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79
제379화. 달밤의 만남
이안은 팔짱을 낀 채 지도를 내려다봤다.
앞으로는 버고스, 뒤로는 루스웨나가 밀고 들어오는 지금, 어느 한쪽도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무엇보다 신중한 선택이 필요했다.
“노아 왕자님.”
이안이 노아를 부르자, 그의 부하들 고개까지 일제히 돌아갔다. 여태 말 한마디 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자가 곧은 목소리를 내었으니, 그 누가 주목하지 않겠는가.
“무엇인가?”
“동쪽에서는 루스웨나와 바리엘 측의 격돌이 예상됩니다. 그것도 클리포포드 영지 내에서 말이죠. 바리엘의 병사들은 강하고 긍지가 높지만, 루스웨나 측 전력은 아직 측정이 불가하니 쉽게 우위를 짐작할 수 없음입니다. 동쪽의 클리포포드 국민들은 피난을 시작했습니까?”
“버고스에 침략당한 지역은 이미 피난길에 올랐고, 일부는 우회하여 계속 수도로 들어오고 있네. 하지만 아직 루스웨나 측은 잘 모르겠어. 무엇보다 버고스와 루스웨나에게 포위당하면 고립되는 것이나 마찬가지. 식량은 한정되어 있어 언제까지 피난민을 받아줄 수 있을지 모르겠네.”
그의 말에 이안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압생트 색 눈빛이 등불을 받아 따뜻하게 반짝였다.
“왕자님. 저희가 포위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생각은 곧 말의 바탕이다. 심연 깊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런 말을 한 게라. 노아가 움찔거렸고, 눈치 보던 장군이 한마디 거들었다.
“사실 이는 거의 확실시 된 거라 생각합니다. 어느 전투든 앞과 뒤가 동시에 공격당하면 이는 몰락입니다. 아니면 기약 없이 버티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말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걸세.”
노아가 괜찮다며 손을 들어 장군을 제지했고, 이안은 다시금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현실을 어렵게 보면 의외로 문제가 쉬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아무튼, 바리엘은 본대가 아니라 지원군입니다. 전투가 있다 한들, 트웰러 장관은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고 보급품을 확보한 채 이쪽으로 합류하는 걸 선택할 것입니다. 반면, 루스웨나는 버고스와 함께 클리포포드의 동쪽 길을 누비겠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어설프게 대응할 바에는 길을 터 두어 이쪽으로 모두 모으는 게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막아낼 수 없다면 흘려보내라. 꼿꼿한 나무는 부러지지만, 갈대는 부러지지 않는다. 괜히 저항하여 의미 없는 피를 내기보다, 그들을 동원하여 동쪽의 국민들을 피난시키는 게 어떨지 묻는 게다.
노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길을 트다니. 그렇다면 클리포포드의 땅을 포기하라는 것인가?”
“무슨 말씀입니까. 전쟁 중 땅이 점령당하고 탈환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아시다시피, 마법사들의 힘은 클리포포드 지각 아래 균열을 자극합니다. 저 바깥의 죽은 마물들도 마찬가지고요. 쉬이 쓸 수 없음이니, 한번에 몰아서 정리하는 게 좋겠다 싶다는 의견입니다.”
마법사의 힘을 신중히 써야 할 때였다. 그러니 차라리 루스웨나까지 모아둔 상태에서, 단 한 번의 전투로 승부를 보는 게 클리포포드의 지각 안정에 도움 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노아는 턱을 괸 채 고민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이안의 의견. 선택은 자신의 몫이었다. 그러니 책임도 자신의 몫 아니겠나. 수많은 국민의 생명이 달려있음을, 클리포포드의 역사가 달려있음을 막중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스웨나 측에 대응하지 않는 게 좋다 보는 연유가 또 있습니다.”
“무엇이지?”
“루스웨나에도 마법사가 있음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는 있네. 하지만 루스웨나의 마법사는 별로 협조적이지 않다고 들었다. 참전 여부가 불투명해.”
“클리포포드의 왕께서는, 클리포포드에서 못 하는 일이있습니까?”
제아무리 마법사라고 한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나라의 왕이 부탁하고 명령하면 쉬이 거절할 수 없음이라. 망명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듣자 하니 그들은 은둔하는 삶을 추구한다고 하였는데, 앞으로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적당히 왕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을 것이라.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 역시 루스웨나의 국민들이었다.
“흑갑옷과 마법사, 이 둘이 동원된다면 클리포포드에서는 절대 일반 병사로 루스웨나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재차 제안하지만, 대응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합니다. 앞과 뒤가 동시에 공격당한다고 한들, 그 전선(戰線) 간 거리에 따라 쓸 수 있는 전술이 달라집니다. 여기서 왕궁의 정문과 후문을 막는 것과 국경의 동쪽과 서쪽을 막는 것. 일장일단이 있으나, 저라면 전자를 선택하겠습니다.”
멀리 병사를 보내면 상황을 즉각적으로 알 수 없고, 패배 시 무의미한 죽음만 남긴다.
하지만 수도 가까이 오면 즉각적이고 유연한 대응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마법사들이 있으니 겨뤄볼 만하다. 다만, 치명적인 단점은 수도가 뚫리면 그것이 곧 클리포포드의 패망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하아.”
노아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 쉬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저지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이안의 말대로 병력을 한데 모아 일격을 가하는 게 좋을까?
노아의 고민이 깊어질수록 장교들의 낯에도 어둠이 깃들었다.
“이안 경.”
“예. 왕자님.”
“하나만 묻겠다. 그대는 이번 전쟁에서 클리포포드를 바리엘과 같이 여기고 최선을 다해줄 것인가? 맹세해줄 수 있나? 마법사들은 맹세할 때 읊는 주문이 있다 하던데, 그를 통해 내 선택에 도움을 줄 수 있나?”
모두의 시선이 이안에게 쏟아졌다. 그러자 이안은 이상한 걸 묻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요. 어찌하여 제가 클리포포드를 바리엘과 같이 여기겠습니까? 제게는 오로지 바리엘밖에 없으며, 이리 함께하는 것 또한 바리엘을 위함입니다. 왕자님.”
클리포포드가 함락되면, 혹은 균열로 인하여 마물이 범람하면 바리엘에도 부정적인 영향이 가니까. 그러니 이렇게 밤잠 안 자고 그들을 돕고 있는 것 아닌가. 모든 것은 클리포포드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리엘을 위해서였다.
이안은 단호히 부정했지만, 노아는 어쩐지 그 말에 더한 안정감을 느꼈다.
“그래. 내가 실없는 질문을 했군.”
클리포포드를 위하겠다는 말을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거짓이고, 잘못된 길일 터였다. 바리엘을 위해 움직이는 이안이었기에, 그만큼 클리포포드가 건재하길 바라는 게다.
노아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루스웨나가 들어서는 동쪽 길을 열어두어라. 그래플린 숲을 통과하도록 유도해. 그 밖의 길로는 피난민을 움직이고-”
노아는 멈칫거리더니 부하에게 눈짓했다.
“왕궁에서는 아직 무기를 제조 중인가?”
“예. 생각보다 그, 더딥니다.”
마력봉인석과 이드갈로 제조한 무기를 뜻하는 것이었다. 가만 듣던 아코렐라가 혀를 쯧 차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그것들은 나 없으면 일도 못 해요. 몇 자루나 만들었다는데요? 중간에 대장간도 늘렸다면서요. 지금쯤이면 백 자루 이상 나오는 게 맞는데? 그거.”
“아, 서른 자루를 막 넘겼습니다.”
“돌아버리겠네. 헤일, 빡대가리 같으니라고.”
아니,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된다, 친절히 일러주고 왔는데 대체 뭘 하고 있기에 고작 서른 자루라는 건데? 아코렐라는 눈을 뒤집어 까며 분노를 식혔고, 노아는 그런 그녀를 모른 척했다.
“서두르는 게 좋겠다. 루스웨나 측에서도 마법사가 동원되었다면 그 무기가 상당히 중요해. 아마 상대측에서는 이미 그와 비슷한 걸 소지하여 참전할 게다.”
“네. 재촉해 보겠습니다.”
“걔들도 열심히 하고 있겠지요. 결과가 그따위라 그렇지. 이안 님. 어찌, 제가 갈까요? 제가 왕궁으로 가고 헤일을 이쪽으로 오라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 근데 걔가 마력석 이걸 볼 수나 있을지는 또 모르겠네. 이안 님! 우리 돌아가면 헤일 짤라버립시다!”
“안 돼!”
분노에 찬 아코렐라의 말에 베릭이 바로 반박했다.
“왜?”
“이안이 힘들 때 마력 쪽쪽 뽑아주는 거, 헤일만큼 빠른 사람이 없어.”
“그래? 그러면 못 짜르지. 음.”
둘은 다시금 조금씩 움직이는 마력석을 빤히 쳐다봤다. 두 눈이 반짝거리는 게, 마치 동물들이 신기한 물건을 발견했을 때 코를 들이대고 킁킁거릴 때의 눈빛이었다.
이안은 저자들을 무시하라며 손짓하였고, 노아와 그 부하들은 단숨에 고개를 틀었다.
“정찰병을 보내지. 루스웨나가 어떻게 나오고 있는지 상세히 확인하는 게 좋겠어.”
노아의 명령에 부하들이 밖으로 뛰어나갔고, 이내 전술실에는 다시금 이안과 노아만이 남았다. 노아는 이안을 따라 팔짱을 낀 채 찬찬히 그를 훑어보았다.
“루스웨나를 수도 가까이 접근시켰다가 일이 잘못되면, 어찌하지?”
“…왕자님. 제가 감히 하나 충고 올리겠습니다.”
이안의 충고. 노아의 귀가 살짝 움찔거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걸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외교적인 처세가 아니라, 저 궁금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단편적인 발언을 말이다.
“무엇을 생각하든, 왕자님이 다 옳습니다.”
“뭐?”
“왕자님이 이 전쟁에서 승리할 거라 생각하면 승리할 것이고, 패배할 것이라 생각하면 패배할 것입니다. 그 무엇이 되었든, 왕자님이 옳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노아는 할 말을 잃었다. 오만하게 들리면서도 알 수 없이 가슴을 찌르는 날카로운 말이었다.
“이는 전쟁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시면서, 그 무엇이 되었든 자신이 옳다고 여기십시오. 그렇다면 그게 어떠한 길이든, 본인은 옳은 길을 걷게 됩니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이안은 손끝을 가볍게 비비며 웃었다. 긴장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손짓이었다.
“저는 언제나 바리엘이 영원한 빛 안에서 안식을 얻을 거라 여깁니다.”
그것이 백 년 전이든 백 년 후든, 황제가 누가 되었든 말이다.
단호하고 군더더기 없는 이안의 발언에 노아가 머리를 쓸어넘겼다. 뭔가 한 방 먹은 것 같으면서도 분한 느낌이 들지만, 또 한편으로는 경이롭다. 이 이중적인 감정을 무엇이라 설명할 것인가?
타닥타닥!
똑똑!
“왕자님!”
노아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순간, 병사가 급히 전술실로 뛰어 들어왔다. 한순간에 긴장이 팽배해지며 노아가 숨을 들이쉬었다. 또 무슨 일일까? 버고스 측이 움직였나? 하지만 창밖의 저것들은 여전히 뿌리를 내린 채 그 자리에 있었다.
“바리엘의 제국방위부 장관님이 오셨습니다.”
“뭐?”
“지금 버고스와 대치 중인 성문 외, 동쪽 작은 문으로 장관이 보낸 마법사님이 오셨습니다. 확보한 보급품을 조용히 옮길 것이니 문을 열어달라고요. 아마 한 시간 안에 당도하실 것으로 예상합니다.”
노아가 급히 외투를 집어 들었고, 이안 역시 옷깃을 바로 하며 밖으로 나섰다.
어둑해진 시간, 보급품을 받기로 한 버고스 측은 보급로가 차단됐다는 걸 알고 있겠지만, 저 앞에서 엉덩이 깔고 앉은 자들은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모를 것이라.
이안은 노아와 함께 서둘러서 말에 올라탔고, 이내 동쪽 쪽문으로 내달렸다.
타닥타닥!
“이안 님!”
장벽 위, 병사들과 함께 서 있는 한 마법사. 바리엘과의 합류를 위하여 보냈던 자였다. 마법사는 이안을 발견하자 반갑다는 듯 방방 뛰어댔다.
“문을 열어두심이 좋겠습니다.”
“천천히, 최대한 소리 내지 않고 문을 열어라!”
“예. 왕자님!”
타앗!
아래로 내려온 마법사는 후드를 걷어내며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이안 님. 맥심 트웰러 장관님 진짜 대단하십니다. 하늘에서 길만 안내해 드렸는데 머릿속에 지도라도 있는 것인지, 먼저 앞서는 마차를 잡아내시더라고요.”
“바리엘 지원군이 모두 들어오는 것인가?”
“아니요. 우선은 확보한 보급품만 클리포포드로 옮겨 놓겠다 하십니다. 트웰러 장관께서 이안 님을 뵙고자 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추적이 붙은 걸 안 버고스 측이 경로를 이탈하여 계속 길을 헛돌고 있습니다. 보급지를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럼 금방 다시 나가시겠군.”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 저기 오시네요!”
마법사의 손끝으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보였다. 조용히 움직이는 말발굽과 마차 바퀴. 그들은 달빛을 받은 채 어둠 속에서 모습을 보였고, 이내 신속히 입성했다.
타앗.
트웰러는 이안을 바로 알아보았고, 이안 역시 트웰러를 알아보았다. 그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손을 뻗으며 악수를 청했다. 얼룩덜룩, 닦아내지 못한 피가 그대로 굳어있었다.
“마법부의 이안 장관님이시지요. 반갑습니다. 이번에 새로 제국방위부 장관으로 취임한 맥심 트웰러입니다.”
“반갑습니다. 트웰러 장관님. 이안 히엘로입니다.”
“황궁에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혹여 마법부 장관님께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요. 이리 무사한 걸 보니 안심이 됩니다. 진 전하께서도 그리하시겠지요.”
오랜만에 남을 통하여 진을 만나는구나. 이안은 살짝 미소 지으며 안쪽으로 가자 고갯짓했다.
“나눌 얘기가 많습니다. 드시지요. 장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