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8
제38화. 새로운 이유
“자네도 들었나?”
“이안 님 막사 쪽 소리였지?”
잠에서 깬 천려족 두세 명이 옷을 걸치며 밖으로 나왔다. 헛걸 느낀 게 아닌 모양이다. 그들은 서둘러 이안과 베릭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이내 반쯤 걷혀있는 입구를 확인했다.
“이안 님? 괜찮으십니까?”
“문제 있어요? 베릭, 죽은 거 아니죠?”
안으로 한 발자국 내딛자마자 보이는 광경. 웬 정체 모를 자가 바닥에 뻗어있고, 이안은 붉게 오른 목덜미를 부여잡고 기침을 해댔다.
“콜록!”
“이, 이안 님? 뭡니까?”
“그자, 그자 제압… 갑자기 날 죽이려고…….”
그제야 바닥에 널브러진 단검 조각도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바로 바깥에 상황을 알리고, 사내의 팔과 다리를 묶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나도 모르겠네. 잠에서 깨니 날 죽이려고 했다네.”
“아니, 그것도 그거지만 대체 어떻게 쓰러트린 겁니까? 이안 님은 훈련도 안 받으시잖아요.”
“…어쩌다 보니.”
이안은 대답하기 힘든 척 괜히 목만 매만졌다. 이내 일족의 모든 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카칸 역시 하의만 입은, 가벼운 차림새다.
“무슨 소란이냐? 누가 이안 경을 습격했다고?”
“카칸! 이자입니다. 들어왔을 때부터 이러고 뻗어있습니다.”
“등신인가? 뭐 하는 놈이야?”
“그러게…….”
“누구지? 얼굴이 안 보이니 원.”
악의적인 의도 없이 순수한 물음이었다.
솔직히 전투력으로 봤을 때는 천려의 어린아이도 이안을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 덩치로 뭘 잘못 얻어터졌기에 기절했단 말인가?
“가면을 벗겨라.”
카칸티르는 난생처음 겪는 일에 당황하면서도 이안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앞으로는 출전도 출전이지만, 그들은 이안을 ‘손님’으로 대접하겠노라 맹세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그것만큼 불명예스러운 것도 없다.
스윽.
“헉!”
부하가 가면을 벗기자, 다들 놀라서 입을 가렸다.
부마트였다. 네르사른의 둘째 계모의 사촌 형제이자, 식량 관리 총책임자인 사내. 이안 역시 단박에 그를 알아봤다. 귀환식에서 저를 뚫어지라 보던 자 아닌가. 영 찜찜하여 기억에 남아있었다.
“…부마트를 옮겨라. 날이 밝는 대로 심문할 것이다.”
카칸티르의 명령에 부하 셋이 달려들어 부마트를 끌어내렸다. 함께 나가려던 족장이 이안을 돌아봤다.
다른 자도 아니고 부마트였다. 일족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한 전사란 말이다. 그런 그와 맞서 상처 하나 없이, 그저 흐트러지기만 하다니.
“이안 경. 자네가 부마트를 제압한 것이 진실인가?”
“어쩌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제국에서는…….”
카칸티르의 눈동자가 슬쩍, 베릭으로 향했다. 이제 좀 감이 잡혔다.
“기적을 행하는 자를 마법사라 부르던데.”
“대사막에서 거짓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묻지 말라 돌려 말하는 것인가.”
“바리엘로 돌아가 적당한 때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존재가 갖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말입니다, 지금은 살아온 시간이 달라 이해하기 힘드실 겁니다.”
제국 내에서 마력운용자, 즉, 마법사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몰라서 저런 반응일 터다. 그 아무리 천한 핏줄일지라도, 황궁의 주축을 담당할 수 있는 자격. 그것이 마력의 사회적 힘이었다.
“그러지. 무엇보다 지금은 내부의 일이 더 중요하니. 쉬시게나. 문제가 있다면 무엇이든, 편하게.”
“감사합니다.”
카칸티르는 기대한다는 듯 가볍게 웃고 막사를 나섰다. 소란이 정리되는 와중에도 베릭은 입을 떡 벌린 채 자고 있었다.
“크어억.”
“하아.”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찬 것으로 보아, 회복이 되긴 되고 있나 보다. 옆구리에 구멍 뚫린 것 치고는 상당히 상태가 좋아 보였다.
이안은 그제야 탁상 위에 놓인 새 구룻잎을 발견했다. 몇 개는 등불에 태우고, 다시 몇 개는 잘 말려 베릭의 코 아래 대주었다.
* * *
쏴아아!
어둠이 가시자, 카칸티르의 부하들이 부마트의 얼굴에 모래를 끼얹었다. 보통은 물을 뿌리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곳은 대사막 한가운데. 이안은 괜히 자신의 볼이 따가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정신 차릴 때까지 부어라.”
“네. 카칸.”
모래가 끝없이 쏟아져 부마트의 가슴까지 차올랐다. 그제서야 겨우 움찔거리며 정신을 차리는 사내. 카칸티르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찬찬히 뜯어 살폈다.
“부마트.”
“아…….”
사지를 결박하여 부목을 세워둔 상태다. 부마트는 몸을 이리저리 뒤틀더니, 이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부마트. 자네가 새벽에 이안 경을 공격한 것이 맞나?”
부마트는 대답을 망설였다. 인간의 혀는 거짓을 고할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윈첸이 있었으니까. 카칸티르는 심문을 토대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낼 게 분명했다.
“카칸. 일단 이것 좀 풀고…….”
“대답. 허튼 말을 하면 손가락을 자르겠다.”
망설임이 없는 냉정함이었다. 부마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입술만 깨물다가, 결국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
“침묵을 택하겠다?”
지랄 맞다. 한 손으로도 죽일 수 있는 상대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여지는 남아있다. 동기만 밝혀지지 않는다면, 이안을 공격한 것에 대한 벌만 받고 끝날 것이다.
그것이 곧 부마트 자신의 오른팔일지라도. 죽는 것보다 낫지 않겠나.
“진심인가?”
“카칸. 나를 아직 가족이라 여겨준다면, 더는 묻지 마시고 내 팔을 가져가십시오. 이안 저자, 기이한 힘을 썼습니다. 누, 눈이 금안으로 변하고 공기가 응축하며 순간적으로 터지는 것이, 분명 미심쩍은 자입니다.”
카칸티르는 부마트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수군덕대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묻지 않은 걸 말하는군. 부마트. 자네 꼴이 지금 얼마나 추한지 알고는 있나?”
일족이 모두 보는 앞에서 모래더미에 묻힌 채 주절주절. 명예와 영광을 우선으로 하는 전사였다면 혀를 깨물고 죽었을 것이다.
부마트의 얼굴이 굴욕감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이안이 손을 들었다.
“제가 증언해도 되겠습니까.”
“말하시게나.”
“분명, 데르가를 입에 올렸습니다.”
팔 하나 내어주고 비밀을 막을 정도라면, 그 뒤에 더한 게 숨겨져 있다는 의미였다. 이안의 발언에 다들 동요하듯 술렁거렸다.
“제가 카칸에게 제안한 것을 간계라 표현하고, 그를 저지하려는 듯 보였으니 아무래도 데르가와 모종의…….”
이안은 뭔가 생각난 것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카칸티르는 참을성 있게 그를 기다려주었고, 부마트는 침을 꼴깍 삼킬 뿐이다.
“혹시 부마트, 데르가에게 서신을 보낸 적 있나?”
이안이 인장을 훔쳐 찍기 위해 집무실로 숨어들었던 날. 서랍 안에서 천려어로 쓰인 서신을 발견하지 않았나.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여 족장 다음으로 올 자가 누구인가?’라 쓴 서신을 데르가의 책상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부마트, 혹시 자네인가?”
모두의 시선이 무릎 꿇고 있는 부마트에게 쏟아졌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안을 한껏 노려보더니, 이내 심호흡 후 혀를 깨물었다.
“막아라!”
데르가의 이름이 나온 직후부터, 전사의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할 시간은 지났다. 부하들이 단박에 손가락으로 혀를 누르고 천을 쑤셔넣었다.
“읍! 읍읍!”
“부마트! 진실입니까?”
“말 시키지 마! 천이나 더 쑤셔 넣어!”
“젠장, 이게 대체…….”
일족들이 충격과 배신감에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이안은 조심스럽게, 하지만 확신을 갖고 추측했다.
황궁에서 비일비재하게 봤던 일들이었다.
“윈첸 부족장님의 건강이 악화된 게, 부마트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자가 식량 담당자라 하지 않았던가요?”
윈첸을 죽이고 부족장 자리를 갈아 치운다라…. 확실히 그런 일이 일어났으면, 부마트가 유력한 후보자긴 했다.
“데르가와 어떤 결탁을 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만, 아마 부마트에게는 족장이라는 영광을, 데르가에게는 경제적인 이득이 약속되었을 겁니다.”
카칸티르는 침묵한 채 부마트를 응시했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이내 일어서서 부마트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질질 끌었다.
“…아무도 들지 마라.”
그가 향하는 곳은 윈첸의 막사.
부하들은 긴장한 채 안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지켜봤다.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는 기다림이 이어졌다.
이내, 카칸티르가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핏물을 뒤집어 쓴 상태였고 손에는 부마트의 목이 달려있었다.
“사막에 던져버리고 부마트의 가족 역시 끌고 와라.”
“…예. 카칸.”
장례를 치러주지 않고 짐승 먹이로 던진다는 것은, 그가 반역자임을 공표하는 것이었다. 카칸이 부마트의 머리를 던지자, 일족들이 지나가며 침을 뱉어댔다.
“이안 경. 잠시.”
카칸티르의 부름에 이안이 자리를 옮겼다. 그는 네르사른이 건네주는 물수건으로 얼굴과 손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일정을 좀 수정할 필요가 있소.”
“어떻게 말씀입니까.”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대가 브라츠에 무사히 입성하고 입지를 다질 때 힘을 실어주는 것뿐이었지.”
중앙군과 직접 대립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천려족도 그들의 싸움에 제대로 끼어들 수 밖에 없다.
“데르가의 숨은 우리가 거둘 것이다.”
“아.”
감히, 앞에서는 화친을 맺는 척 카칸티르를 기만하고 그들의 가족과 결탁하여 정신적 지주인 윈첸을 죽이려 했다. 구룻잎 밀수 반입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안은 잠시 고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는 합니다만, 힘들 수도 있을 겁니다.”
“어째서지?”
“데르가의 죄명이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그자를 처단하기 위해 보름이나 내달려 황궁 조사단이 내려왔는데, 정작 변방의 외세가 먼저 처리하면 입장이 퍽 우스워지지요.”
반역자의 처형식은 보다 화려하고, 잔인하며, 엄숙하게 열렸다.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데르가의 죽음인데, 그걸 변방의 부족에게 넘길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도 우리는, 나는, 직접 데르가를 죽여야겠다.”
“…정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카칸티르의 의지가 너무 확고해 보였다.
“원래 목적대로, 제가 브라츠 영지를 차지하면 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공식적’으로 말입니다. 그리된다면 처형식에 제가 관여할 수 있고, 천려족의 의지를 받들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경을 도와야 한다는 거군.”
“말씀이 과하십니다. 제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지요.”
카칸티르는 이안의 넉살 좋은 말에 입꼬리를 올렸다. 기분이 좋아서 웃는다기보다, 앞으로의 상황이 기대된다는 웃음이었다.
“좋네. 해보자고.”
“데모샤.”
“데모샤.”
이안과 카칸티르가 주먹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 의원이 다가와 이안을 불렀다.
“베릭이 정신을 차렸습니다.”
“…벌써?”
“정신만, 어찌 차렸습니다.”
“…아.”
이안은 미묘한 어폐를 알아차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