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75
제375화. 그 대가
엄숙하고 장엄한 황궁을 가로지르는 한 시종. 그가 황태자의 궁에 들어 무언가를 속닥거리자, 들은 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표정으로 반문했다.
시종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귓속말로 무언가를 속닥거렸고, 경비들은 그 모습을 보았음에도 보지 않았다는 듯 시선을 멀리 고정했다.
똑똑.
“전하.”
의견을 나눈 시종이 황태자의 방에 인기척을 내었다.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자, 책상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있는 진과 바로 마주했다.
남의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는 법이라더니, 고작 며칠 만에 뵈었거늘 어찌 저리 성장하셨는고. 시종은 속으로 사담을 중얼거리며 머리를 바짝 내려 붙였다.
“무슨 일인가? 트웰러 장관에게서 연락이 온 겐가?”
맥심 트웰러 장관은 병사들을 직접 이끌고 남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매일 두 번씩 전서구를 보내고 있었으니, 이번에도 그와 관련된 것일 거라 짐작한 게다. 하지만 시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저기, 국경수비대에서 온 연락입니다. 이안 히엘로 장관님께서 발행한 통행증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신분 확인이 안 되어 알아만 두고 있었습니다.”
이안의 이름이 나오자 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에서 듣고 있던 시아오시 역시 기민하게 반응하여 시종의 발언에 집중했다.
“이안 경이 통행증을 발급하다니. 장관의 권한으로 말인가?”
“예예. 그런데 그걸 사용한 자가 누군지 밝혀졌습니다. 버고스의 티모시 사절입니다.”
“잠깐만.”
이건 또 무슨 소리?
진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렇다면 이안이 티모시에게 통행증을 주었다는 것인데, 이는 자연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티모시는 이미 버고스의 외교단 중 고위직이라 바리엘 출입국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 통행증을 따로 내어줬다? 어째서?
“그걸 어찌 알았어? 티모시가 사용인이라는 걸.”
“황궁에 찾아왔습니다. 전하를 알현하고자 한답니다.”
시아오시는 천천히 진의 서류를 덮으며 책상을 정리했다. 오늘 업무 처리는 여기까지인 듯싶어 보였으니.
다른 나라 사람도 아니고, 전쟁에 참여 중인 티모시가 바리엘 황궁으로 직접 왔음은 여간 보통 문제가 아님을 시사했다. 진은 서둘러 데리고 오라며 손짓했고, 시종은 총총거리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갑작스러운 상황, 진은 상황을 가늠하느라 애쓰는 듯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일까. 티모시가 왜 바리엘로 와? 시아, 이안 경이 보냈던 쪽지를 다시 주어. 티모시가 있다는 말이 없었나? 나는 어찌하여 그자가 클리포포드에 있을 거라 여겼지?”
“직접 언급된 부분은 없습니다만, 아마 버고스 측에서 외교적인 명분, 그러니까 사신을 데려가겠다고 장벽에서 대치했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니 만큼, 이때 티모시가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있지요. 아마 그리 인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황궁까지 온 걸까?”
“만나면 알게 될 것이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제 생각에는…….”
시아오시는 뒷말을 흐리며 잠시 숨을 골랐다. 경험적으로 그리고 직감적으로, 티모시가 홀몸으로 바리엘 황궁에 들어섰다면 한 가지 연유밖에 떠오르지 않았으니.
“주인을 피해 도망치기 위해서는, 주인보다 강한 자를 찾기 마련이거든요. 아마 티모시도 그리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노예 시절, 심심치 않게 도망가던 것들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어쭙잖게 산과 들을 헤치며 달리던 자들은 모조리 잡혀 죽었고, 자신의 가치를 다른 권력자에게 보이며 애원했던 자들은 살아서 도망쳤다. 그걸 도망이라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러했다.
똑똑.
시아오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기척이 들려왔다.
진이 허락하자, 고된 흔적의 냄새가 훅 올라왔다. 밤낮없이 말을 타고 내달린 자만이 낼 수 있는 냄새였다.
이어서 티모시가 거대한 몸을 반쯤 숙이며 모습을 보였고, 그의 얼굴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물기가 선명했다. 하지만 진은 그것이 그의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티모시 경.”
일전에 한 번, 마법부 뒤뜰에서 차를 나눠마셨던 적이 있지 않나. 그때 보았던 것과 너무 다른 모습에 진이 놀라 일어섰다. 적군이지만, 그 이전에 인간적으로 풍기는 연민의 기운이 먼저 닿은 게라.
야수처럼 거칠고 우직하던 사내는 어딜 가고, 늙고 힘없어 추방당한 맹수처럼 어찌 기세가 꺾여있나?
“진 황태자 전하를 뵙사옵니다.”
티모시는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버고스 식의 인사가 아니라, 바리엘 식의 인사였다.
진은 도로 자리에 앉으며 그가 품에 안은 것을 주시했다. 서류 더미인 것 같은데, 흙과 먼지로 인하여 누렇게 떠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그대가 알아서 나의 호기심을 충족해줄 것이라 믿네. 버고스와 클리포포드 간 전쟁을 알고 있을 터. 지금 그대가 걸어들어온 곳은 가이아의 중심이라.”
“예. 가이아의 중심, 황궁. 제가 길을 헤맸을지언정 잘 찾아왔습니다. 알현을 허락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진은 감각적으로 티모시가 버고스를 저버렸다는 걸 알아챘다. 그건 시아오시도 마찬가지. 티모시는 조심스럽게 엎드리며 그간의 일을 고했다.
“…평생 모든 걸 바쳐가며 헌신했습니다. 버고스는 제 조국이자 그 이상이었고, 그에 따라 왕가 역시 제가 따라갈 발자취와 같았지요.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저는 국경을 넘으면서 제 가족과의 추억 외 모든 것을 털어버렸고, 이제는 바리엘을 위해 살아가고 싶습니다.”
“믿을 수가 없군. 다몬 왕이 증거도 없이 그대의 가족을 그렇게 했다고?”
“저 또한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 않습니다.”
내부 고발로 인한 몰락.
티모시는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이제는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살아있는 한 흘리게 되는 것이 눈물인가 보다.
티모시는 자신의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부탁했다.
“전하, 부디 청하옵건대 저를 바리엘 제국민으로 받아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저는 입국 허가 만료 시기에 따라 불법체류자가 될 것이며, 다른 나라로 들어갈 수도 없게 됩니다. 반역죄는 어느 나라와 같이 중죄 중의 중죄. 다몬 왕은 저를 잡기 위해 타국에 수배를 걸 것이며, 제 육신은 죽은 땅만을 고르고 골라 떠돌게 되겠지요.”
일반 제국민이라면 적합한 절차를 통해 귀화할 수 있었지만, 티모시의 경우는 조금 복잡했다.
우선 전쟁 중인 버고스 출신이라는 점. 거기서 고위직이었다는 점. 입국이 일반적이지 않고 장관의 특혜로 인한 것이었다는 점. 바리엘에 귀화한 연유가 정치적인 이유라는 점 따위로 인하여 말이다.
그걸 한번에 밀어버릴 수 있는 게 바로 황태자 진이었으니. 그의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처리되어 바리엘 제국민증이 나올 터였다.
아이는 손끝으로 서류를 톡톡 두드리며 티모시의 정수리를 내려다봤다.
“…내가 그대의 무엇을 믿고?”
자신은 변절자가 아니라고 하지만 직접적인 증거가 없었다. 이 모든 게 티모시의 거짓말이라면? 황궁으로 잠입하기 위한 버고스 측의 파격적인 수작이라면? 티모시가 진짜 변절자라면, 버고스 측에서는 바리엘에 범죄자 인도를 요청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거절할 명분 또한 애매했다. 그를 맨손으로 받아주기에는 바리엘에서 감수할 위험이 너무 많은 것이라.
스윽.
티모시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품에 든 것을 꺼내어 내놓았다. 시아오시는 그걸 대신 주워들었고, 가볍게 털어 진에게 넘겨주었다.
버고스어로 이루어진 문서라 바로 해석이 불가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바로 버고스 왕궁의 인장이 찍혀있다는 것.
“버고스와 타국 간의 외교적 거래 내용이 담긴 서류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주고받았으며 미래에 무엇을 약조하였고, 과거에 무엇을 잊기로 하였는지 상세히 적혀있는 보고서입니다.”
“시아. 버고스어를 읽을 줄 아는 자를 들여라.”
“예. 전하.”
“둘 이상으로 데리고 와.”
혹시 모르니까 말이다.
시아오시가 서둘러 시종들에게 진의 뜻을 알렸고, 바깥은 어수선해졌다. 그럼에도 불구, 티모시는 우직하게 엎드려서 진의 선의를 기다렸다.
‘티모시의 말이 진짜라면…….’
이것은 굉장한 정보다.
버고스가 다른 나라와 무슨 거래를 맺었는지 아는 것은 단순한 지표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그리고 무엇이 풍족한지, 나아가 거래 양상을 분석하여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혹여 물질적인 게 아니라면 국가 내부의 사정까지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버고스뿐만 아니라 그와 연관된 인근 나라까지.
“전하. 버고스어를 읽을 줄 아는 자들입니다.”
“들라 하라.”
두 명의 관료가 고개를 꾸벅 숙인 채 입장했다.
진은 안쪽 내용을 보여주지 않고, 우선 앞쪽의 일부분을 읽게 하였다. 중요한 내용이니 이들의 신분 또한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지 않겠나. 섣불리 뒤쪽까지 모두 보여줄 수는 없었다.
“우선 버고스의 공식 서류가 맞는지 확인하라.”
“예, 전하. 잠시, 송구하옵니다.”
그들은 진에게서 서류를 건네받고 천천히 살펴보았다. 버고스 담당 부서원들이었기에, 왕국의 공식 문서가 어떤 식으로 작성되고 배포되는지 잘 아는 자들이다.
여기저기 흙과 먼지로 훼손된 탓에 그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하지만 이내 내놓는 답.
“전하. 버고스의 공식 서류가 맞습니다. 이 부분은 담당했던 자들의 이름이고, 그 아래가 보고서의 제목입니다. 문서 작성이 버고스 외교부 측에서 쓰는 것과 일치하고, 담당자들의 이름이 낯익습니다. 무엇보다 인장 또한 진짜고요. 아, 물론 육안으로 보기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인장에 관해서는 따로 전문가를 부르심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보았을 때, 이는 문제가 없다 여겨집니다.”
계속 엎드려 있는 티모시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문득 그의 품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무언가. 진은 그것이 곧 어린아이의 장난감임을 깨달았다.
진은 관료들에게 물러나라 지시했고, 버고스의 서류를 가볍게 툭툭 내려치며 먼지를 털어댔다.
“하나만 묻지.”
“하문하십시오. 전하.”
“귀화하면 여기서 무엇을 업으로 삼을 것인가? 평생 나랏밥 먹던 자가 다른 밥을 먹기에는 입맛에 안 맞을 것 같은데.”
바리엘 제국민증은 황궁에서 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 요건이었다. 혹여 그가 시험을 쳐서 말단 공무원이라도 되면? 꽤나 볼만한 풍경이리라. 물론, 윗선에서 정리하여 절대 볼 수 없겠지만 말이다.
“바리엘에 귀화하는 것을 허락만 해주신다면, 황궁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살아가고 싶습니다. 살아서…….”
자신의 가족을 비참하고 처참하게 죽인 다몬 왕에게 복수하고 싶을 뿐이다. 그 과정에 황궁이 있다면 수월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길은 많았다.
티모시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 안쪽 볼을 깨물었다. 다몬의 얼굴만 떠올려도 심장이 비틀려 죽어버릴 것만 같았으니.
“그대가 언급한 것이 사실인지 우선 확인하는 과정이 있을 것이다.”
“성심성의껏 응하겠습니다.”
“그리고 당분간은 황궁에서 머물러야 할 게라.”
그러자 티모시가 고개를 들었다.
굴러들어온 버고스의 고위직 관료를 어찌하여 황궁 밖으로 멀리 내쫓겠는가? 평생 동안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것을 샅샅이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아마 이 얼룩덜룩한 서류보다 더 귀한 것이겠지.
“…값은 충분한 것 같군.”
진은 서류를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티모시의 귀화가 현재 굉장히 긍정적인 변수라는 걸 놓치지 않은 눈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