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40
제340화. 보이지 않는 것을
클리포포드 왕의 말이 사실이었다. 왕궁 입구가 보이는 쪽으로 자리를 옮기니, 그 앞에 빼곡하게 모인 백성들이 한눈에 보였다.
사람 사는 곳은 다 같은 게라, 바리엘에서도 황궁이 폐쇄되었을 때 저런 모습을 보였는데, 여기 국민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 하늘에 나타났다 사라진 검은 달과 왕궁으로 떨어진 정체불명의 물체에, 모든 자가 걱정하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기도 올리는 노인과 물 담배를 피우며 격정적인 토론을 하는 어른들, 그 속도 모르고 발치 사이를 뛰노는 고양이와 아이들. 왕궁의 병사가 무어라 안내를 하는 듯하였지만, 그들은 쉽게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안은 창틀에 손을 올린 채 그걸 내려다봤다. 노을이 짙게 내려앉아 창백한 그의 뺨이 그나마 생기 돋게 보이는 것 같았다.
“한 대?”
“아.”
헤일이 건네주는 궐련을 받아 피우는 아코렐라. 그가 불을 붙이려다 이안을 힐끔거렸다. 이번에는 피우시렵니까? 저번에 거절당한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굉장히 조심스러운 몸짓이다.
이안은 빙긋 웃으며 손바닥으로 거절의 뜻을 보였다.
“되었네. 바람이 시원하니, 나는 그걸 마시겠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요? 이안 님 이드갈에 대해 뭔가 알고 있죠? 미리미리 좀 일러주시지. 그러면 연구할 때 더 편했을 텐데.”
아코렐라가 연기를 후, 불어내며 투정을 부려대자 헤일이 자중하라며 눈짓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알고 있다. 이것이 아코렐라 나름의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자 하는 농담이라는 걸.
조그맣게 뭉쳐 일렁이는 군중들은, 시선을 생각 없이 던져놓기에 아주 알맞은 풍경이다. 이안은 그쪽을 바라보며 운을 떼었다.
“내가 히엘로, 그러니까 전(前) 브라츠 백작의 사생아인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황궁에서 그걸 모르는 자도 있습니까?”
“아코렐라, 조용히.”
“이런 건 맞장구라고 한답니다. 헤일.”
투덕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이 확실히 안정적이었다. 서자 이안 혹은 황제 이안이 이 자리에 없었더라면 필시 마법부 장관과 그 아래의 자리는 저자들이 맡았을 터.
“이 몸이…….”
자신을 3인칭화 하여 부르는 화법은 전형적인 기득권의 방식이었다. 이안은 자신이 미래에서 왔고, 황족이었다는 걸 알릴 수 없기에 우회하여 선택한 단어였지만, 헤일과 아코렐라는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그들에게 이안이라는 존재는 선 하나를 넘어있는 자 같았으므로.
“어렸을 때 러더포드 상단이 하완국을 통하여 브라츠에 들어온 적이 있는 것 같다.”
“러더포드가요?”
“마리브 황자도 이에 관해 증언한 적이 있지. 당시에는 신빙성이 없는 것이라 여겼는데, 조각을 맞추다 보니 일리가 있다 판단되었어.”
헤일은 이안의 주장 어딘가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채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나는 러더포드 상단을 만났고, 잘은 모르겠지만 마리브, 그리고 하이만 공작의 막내딸 멜라니아와도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보인다라는 것은…….”
“기억이 없어.”
“와우.”
아코렐라가 툭, 하고 궐련을 떨어트렸다.
그녀는 바람에 휘날려간 것을 멍하니 보다가 다시금 헤일의 주머니를 뒤적거려 새것을 꺼냈다. 헤일은 조금 당황했는지, 아코렐라가 뒤지든 말든 난감하게 굳은 채 이안을 바라봤다.
러더포드 상단, 마리브, 멜라니아. 이 세 단어만으로도 엄청난 일과 관련 있는 것이 분명한데, 기억이 없다니. 이만큼 무책임하고 황당하며 안타까운 상황이 어디 있나?
이안은 고개를 어깨 쪽으로 숙이며 슬쩍 웃었다.
“멜라니아 영애의 말로는 내가 러더포드와 모종의 맹세를 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게 계약 마법인 줄은 몰랐어.”
“잠깐만요. 그럼 지금, 이안 님과 러더포드 사이에 계약 마법이 맺어져 있단 말입니까?”
“예상으로는.”
그것도 다른 자와는 엮이지 못하게, 이중 금지 조항까지 먹혀서 말이다. 이제 떠올릴 수 있는 의문은 딱 하나다.
“왜요?”
왜, 대체 무엇 때문에.
헤일의 물음에 아코렐라가 새로운 궐련을 튕겨대며 중얼거렸다. 답은 하나지 않겠나? 이드갈은 마력봉인석처럼 자연에서 나온 게 아니라, 연금술의 산물이다. 그리고 마력과 연관 있는 힘을 가지려면, 응당 그에 관한 재료가 필요한 법.
전 세계를 떠도는 장사꾼들이 서자 이안의 잠재 능력을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다. 먼지 더미에 가려져 있든, 하수구에 처박혀 있든, 값어치 있는 것이라면 귀신처럼 찾아내고 사용해 먹는 자들이니.
“이드갈, 이안 님이 만드신 것입니까?”
“아코렐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맥락에 맞는 질문인데? 입장 바꿔 생각해 봐. 네가 러더포드의 상인이라고 쳐보자. 바리엘 변경에 왔는데 웬 꼬질꼬질하고 예쁘장한 꼬맹이가 마력운용자네? 그때는 브라츠 백작도 신경 안 썼을 때 아니겠어? 그러니 필리아 님이랑 그 고생하면서 살았겠지. 그러면 상단주는 어떻게 생각할까? 응?”
데려가자.
생계 곤란한 부모가 아이를 상단에 팔아넘기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특히나 과거, 중앙을 벗어난 지방 지역에서는 더더욱. 물론 필리아 성격상 그랬을 리 없지만, 그녀는 상단에게 그런 제안을 받은 기억조차 없어 보였다.
이안은 문득, 아코렐라의 말을 떠올리며 비어있던 퍼즐 한 조각을 찾아냈다.
“납치라도 하는 게 맞는 거 아냐? 그런데 이안 님은 이렇게 잘 살아남아서 우리 앞에 있지. 장사치들이 그냥 보내줬을까? 그 대가로 무언갈 얻지 않았겠어?”
순진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아코렐라가 헤일의 어깨를 가볍게 쳐댔다.
정답을 아는 자가 없으니 그것이 맞는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앞뒤가 딱 들어맞는 내용인지라, 이안은 부정 없이 그저 두 사람만 바라봤다.
가을쯤, 러더포드 상단과 이안이 만나게 될 것이라는 멜라니아의 언질. 어쩌면 그것마저 계약 일부로, 아이의 발에 족쇄를 채워놓은 것 아닐까? 풀어주되 낙인을 찍고, 돌려보내 주되 끝까지 목숨 줄을 쥐고 있는.
‘서자 이안이 러더포드를 만나고 돌아왔을 때, 실라스크 화분을 가져왔다. 필리아의 말을 따르면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하였어. 아주 잘 해냈다며.’
멜라니아도 비슷한 맥락으로 일렀다. 이드갈을 만들고 나서 아주 환하게 웃었노라.
서자 이안이 자신의 마력으로 이드갈에 도움을 주었을 때, 러더포드는 아이에게 무엇을 약조한 것일까? 아이가 느꼈을 때 필시 자신에게도 이득인 게 있는 터라 협조적으로 나선 것 같은데…….
“이안 님? 괜찮으십니까?”
이안이 침묵하며 고민하자, 헤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코렐라는 입술 사이로 희미한 연기만 내뱉을 뿐이다.
“이안 님. 대답 좀 확실히 해줘요. 이드갈, 이안 님이 만들었어요?”
연구자에게 애매모호한 답은 아예 안 듣는 것만 못하다. 재촉하는 그녀의 물음에 이안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네.”
“홀리 몰리, 미쳤네. 진짜! 대박! 어떻게요? 나도 좀 알려줘 봐요. 이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요? 마법사가 마력봉인석을 만들어낸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의사가 제 배 갈라서 혼자 수술하는 거랑 뭐가 달라? 응? 와우!”
짝짝짝! 아코렐라는 손뼉까지 쳐대며 신들린 듯 존경을 표했다. 중요하게 생각할 점은 그게 아닌데 말이다. 헤일은 조용히 하라며 그녀의 손뼉 틈으로 손을 집어넣어 멈추게 했다.
“아코렐라. 이안 님이 이드갈을 만들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몰라?”
“존나 개쩐다는 거지, 뭐 다른 수식어가 필요해?”
“마법사들의 배신자.”
솨아아.
바람이 불어와 이안의 머리칼을 흩트려 놓았다. 창문으로 타오르는 노을빛이 홍염처럼 보이는 순간이다. 멈칫한 아코렐라의 표정을 살피며, 이안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바리엘을 위험에 빠트린 자.”
“…어. 맞네. 생각해보니 그것도 맞아.”
“나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어. 황궁에서는 마법부를 계속해서 예의주시하고 있고, 조그만 틈이라도 잡아내려 할 것이다. 오래 숨길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이드갈이 주변국으로 상용화된다면 그 근본에 관해서도 말이 돌 것이니까.”
혹여 이드갈로 인해 마법부에 피해가 가고, 이로 인해 바리엘에 문제라도 생기면 당연지사 이안이 장관직에 있을 수 없음이다. 헤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더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런데 어째서 저희에게 그걸 일러주십니까?”
“이쪽으로 오기 전, 필릭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았나? 필시 흔적을 발견했을 것이라 여겼는데.”
“조사는 했습니다만-”
로만드로가 중간에서 쪽지를 가로챈 것을 모르는 터라, 두 사람은 서로를 의아하게 쳐다만 볼 뿐이다. 뭐, 상관없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런 대화가 오갔을 터이니.
“내가 마법부를 떠나게 되면 헤일 그대와 아코렐라가 뒤를 이어주었으면 해. 보았을 때 그만한 적임자가 없어.”
“이안 님. 사람 보는 눈은 좋으시네요. 근데요, 싫은데요?”
“싫어? 왜?”
단호한 거절에 이안이 웃으며 되물었다. 장난스러움이 묻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말투가 묘하게 평온했다.
“저는 연구하면서 황궁 예산 빼먹으려고 마법부 들어온 거지, 거창한 사명감 같은 건 없어요. 그리고-”
아코렐라의 눈이 번뜩였다. 눈앞에 이드갈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있는데, 가긴 어딜 가? 죽을 때까지 붙어있어도 연구할 거리가 천지겠구먼.
이안은 난감하다는 듯 손을 가로저었다.
“다시 말하지만, 난 기억이 없어. 그래서 이드갈 만드는 법을 모른다.”
“한 번 만드는 게 어렵지, 두 번은 쉬워요. 이안 님, 우리 돌아가면 재밌는 것 좀 할까요? 예? 히히히.”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기괴한 웃음을 터트리며 혼자 중얼중얼. 손가락까지 접는 것으로 보아, 계획이 산더미인가 보다.
“이안 님. 저도 거절하겠습니다.”
“헤일, 그대는 왜?”
“저도 귀찮은 건 딱 질색입니다. 볼펜만 쥐면 다 부러트려요. 도장 찍었다 하면 종이 찢어지고요, 예. 윗사람들이랑 얘기하는 법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거절할게요.”
예상 밖이다. 적어도 자신의 앞에서는 알겠노라 대답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이안이 눈썹을 휘자, 헤일이 궐련을 문 채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좀 놀랍긴 하네요. 추적하고 있던 이드갈의 연관성이 가까이 있었다니.”
“…….”
“하지만 믿습니다.”
이안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헤일이 선수 쳤다.
뭉쳐서 헤쳐나가기에도 버거운 것인데, 어찌하여 자꾸 혼자 짊어지려는 뉘앙스를 풍기나. 짊어진다고 한들, 그것이 온전히 이안의 등에 담길까? 저 작은 등에?
“이안 님이 마법부에 명했던 러더포드 상단 추격을 비롯하여, 바리엘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믿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군.”
“보이지 않으니 믿습니다. 보이면 믿고 말고 할게 뭐 있습니까? 그저 받아들이면 되는 것을.”
이안이 그간 마법부에서 흘렸던 피와 땀을 옆에서 봐왔다. 자신의 숨이 바리엘을 위해 주어진 것처럼 온몸을 불사르던 행동. 누구보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헌신하는 걸 가까이서 봐왔는데, 어찌 다른 마음을 품겠는가.
게다가 계약 마법 부작용으로 각혈했던 것이 문밖까지 넘쳐 흘렀다는데, 과연 모르지 않고 그리할 수 있었을까? 목숨을 담보로 말이다.
“그러니 돌아가서 로만드로 님과 함께 사안을 모의해보는 게 좋겠습니다. 이드갈에 관한 것은 전적으로 마법사와 관련된 것이니, 황궁에서도…….”
마법부가 강하게 나가면 황궁에서도 쉬이 첨언하지 못할 것이라 말하려 했다. 저 멀리서 휘날리며 달려오는 익숙한 깃발을 보기 전까지는.
이안과 아코렐라는 헤일의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고개를 틀었고, 이내 그것의 정체를 알아챘다.
“…버고스.”
버고스의 사신이 클리포포드를 찾은 것이다.
좌우로 갈라지는 인파를 거세게 헤치고 내달리는 병사들. 이안은 창문에 손을 올린 채 한숨 쉬었다.
“벌써 시작되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