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70
제370화. 허상에서 의심으로
“나도 아스타나에 가 본적이 있지.”
먼저 운을 뗀 것은 티모시였다.
외교관이라는 신분을 이용한, 아주 자연스러운 대화의 시작이다. 하샤가 불쏘시개로 모닥불을 뒤적거리며 웃었다.
“관광하기 위해?”
아스타나에도 왕은 있었지만, 그 존재가 타국과 같지 않았다. 부족들끼리의 내란으로 인하여 혼란스러운 국정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신임을 잃었고, 신임을 잃었으니 명망 또한 잃었다.
거죽때기만 남은 왕에게 머리를 조아릴 자는 없었으니, 왕이라기보다는 그저 긴 시간 살아남은 존재들이라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겸사겸사.”
티모시는 부정하지 않고 가벼운 투로 받아주었다.
소수민족들의 계승자들이 타국의 전쟁에 참여한 연유가 무엇 있겠는가. 크게 보면 다르겠지만, 결국에는 부족을 성장시켜 나라를 통합, 안정시키는 게 우선적인 목적인 게라.
그러니, 따지자면 버고스는 이들을 외국의 귀족과 마찬가지로 대접하는 게 맞았다. 미래를 위한 투자가 따로 있겠는가? 여기서 버고스가 도움을 받고, 그로 인해 저자들이 성장한다면 그게 바로 진정한 버고스의 언덕이 될 터라.
‘그리 생각 안 하는 자들이 결정권자라는 게 문제지.’
티모시는 장교가 하샤에게 손찌검했다는 걸 헛소리라 여겼다. 아무리 투박하고 거친 전사들이라 해도 그렇지, 그렇게 경우가 없을까. 전쟁의 핵심이 되는 마물을 움직이는 자들이고, 따지자면 타국의 전쟁에 참전한 동맹군이지 않나.
하지만 불빛에 은은히 비치는 하샤의 찢긴 볼을 보자니, 그게 정녕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아스타나는 경관이 참으로 아름답거든. 신께서 깎아 만든 절벽산이 하늘을 덮고, 푸르른 이끼와 나뭇잎들이 대지를 채우지. 관광이라기보다, 아무래도 여행이라는 단어가 어울리겠소.”
“그래. 동의한다.”
티모시는 슬쩍 웃으며 하샤의 눈치를 살폈다.
볼에 난 상처 외, 특별한 상처가 없다. 사령술사의 존재와 그 수 그리고 위치 따위는 상대가 제일 알고자 하는 정보일 터인데. 어찌 상처 하나 없을까.
‘둘 중 하나겠지.’
아주 수월한 방식으로 거래가 성립되었다거나, 혹은 저쪽에서 하샤를 건드리지 않았다거나.
‘메이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다.’
메이는 사령술사를 데려오기 위한 가치 보존을 위하여 그 안전을 지켜준 것인데. 하샤의 안전은 무엇을 위함인지?
티모시의 눈이 저도 모르게 가늘어졌고, 하샤는 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확실히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갑자기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알 듯 말 듯한 묘한 눈빛.
하샤는 모닥불을 급히 뒤집으며 되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곳에 앉아 있나?”
“음?”
“모두가 ‘티모시 경’ 혹은 ‘티모시 님’이라고 부르던데. 어찌하여 저쪽 안이 아니라 여기 있는지를 물었소.”
하샤는 이안의 조언을 떠올리며 폐부를 깊숙이 찌르고 들어갔다.
‘티모시는 군 소속이 아니나, 참전한 것도 모자라 선두를 내달리고 있다. 클리포포드 왕궁 정보에 따르면 거의 장군과 같은 위치라 하더군.’
그리 이르던 이안이 멈칫거렸다. 다몬왕의 의도를 다시금 새기며 피식 웃었는데, 하샤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물론 그가 꽤 고위직이긴 하지. 하지만 그래서 더 문제다. 적합하지 않은 자리에 선 것만큼 권위자를 힘들게 하는 건 없거든. 그것이 위든 아래든 말이다. 아무튼, 지금 티모시가 현 상황에 문제를 겪고 있음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니 그쪽을 노려서 대화를 시도해보라. 반응이 차가울수록 우리에게는 좋다. 그가 그에 관해서 오래 곱씹었다는 증거거든.’
티모시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는 하샤가 그를 힐끔 훔쳐봤다. 그는 굳은 낯으로 사그라드는 모닥불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꽤나 냉랭한 투로 대꾸했다.
“그것은 내부 사정이니 외부인이 알 필요 없다.”
“외부인이라니. 버고스는 땅이 척박하여 그런가, 다들 말과 행동이 너무 메말라 있군. 지금 내가 여기, 그대와 함께 앉아 있는데 대체 누가 내부인이고 누가 외부인인가?”
기분 잡쳤다는 듯, 하샤가 나뭇가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병사가 언제 오는지 기다리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이 티모시와의 대화에 미련이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면서, 동시에 진짜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불쾌하게 할 뜻은 아니었네.”
티모시는 순순히 사과했다. 대화를 끝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아낸 것은 없고, 되려 미심쩍은 부분만 얻어냈는데 그만둘 수는 없지.
“클리포포드 안쪽은 어떠하던가.”
“흐음. 여기보다는 나았지. 벽돌로 쌓여있었으니까.”
“저쪽에서 꽤 인도적으로 대해주었나 보군.”
“솔직히 말해주길 원하시오?”
“당연한 것 아니겠나? 솔직한 게 아니라면 그대야말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이상한데. 버고스를 위해 그 옷과, 무기를 두르고 있으면서.”
하샤는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병사가 슬슬 옮기기 위해 다가오려고 하자, 티모시는 등 뒤쪽으로 손을 움직여 저지했다.
“아니, 안 되겠다. 되었으니 그만함세.”
“잠깐. 그대의 태도가 내 심기를 거스르고 있음을 알고 있으리라. 어떠한 일언반구 없이 자리를 뜬다면 그대는 다시 저 천막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장군이랑 장교들에게 일러 고문받게 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샤는 꽤나 능청스럽게 민망한 낯을 잘 꾸며냈다. 시선이 목적지 없이 좌우로 오갔으며, 연신 마른 침을 삼켰다.
“예언을 해주었거든.”
“예언?”
“그래. 사실 예언이라 하면 거창하고, 점을 보았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 내 할아버지께서 점령술을 하는 부족 출신이었기에, 주워들은 게 있었어. 비위 맞춰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솔직히 좋았네. 여기보다는.”
하샤가 자신에게 점령술사의 피가 흐르고 있다 하였지만, 당장 여기서 증명할 방도가 없다.
다른 사령술사들은 모두 출신지가 달랐으며, 심지어 같다고 한들 뭐 어찌 하겠나. 시장통 앞 집시도 점을 보는 세상에, 술사로 유명한 아스타나 유력 승계인이 점 하나 보는 게 무엇이 그리 대수라고.
문제가 되는 점은 적군의 비위를 맞췄다는 데 있었다.
“비위를 맞추었다고, 내가 제대로 들었나?”
“으흠. 그래. 똑똑히 들었소. 아, 미리 말해두자면 장군에게는 이르지 않은 사안이네. 그쪽에서 물어보질 않았거든.”
모닥불이 완전히 꺼졌다. 하샤가 남은 불씨를 발로 짓밟은 탓이다. 자신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슬슬 걱정이 되는 터라, 아예 어둠 속으로 숨는 게 나을 거란 판단이었다.
“아스타나인에게 긍지란 없나?”
“아니. 그 누구보다 긍지로 가득한 자들이다. 그러하니, 어떻게 해서든 죽지 않으려고 했어. 내가 죽으면 아스타나도 죽으니까.”
“헛소리로 비굴하게 적군의 비위를 맞추는 게 긍지라고? 살다 살다 그런 어폐는 처음 들어보는군. 대단해. 다음에도 아스타나에 갈 일이 있다면, 그때도 관광을 하러 가겠네.”
아스타나는 발전이 없을 것이라. 너희들은 그 작고 좁은 곳에서 치열하게 싸워 죽되,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라.
티모시의 모욕적인 언사에 하샤가 인상을 찌푸렸다. 의도하긴 했는데, 막상 직접 들으니까 더욱 기분 나쁜 게다. 불씨를 안 꺼트렸어도 될 뻔했다.
“헛소리가 아니라면?”
“뭐?”
“헛소리가 아니라 하였다. 나는 점을 제대로 보았고, 클리포포드의 승리를 보았지. 클리포포드는 적군이자 전력인 나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걸 원했고, 나는 그리했어. 그게 왜? 뭐가 어떻다는 거지?”
“안 되겠군. 하샤, 자네는 열외다. 장군께 말씀드려 당장 아스타나로 돌아가게 하겠어. 버고스에서 약속했던 모든 지원은 물거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대들은 이제 더 이상 북쪽에서 자손을 볼 수 없음이라. 버고스의 이름과 내 이름을 걸고-”
“아들이 있지? 다섯 살 정도 되는.”
하샤가 차갑게 속삭였다.
“나를 아스타나로 보내기 전, 그대나 귀국하시오. 처와 자식이 죽어가는 것도 모르고 애먼 자리에서 시간만 축내고 있으니, 그것만큼 딱한 것도 없다.”
채앵!
“이-”
“티모시 님!”
티모시가 검을 뽑아 들자, 대기하고 있던 병사가 놀라서 달려왔다. 자신의 임무는 저자를 데리고 합성 마물을 옮기는 것인데, 티모시가 해하려 하니 깜짝 놀란 게다.
“왜, 왜 이러십니까? 이자는 사령술사입니다. 무, 문제가 있으십니까? 처단을 하시려거든 장군께 허락을…….”
가늘고 달달 떨리는 목소리였으나, 티모시를 막아세우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는 사람이었으니까. 지금은 전시요, 이곳은 적지를 앞둔 진영. 장군의 명 없이 사령술사를 해한다는 것은 크게 문제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무슨 일인가?”
“장교님!”
“티모시 경? 지금 무엇 하고 있어?”
병사들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한 장교가 소리치며 달려왔다. 검을 든 채 격분하여 서 있는 티모시. 그리고 아까 나갔던 사령술사. 장교는 의아하여 당최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티모시 경?”
“…실례했습니다. 사령술사를 데려가라.”
“아, 예옙! 알겠습니다!”
병사가 냉큼 하샤에게 이리 오라 고갯짓했다. 그러자 하샤는 웃옷을 탁탁 털며 중얼거렸다.
“애가 죽어가는 길, 어찌 어미가 되어 보고만 있겠소.”
티모시와 가까이 있는 병사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말이었다. 다시금 그의 눈이 번뜩이고, 검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자, 장교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티모시 경! 왜 이래? 술이라도 먹은 겐가?”
“그럼 저는 이만.”
하샤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서둘러 병사를 따라나섰다. 의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다리가 후덜덜 떨려서 죽을 판이다. 곰처럼 거대한 사내가 살기를 내며 달려드는데, 어찌 의연하겠는가?
머릿속으로 온갖 사념이 스쳐 지나갔다. 이안이 잘못 예상했나? 이안 말대로 하는 게 맞았나? 이안, 이거 어찌하나? 일 그르치면 이걸로 이안에게 빚 갚은 거로 하자, 등등.
아무튼, 최후의 수단까지는 안 써도 돼서 다행이었다. 하샤는 클리포포드 장벽이 있는 쪽을 슬쩍 쳐다본 다음 총총거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 * *
“티모시 경.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이지?”
장교의 목격으로 인해 이는 고스란히 장군의 귀까지 닿았다.
일반 병사라면 몰라도 상대는 귀한 사령술사 아니던가. 비싼 값 치르고 데려온 포로를 다시 죽이려고 하다니. 이는 티모시가 분명히 변명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티모시는 알 수 없는 한숨만 내쉬며 물었다.
“저자에게 무엇을 심문하였습니까?”
“무어라?”
“이상합니다. 수상하고요. 믿을 수 없는 자인데, 어찌하여 별다른 조치 없이 저자를 합류시켰는지를 묻는 겁니다. 대체 아까 천막에서 무엇을 심문하신 것입니까?”
“티모시 경. 언사가 과하네. 지금 굉장히 불쾌해.”
“…송구하게 되었습니다만, 저는 버고스로 돌아가겠습니다.”
“뭐?”
“첫째, 장군의 허락 없이 사령술사를 해하려 했으니 그 대가를 달게 받는 것이고, 둘째, 솔직히 장군과 저의 일 처리 방식이 굉장히 다릅니다. 이곳은 제가 있을 곳이 아니고, 있다 한들 도움 될 게 없습니다.”
“자네는 명분을 만드는 자다!”
“사신 수송을 위한 명분이요? 사태가 이렇게까지 깊어졌으니 더 의미가 없습니다. 국경선에서 공식으로 이른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돌아가겠습니다.”
티모시가 상당히 강하게 의견을 표현했다. 조금씩 쌓였던 불만이 허상이라는 불씨를 만나 터져버린 것이다. 가족이 죽어가고 있다니. 망할 주술사 같으니라고.
그는 꽤나 불쾌한 표정으로 서 있었는데, 막상 마주한 장군은 난감하다는 낯이었다.
‘왕께서 이자를 계속 앞으로 세우라 하셨는데…….’
“장군님.”
“…그럴 수는 없다.”
그 순간, 티모시의 목 주변에 소름이 쭈뼛 솟아올랐다.
티모시가 돌아가는 게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상황이다. 벌과 함께 전령의 역할도 할 수 있으니 그 얼마나 효율적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군이 자신을 곁에 두려 한다?
어째서? 왜?
허수아비처럼 서 있기만 한 자신을?
“…….”
자신을 버고스 바깥에 잡아두려는 행동이지 않나?
그는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허상이 의심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