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80
제380화. 차가 식기 전에
트웰러 장관을 비추는 작은 등불.
그는 그제야 자신의 손바닥에 굳어있는 피를 발견한 듯했다. 넉살 좋은 웃음을 짓곤 말라비틀어진 것을 예의상으로 닦아냈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으시고요?”
“보시다시피요. 클리포포드 왕궁에서 편의를 많이 봐 주셨습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전하를 비롯하여 황궁 모두가 아주 걱정했습니다. 특히 마법부 전체가 이동할 정도라 하니, 그 심각성에 대해 누가 감히 단언하겠나이까.”
텅 비어버린 마법부를 에둘러서 혼내는 것이었다. 그때는 장관이 볼브였긴 했지만, 황궁을 텅텅 비우는 것만큼은 결코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노라고.
노인의 시선이 아코렐라와 마법사들에게 닿자, 그들은 은근슬쩍 천장을 바라보며 모른 척했다. 확실히 전장에서 구르고 구르던 노장인지라, 그 눈빛 하나하나가 받아내기 버겁다.
이안은 그에게 따뜻한 차를 권하며 말을 이었다.
“다 상관인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아니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곡해해 듣지 마시길.”
“전하는, 잘 계십니까?”
이안은 우선 진의 안부를 물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은빛 머리칼과 벽안이 선명하건만, 황궁 돌아가는 사정을 보아하니 자신이 알고 있는 진과는 많이 달라졌을 게라.
진이 보고 싶었다. 정확히는 만나고 싶었다. 그리하여 원 역사에 새겨졌던 그의 본모습을 보고 싶었다.
트웰러는 눈썹만 까딱거리며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전하께서는 황궁 정사를 돌보느라 고생하시는 것 외, 큰 문제 없이 잘 계십니다. 아참, 그리고 시아오시라고 했던가요?”
“시아오시요? 예. 전하의 곁을 지키는 자 말입니까?”
“정식으로 작위를 받았습니다. 이제 히엘로 경과 같은 자작입니다.”
“뭐!? 자작이라고!?”
가만히 듣고 있던 베릭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말도 안 돼! 바리엘에서 제일 강한 사람은 자신인데, 어찌하여 시아오시가 먼저 작위를 받았단 말이냐? 앙? 밖에서 개고생하고 있는 것도 자신인데!
할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아코렐라가 자신의 주먹을 베릭 입에 꽂아 넣으며 싱긋 웃었다.
“실례했습니다. 장관님. 전쟁 중에는 원래 다들 제정신 아니지 않습니까?”
마법사들이 눈이 도르륵 돌아갔다. 제정신 아닌 사람이 제정신인 척하니 그것 또한 공포다.
베릭은 버둥거렸으나, 아코렐라와 마법사들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갔고 트웰러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저자가 베릭이군요.”
“알고 계십니까?”
“예. 마법부 장관께서 데리고 다니는 호위인데, 그 소속이 황궁친위대라. 참으로 인상 깊은 자 아닙니까.”
마법부가 황궁친위대를 견제하기 위해 심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물론 베릭을 실제로 보고 그 성정을 아는 자라면 딱히 도움 될 것 없어 보인다며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말이다.
트웰러는 아주 짧은 순간에도 베릭의 위아래를 훑으며 중얼거렸다.
“덩치에 비하여 몸이 단단합니다. 저런 자들이 타고난 기세가 좋지요. 전쟁에서는 모르겠지만 전투에서만큼은 두각을 보이는 자들입니다. 성격만 좀 길들이시면 되겠습니다.”
트웰러는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길들이지 못할 것 또한 파악해놓고 하는 말이라.
이안은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노아 왕자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열렬히 경청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궁금한 것은 처음 만나는 장관들의 인사치레가 아니라, 바리엘 지원군이 무슨 활약을 했으며 지금 전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였다.
“아, 음. 무엇부터 말씀드리면 될까요. 우선 루스웨나에서 버고스로 보내는 보급로의 수는 완전히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예상했는지 나눠서 움직이는 것 같더군요. 우선 저희가 빼앗은 마차에는 드래곤 각린을 비롯하여 소정의 마력석 그리고 가루 따위가 들어있었습니다.”
“가루?”
“흑갑옷 제조에 필요한 물질이지 않을까 싶은데, 혹 이안 경께서는 아는 게 있으십니까?”
“아니요. 저도 제조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꼭 그것과 관련되어 있다 단정할 필요는 없지요. 단정하는 것은 언제나 시야를 좁게 만드니까요.”
“옳은 말씀입니다. 아무튼, 복귀하지 않은 마법사 두 분과 함께 제 부하들이 다른 경로의 보급병들을 추적하고 있는데, 그 보급지를 알아내는 게 우선일 것 같아 개중 하나는 슬쩍 놓아줄까 싶습니다.”
보급지라 하면, 그곳과 가까운 곳에서 흑갑옷의 제조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혹여 보급이 전달된다 하더라도 위치를 대강이라도 알면 급습하여 제작을 중단시킬 수 있다.
“그것은 트웰러 장관께서 판단하여 행하십시오. 저에게는 군사적인 결정권이 없습니다.”
“군사적인 결정권은 없지만, 그보다 더한 마법사들의 결정권이 있지 않으십니까.”
“음. 이것도 알려드릴 필요가 있군요. 장관. 마법사들은 이 땅에서 함부로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뜻밖의 말이라는 듯 트웰러의 주름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마법사가 있는 한, 전쟁의 승패는 아주 정확하게 가를 수 있었다. 그것이 바리엘이 제국으로 성장하여 여태껏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연유였고, 신께서 축복하여 마지않은 곳이라 칭할 수 있었던 증거였다.
그런데 마법사들이 힘을 못 쓰다니?
“역시 아직 어딘가 불편하신가 보군요.”
“아니요. 힘은 거의 돌아왔습니다. 마법사들 또한 마찬가지로 조금씩 평소와 같은 체력을 되찾고 있어요. 문제는 클리포포드의 땅입니다. 장관께서는 마물 전투에 참전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마물 전투. 예.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물이 자주 생성되는 지형의 조건을 알고 계시겠네요. 우리가 입수한 정보로는, 클리포포드 땅 아래 균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대지진 또한 예견되어 있지요.”
미소를 띠고 있던 트웰러의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생각보다 일이 심각했던 것이다. 그저 루스웨나를 저지하여 클리포포드를 도운 다음, 마법사들을 무사히 데려오면 되는 임무라 생각하였는데. 마물과 균열이라니.
“문제군요.”
“예. 여러모로 문제입니다.”
클리포포드가 버고스나 루스웨나에 먹히든, 아니면 균열이 일어나 마물 천지가 되든, 바리엘에는 문제였다. 위협적인 세력이 성큼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이안은 노아에게 제안했던 것을 트웰러에게도 일러주었다.
“하여, 기회가 많지 않습니다. 루스웨나 측에서 흑갑옷과 마법사를 동원하였다면 일반 병사로는 막을 수 없으니, 클리포포드는 길을 열어 이쪽으로 유인 할 생각입니다. 일격으로 정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낫다는 판단입니다.”
“흐음. 잠시만요. 노아 왕자님. 지도를 보여주시겠습니까?”
트웰러의 부탁에 노아의 부하가 지도를 가져와 펼쳐주었다. 주름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그의 눈동자가 지도를 살폈다. 손끝으로 길을 따라 움직이기도 하고, 톡톡 두드리기도 했다. 노아는 마른 입술을 깨물며 트웰러의 의견을 기다렸다.
“혹시 말입니다. 루스웨나 측의 장군이 누가 나올지 알고 계십니까?”
“모르지요. 그쪽으로는 무지(無知)합니다. 아무래도 바리엘이 공식적으로 루스웨나를 공격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에리포니 왕이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좋습니다. 저는 이안 경의 전략을 채택할 만하다고 봅니다. 대신에, 조건이 있지요.”
“조건이요?”
“루스웨나 군단을 이끄는 자가 의심이 많고 영리하며, 신중한 성격일 것.”
“아아. 그래요. 그러면 좋습니다. 본래 이쪽 숲을 기점으로 길을 트려고 했는데, 아예 앞쪽부터 열어버리는 게 낫겠습니다.”
“길목이 갈라지기 전이요. 예예.”
“잠깐, 잠깐! 둘 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이안과 트웰러가 주거니 받거니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자, 노아가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지금 본국의 왕자를 두고 둘이서만 의견을 주고받다니.
이안과 트웰러는 동시에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고, 트웰러는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사과했다.
“송구합니다. 왕자님.”
“왜 숲길부터 유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앞, 그러니까 국경선 인접한 길부터 열어버리자는 것이오? 물론 루스웨나가 수도로 접근하는 걸 의도하는 바이지만, 그건 너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무혈입성도 정도가 있어야지, 국경선 활짝 열어 상대보고 들어오라 인사하는 것과 무엇 다르단 말인가?
게다가 혹여 루스웨나가 전술을 바꿔 수도로 접근하는 대신 인근 마을로 돌아가서 학살 및 건물을 파괴한다면, 이 모든 결정의 의미가 퇴색될 것이다.
“음, 왕자님. 한번 가정해 보시지요. 저와 왕자님은 아주 사이가 안 좋아요. 서로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고 말입니다.”
이안이 노아보고 진정하라며 손짓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이 마시던 찻잔을 내밀며 웃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제가 이리 친절하게 차를 권하는 겁니다. 따뜻할 때 드시라 손수 올리면, 왕자님께서는 마음 놓고 드시겠습니까?”
찰랑거리는 음료에 노아의 얼굴이 일렁거렸다.
답은 하나였다. 이것은 왕족이 아니라 귀족이라도, 아니 심지어는 평민이라도 경계하여 거절하지 않겠나.
“절대 안 마시지.”
“바로 그겁니다. 그럼 이를 대입하여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루스웨나는 클리포포드를 차지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들이닥쳤습니다. 이곳에는 바리엘의 지원군과 마법사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상황이지요. 한데, 국경에서 막는 자가 없네요.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숲과 인기척 없는 길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면, 루스웨나가 어떻게 행동할 것 같습니까?”
노아가 그쯤 하여 알아들었다는 듯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제가 제안했던 것은 루스웨나를 수도로 데리고 오는 법이지만, 거기에 트웰러 장관께서 수를 더해주신 것입니다. 루스웨나가 의심하도록 만들어 시간을 벌면, 바리엘에 추가 지원군을 요청할 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아, 그때는 지원군이라 할 수 없겠군요.”
전쟁의 소용돌이에 나라를 내던지는 것이니, 제국방위부를 비롯하여 아마 황궁친위대도 동원될 가능성이 높았다. 진의 위상이 황궁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것 같으니, 이만한 지원 요청은 문제가 되지 않을 터.
“루스웨나가 바로 들어와도 좋고, 국경에서 멈칫거리며 시간을 보내도 좋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저희에게는 좋은 기회로 만들 수 있어요. 그러니, 음.”
이안은 국경 가까이 있는 마을을 하나씩 짚으며 이곳을 서둘러 비우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처음에는 아주 소수의 인력으로 후퇴하는 척 길을 열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그럴 것도 없이 아예 모든 걸 정리해버리는 것이다.
“어떻습니까, 왕자님. 해 볼 만하지 않습니까?”
노아는 턱을 잡은 채로 곰곰이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의 말이 맞았다. 어차피 목적은 저들을 이쪽으로 가까이 유인하는 것. 그런데 되려 의심하여 안 들어온다면? 그만큼 좋은 것도 없다.
“트웰러 장관께서 말씀하신 대로, 조건이 몇 가지 충족되어야 할 것입니다. 국경 주위에는 의아할 정도로 인기척이 없을 것. 가늠할 수 없는 속임수 용도의 구조물을 세워두는 것, 그리고 루스웨나 측의 장군이 신중하고 경험이 많은 자일 것.”
“할 일이 많겠군요. 차가 식을 때까지 앉아있을 수 없겠습니다.”
트웰러는 차를 한 모금에 털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부하들은 계속해서 보급품을 추적하고 있으니, 다음번 해가 뜨거나 지기 전까지 또 다른 정보가 들어올 것입니다. 저는 바리엘에 보고서와 함께 추가 지원군을 요청하도록 하지요.”
“아, 지원군 요청은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트웰러 장관을 뵈었다는 것과 함께 이쪽 사정을 상세히 적어 올리는 게 좋겠어요.”
“이안 경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뜻대로.”
트웰러는 벗어두었던 갑옷을 다시 입으며 시간을 가늠했다. 지금쯤이면 부하들이 어느 곳을 지나고 있으며, 어떤 식의 추적을 이어가고 있을지 가늠하는 것이라. 그는 이안에게 손을 다시 내밀었다.
“보급품을 모두 회수하여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때는 식은 차를 마실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예. 트웰러 장관.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그럼, 왕자님께서도 무탈하시길.”
“고맙소. 장관.”
노아가 그의 손을 맞잡으며 감사의 뜻을 전하자, 트웰러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모든 것은 진 전하의 뜻입니다.”
그 순간, 이안은 진이 진정으로 황궁에 한 발 내디뎠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