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4
제34화. 출정
황궁 조사단장 에리카는 서류 더미로 너저분한 집무실을 돌아봤다. 간이 서랍까지 모두 뒤집어 쏟았으니, 당연한 모습이었다. 안쪽 사무실에는 부하들이 모여서 잉크로 젖은 종이를 말리고 있었다.
“복구 가능한가?”
“작성한 잉크 종류가 뭔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절반은 건져서 다행이죠.”
“나머지는 문제없습니다!”
“하여간, 그놈. 행동 하나 빠릅니다.”
그놈이란, 구석에 목 잘린 채 죽어있는 하인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 짧은 사이에 서류 처분을 지시한 데르가를 말하는 것이다.
아직 죄가 확정된 것도 아니고, 백작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눈앞의 여성, 버티 에리카가 바로 이곳의 차기 영주가 될 테니까.
“중앙에 제출된 세금신고서는?”
“여기 있습니다.”
“필립과 사리엥이 생산량과 영지민 세율을 계산한다. 나머지는 광산 및 거래 내력을 뽑아내. 어림잡아 3년 치만 보면 될 것이다. 일주일 안에 할 수 있겠지?”
상사의 지시에 부하들이 희미하게 웃었다. 에리카의 물음은 물음이 아니라 명령이었으니. 일주일 안에 해내라는 뜻이었다.
“네. 단장님.”
“좋아. 델릭스는 별채 관리를 책임진다. 움직여!”
“가자! 제대로 털자!”
“으아아아!”
그들은 기합을 잔뜩 넣으며 탈세의 증거를 찾아내겠노라 소리쳤다. 해내면, 이곳은 그대들의 영지가 된다! 그들의 상사는 귀족이 될 것이며, 모두 중앙에서 한자리 차지하게 될 것이다! 꿈꾸던 출세의 시작점이 바로 이곳, 데르가의 집무실이었다.
‘이런, 젠장.’
한편, 별채에서 이안이 쓰던 방에 구금된 데르가. 조사단의 편의를 위해 차출된 몇몇 사용인들 외에는 아무도 이곳을 나설 수 없었다. 데르가는 수염을 잡아 뜯을 것처럼 매만지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직, 메리와 첼은 저택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백작님. 이제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입 안 닥쳐?”
엄청난 고함에 집사가 몸을 움찔거렸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백작의 처신에 따라 제 목숨줄이 간당간당했으니까. 그는 방안을 서성이며 복잡한 머리를 정리했다.
‘황제가 직접 내린 조사단이다. 하지만 분명 이걸 찌른 것은 몰린. 여기서 내 목이 잘려나가면 2황자에게 이득이 돌아간다는 뜻이겠지. 그러면…….’
데르가는 책상을 뒤적여 양피지와 펜을 찾아냈다. 그는 생각을 한번 가다듬은 다음, 멈추지 않고 펜을 놀려댔다. 오탈자를 수정할 시간도 없다. 일분일초가 급하다 못해 처절했다.
슥슥.
“집사. 자네가 할 일이 두 가지 있다.”
“마, 말씀하십시오.”
“서신을 보내. 이건 천려족으로, 그리고 이건 중앙의 1황자 앞으로. 각각 보내고 나면 데오와 접촉해서 병사들을 준비하라 일러. 완전무장으로 언제든지 출정할 수 있게끔.”
천려족에게 보내는 것은 전력 지원과 이안의 참수 요청이었다. 중앙지원군이 곧 도착한다 했으니, 그 전에 무력으로라도 저들을 제압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진실로 반역 중의 반역.
이걸 상쇄할 게 바로 1황자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다. 2황자의 계략 중 일부인 걸 알면 분명 조치를 할 것이다. 견제하든, 방해하든. 무엇이 되었든 데르가에게는 기회가 되겠지.
그는 인장을 찍을 수가 없어 반지 하나를 빼서 넣었다.
‘그래. 일단은 살아남자. 살아남아서 훗날을 정비하면 돼. 그러면 돼…….’
미친 듯이 마음을 다잡는데, 집사가 어이없는 소리를 해댔다.
“여기를 나가라고요? 어떻게요?”
문은 조사단이 지키고 있지 않은가? 그러자 데르가가 창문 쪽으로 고개를 까딱거렸다. 집사의 얼굴이 허옇게 질렸고, 이내 못 하겠다는 듯 도리질 쳤다.
“백작님! 제 나이가 벌써 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죽자고? 쉰이 그대의 마지막 나이겠구먼.”
“그렇게 말씀하시면…….”
집사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창문 아래를 내려다봤다. 3층 높이다. 재수 없으면 죽을 것이고, 운이 좋다 한들 어딘가 부러질 것 같다.
데르가는 커튼을 주르륵 뜯어내서 집사에게 던졌다.
“밧줄을 만들어.”
시발놈. 이것 정도는 좀 같이 만들어주지. 집사는 울컥 차오르는 분을 삼키며 커튼을 꼭꼭 잡아 묶었다. 마치 이것이 제 목숨줄이라도 되는 것 마냥.
* * *
새벽의 사막을 가로지르는 말 한 마리. 모래바람을 뚫고 밤낮으로 내달려서일까. 짐승의 가죽 위로 뜨끈한 김이 서려 있었다.
경계를 서던 천려의 전사가 그 존재를 알아챘다. 그리고 이내, 낯선 자가 흔들고 있는 게 브라츠의 깃발이라는 것도.
“전언…! 브라츠의 전언이 왔습니다!”
“물소뿔을 울려라.”
“물소뿔을 울리라 하신다!”
부우우- 부우-
평화롭게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던 일족이 동시에 하늘을 쳐다봤다. 외지인의 방문을 알리는 소리다. 그것은 이안에게도 닿았으며, 드디어 때가 되었음을 일깨우는 신호가 되었다. 브라츠의 기사는 숨을 헐떡이며 외벽을 두드렸다.
“브라츠의 전언을 가져왔소! 급하오!”
히이잉!
그와 동시에 말이 옆으로 쓰러졌다. 얼마나 쉼 없이 달렸는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일족은 물을 가져와 말의 몸에 부어주었고, 전사들은 기사를 안으로 안내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차악-
“데르가 백작의 전언이라고?”
천막을 치자, 반라의 카칸티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사는 문득 입구에서 저의 소속을 밝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저 전언이라고만 했는데, 별다른 물음 없이 들여 보내준 것이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서서 기절한 것인가?”
기사가 멍하니 서 있자, 카칸티르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채근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브라츠 영지의 기사, 벨입니다. 백작님께서 급히 도움을 요청하셨습니다.”
기사는 급히 정신을 차리며 품에 넣어온 종이를 건넸다. 삐뚤빼뚤, 카칸티르는 천박한 글씨체를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진짜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이다.
“보자, 중앙과의 오해로 위험한 상황에 부닥쳤다. 우리는 동맹을 맺었으니 서로의 고난을 외면해서는 아니 된다. 부디 우방으로서 부탁하니, 천려의 힘을 빌려주어 함께 싸워주길 바란다. 그리고 덧붙여 내 아들 이안 브라츠를…….”
-참수해 주길 바란다. 이것이 그들의 명예에 흠이라 생각하면 내가 보낸 기사가 대신할 것이다.
카칸티르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의 오해란 무엇이지?”
“백작님이 반역죄를 일으켰다는 혐의로 조사받고 있습니다. 이는 명백히 허위 사실이며, 저항하기 위해 곧 무력 충돌이 있을 예정입니다.”
“반역죄가 허위 사실이라는 증거는? 사실인데 가담했다간 우리는 황궁과 척을 지게 되는 것 아닌가.”
“그 증거가 바로 이안 브라츠 님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으로 결백을 증명하겠노라 하셨습니다.”
“아하하하!”
갑자기 터진 폭소에 기사가 헐떡이던 것을 멈췄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카칸티르는 나른하게 고개를 젖히고 구룻잎을 가볍게 씹어댔다.
참으로 간사하고 영악한 자다.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라 하더니만, 이안을 죽이면서 그걸 또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이용하지 않나. 데르가가 여기는 이안의 존재가 무엇인지 짐작게 했다.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지.’
“족장님?”
“그게, 내가 잠이 덜 깨서.”
“…황궁에도 서신을 보낸 참입니다. 보름, 딱 보름만 황궁에서 지원이 도착할 때까지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동맹을 맺은 우방이 아닙니까? 전사들의 의리란 신의 약속과 같아서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카칸티르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연기를 후, 내뱉었다. 그리고 잠깐 기다리라는 듯 손짓했다. 대충 웃옷을 걸친 그가 답신을 써 내려갔다.
“그렇지. 그리고 우리는 전사 중의 전사. 답신을 그대의 주인에게 잘 가져다주게. 우리도 곧 따라가지.”
“감사합니다!”
카칸티르는 기사가 훔쳐보지 못하게끔 가죽끈을 친친 감아 묶었다. 품에 챙긴 기사가 넌지시 바깥쪽을 힐끔거렸다.
“하면 이안 브라츠의 처분은…….”
카칸티르는 침묵했다.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자, 기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단박에 대답이 떨어질 줄 알았건만, 예상을 빗나가자 긴장감이 올라왔다.
“아. 그거 말일세. 백작의 짐작대로, 화친의 증표이긴 하나 그간 천려에서 함께 지낸 식구일세. 우리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는 않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니 자네가 알아서 해 보시게. 밖에 누구 없나?”
“부르셨습니까. 카칸.”
“이안 경에게 이자를 데리고 가지.”
기사는 위화감을 느꼈다. 다만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이안과 이안 ‘경’의 차이는 알아채지 못했다.
카칸티르와 부하들은 앞장서서 이안의 천막 앞에 섰다. 고갯짓하자, 문이 걷혔다.
“이안 경. 일어났나.”
“카칸.”
여전히 반짝이는 금발과 녹안. 살짝 그을린 피부로 인해 훨씬 건강해 보이는 이안이었다.
기사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이자가 자네를 죽이고 싶어 하네.”
“역시. 예상대로입니다.”
하지만 멈칫. 족장의 말이 또다시 기사의 예상을 빗나갔다. 당장이라도 이안을 끌어내라 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기사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카칸티르를 돌아봤지만, 그는 계속해서 이안과 그 옆의 베릭만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약조하지 않았는가. 전사의 모든 것을 알려주겠노라고. 자네의 그, 붉은머리 부하에게.”
“아아. 그렇지요.”
“전사란 죽음의 길로 나아가며 살아남는 존재. 우리와 대련하는 건 적의가 없는 이상 한계가 있지.”
전투력에는 발화점이 필요했다.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태워야만 했으니까.
그 모든 것에는 생과 사 또한 포함이었다.
“조건이 딱일세. 적의도 있고, 무엇보다 데르가의 기사라 하니 실력만큼은 뭐, 바리엘에서도 인정받는 수준 아닌가.”
카칸티르가 보기에는 가소롭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기사 작위가 내려졌다는 건 어느 정도 공인된 자라는 뜻이었다. 크고 작은 마물 전투에서 살아남았으며, 외세와의 전쟁에서 활약했다는 뜻이니까.
“족장님. 이게 대체…….”
“그대가 이안을 죽이고자 하니, 내 친히 자리를 깔아주지 않나.”
기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있음에도, 그들은 저를 바보 취급하고 있었다. 그는 알 수 없는 모멸감에 검 손잡이를 꽉 쥐었고 이안을 노려봤다.
목덜미가 훤하게 드러나 있다. 베기에 좋게끔.
“하. 그렇군요.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기사는 짧게 헛웃음을 터트린 다음,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데르가가 구금된 상황이었으니,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주인을 보좌해야 했다.
채앵!
그때, 베릭이 바로 검을 휘둘러 기사의 검을 쳐냈다. 순간, 환상 같은 불꽃이 튀어 올랐고 베릭은 몸을 낮추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아.”
이안은 눈만 꿈뻑꿈뻑. 볼을 긁적인 다음, 기사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베릭 쪽으로 움직이는 시선. 뒤통수만 봐도 얼굴이 눈에 훤했다. 아주 싸우고 싶어 난리인 표정일 터다.
“…나를 죽이려면 베릭 먼저 죽여야 할 것 같은데.”
“……?!”
그간 천려족과 모래더미에서 뒹굴며 훈련하긴 했어도, 기사를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황궁의 기사들은 베릭과 같이 마검사인 자들이 많았으니까 말이다.
저자도 혹시 모른다. 무슨 능력이 있을지.
“기대되는군. 뭐, 잘 좀 부탁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