닥이 멀쩡하면 사과해도 모자랄 판에, 뭐? 이안 님이 이드갈이랑 관련 있어? 개소리도 적당해야 들어줄 만하지.”
“그건 나도 동의. 바리엘에 복귀해서 저딴 소리하면 이안 님만 곤란해져. 죽여버리자.”
“진정 좀 해봐. 지금 우리만 있는 게 아니잖아.”
노아 왕자가 흥미롭게 마법사들의 혼란을 구경하고 있었다. 필릭의 증언이 바리엘에 들어가게 되면 곤란해질 것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반응. 그는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다들 다시 앉아보라 지시했다.
“송구하지만, 왕자님. 저희가 직접 필릭을 보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하지만 그 전에, 나도 부탁할 것이 있는데. 이는 이안 경을 비롯한 그대 마법사들을 인도적으로 대한 대가로서 받는 작은 선물이었으면 좋겠네.”
“그, 무엇을 원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이안 님 없이 저희끼리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으음. 별것 아니야. 바리엘에 필릭과 클리포포드의 연관성을 최대한, 최대한 자제하여 언급해주는 것과-”
그것은 곧 클리포포드가 이드갈을 확보하려 했다는 움직임을 은폐해달라는 의미였다. 이안이 이를 허락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마법사들이 난감하게 입술을 깨물자 노아가 뒷말을 이었다.
“클리포포드 곳곳에 마법사들의 힘이 필요한 곳이 있어. 가능하다면 이곳에 있는 동안, 좀 도와주었으면 해.”
이안 살린다고 마력을 죄다 쏟아내었고, 조금씩 생길 때마다 그마저도 이안에게 넣어주고 있었다. 두 가지 부탁 모두 현재 마법사들에게는 난감한 사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절할 수도 없는 것이, 이안의 치료를 클리포포드가 전적으로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들 눈짓만 주고받으며 이를 어찌 타파할지 고민했다.
‘곤란하네, 정말.’
‘차라리 클리포포드 왕에게 알현을 부탁해볼까? 노아 왕자보다 그쪽은 좀 인정이 있어 보이더만.’
‘노아 왕자가 그렇게 되게 하겠어?’
‘우선 수락하는 척하고 넘어가자.’
오랜 시간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인지라, 눈빛만 봐도 그 의미가 전달되었다. 마법사 한 명이 결국 대표로 허락하려는 순간.
“으아아악! 큰일! 큰일!”
바깥에서 왕자의 동생들과 놀고 있던 베릭이 달려오는 것 아닌가. 저놈은 언제나 저런 식이라며, 노아가 짜증스럽게 뒤를 돌아보자, 베릭의 옆구리에 들쳐진 동생이 보였다. 귀가…….
우당탕탕!
“귀, 귀 뽕! 뽕!”
“미친, 베릭! 이리로 오면 어떡해?”
“그럼 뭐 어쩌라고요? 왕궁 사람들 아무도 안 보여서 이리 온 건데.”
“오빠, 나도 이렇게 됐다. 으아앙.”
“울지마, 괜찮아. 이리 내.”
마법사들이 의아한 눈길로 고개를 이리저리 들이밀었다. 노아 왕자가 제 동생을 품에 안은 채 완전히 가려버린 것이다. 다른 아이들 또한 짤막한 다리로 와다다 달려와 노아에게 매달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마법사들은 대답을 피해갈 수 있었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베릭, 왜 그래?”
“응. 있어. 저기, 뭐랄까. 말할 수 없는 가문의 아픔?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뭐, 그쯤 해두지.”
“뭐라는 거야, 바보가…….”
잘난 척하며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이 어이없다. 마법사들 틈을 비집으며 꾸역꾸역 엉덩이를 들이미는 베릭. 그는 소파에 앉아 뒤쪽으로 목을 꺾은 다음 중얼거렸다.
“아오, 배고파. 이안이는 또 언제 일어난대?”
“베릭. 너 밑에서 포도 따 먹는 거 다 봤다.”
“포도는 밥이 아니지. 갑자기 귀 뽕 하는 바람에 고기도 못 먹었어. 젠장. 이쪽 동네 사람들은 갑자기 왜들 그러나 몰라.”
멍하니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던 베릭. 그러다 아주 작은 점을 발견했다. 창문에 묻은 먼지인가? 하지만 그것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새끼손톱만 해졌다.
아아, 새였구나.
별생각 없이 눈을 깜빡이는데…….
“엥?”
솨아아악!
순식간에 하늘을 덮어버릴 만큼 거대해지는 검은색.
마법사들 또한 베릭의 시선을 따라 하늘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들은 모두 저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지점과 지점을 이어주는, 마법의 검은 달.
다들 놀라서 창문에 딱 달라붙었고, 이내 표정에는 반가움과 환희 그리고 안도의 감정이 물들었다.
“뭐, 뭐야. 다들 저거 어떻게 열었어?”
“세상에. 얘들아! 얘들아!”
“우와아아, 힘 좀 썼나 본데? 무슨 일이야!”
“나가자! 나가서 이쪽으로 오라고 해야 해!”
클리포포드 사람들 또한 하던 것을 멈추고 처음 보는 광경에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이는 동생을 데리고 가던 노아 역사 마찬가지. 검은 달이 열리면 마법사들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한숨 쉬었다. 품에 안긴 동생이 울먹이며 제 오라비의 목을 끌어당겼다.
“오빠, 저거 뭐야? 무서워.”
“괜찮아. 손님들이 더 오려나 보다.”
촤아아!
그의 말대로, 곧이어 검은 달에서 사람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금빛 눈을 빛내며 시원하게 하강하는 자들. 마법사들은 찢어지는 희열에 환호하며 클리포포드 왕궁으로 도착 지점을 잡았다.
“이번에는 제대로 왔지?!”
“끼아아앗! 죽인다아앙!”
“다들 속도 줄여! 왕궁에 부딪히면 큰일 나!”
“안 들려! 안 들려! 나는 안들려어어어!”
“아코렐라! 진정 좀 하고, 이 미친 여자야!”
“아하하하! 이안 님은 어디 있으려나?”
“오, 저기! 저기, 우리 애들 보입니다!”
밖으로 나와 연신 손 흔드는 마법사들. 방방 뛰면서 반가움을 표했다.
유려한 나선형 곡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지는 흔적으로, 금빛 선이 희미하게 남았다. 흥분하던 오트릭이 그 수를 확인하고 멈칫거렸다. 하나, 둘, 셋, 넷…….
“왜, 왜 끝도 없이 나오지?”
“설마…….”
콰앙! 쾅!
마법부 전체가 온 것인가? 다들 경악하는 순간, 한 명씩 지상에 착지하기 시작했다. 왕궁이 애지중지 키운다는 포도밭 위로.
콰아앙! 쾅!
사아아악!
이파리가 사방으로 흐트러지고, 천지가 흔들리는 것처럼 울려댔다. 헤일과 아코렐라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 놀란 마법사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어, 다들 무사해?”
“저, 저희가 할 말인데요. 다들 무사하세요?”
“…물론.”
“야! 인마들아! 쌔끼들!”
“하도 안 와서 우리가 왔다! 앵겨! 이놈들아!”
“이이, 이 미친놈들아! 으아아악!”
헤일이 웃옷을 탁탁 털자, 그들은 서로에게 달려가 부둥켜안으며 반가움을 나눴다. 고작 일주일 좀 넘게 떨어져 있었는데 생사를 알 수 없었으니, 애타는 마음이 컸던 것이라.
한 명 한 명 얼싸안은 채 방방 뛰는 것도 잠시. 아코렐라는 그새 포도 한 송이를 입에 넣은 채 우물거렸다.
“그래서, 이안 님은 지금 어딨어?”
“이, 이 건물 3층에…….”
“오케이! 앞장 서! 아코렐라 나가신다!”
“이안 님 상태는? 사경을 헤맨다는 것까지만 들었는데. 우리도 마력 나눌게. 너희 상태가 영 안 좋다.”
“아, 그게 좀 힘에 부치긴 했어. 이쪽입니다!”
“꺄아아! 실례합니다아앙!”
마법사들이 우르르 이안의 침실로 달려가는 와중, 헤일은 그제야 자신들이 포도밭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작고 통통한 한 남자가 울상인 채로 허망하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내 포, 포도들…….”
“죄송합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내가 할 말이네만, 나 여기 왕.”
“…아.”
클리포포드의 왕은 눈물을 머금은 채 우선 이안에게 올라가 보자고 손짓했고, 헤일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