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83
제383화. 왕들의 등장
“움직인다.”
아주 작은 중얼거림이었다. 하지만 넋 놓고 있던 장교들은 벌떡 일어나 이안의 곁으로 다가왔고, 병사들 또한 무기를 붙잡은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진영을 치고 버티고 있던 버고스 측 병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안은 아코렐라를 쳐다봤고, 그녀는 문제없다는 듯 두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왜, 왜 갑자기 움직이는 것일까요.”
“왜 지금껏 움직이지 않았는지를 묻는 게 옳은 질문 같습니다만. 버티면 불리한 측은 저쪽 아닙니까. 기다리던 무엇인가가 왔다는 의미겠지요.”
기다렸던 무엇이라 하면, 버고스 측의 지원군밖에 없었다. 다시금 지옥과 같은 전장이 펼쳐지겠구나. 장교가 병사에게 물었다.
“동쪽 경계선은 어떠한가?”
“예. 수비하던 병사들은 모두 철수시켰고, 인근 마을 주민들은 대피 중입니다. 도중에 루스웨나군이 도착하긴 했으나, 말씀하신 대로 지켜만 볼 뿐 진입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동향 파악 중입니다.”
장벽을 타고 내려오자마자 무언가 터졌던 것은, 마법사가 간단히 설치해둔 장치였다. 그것으로 적의 진군을 막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상해를 입힐 만한 위력은 없는지라 그저 위협용으로만 걸어둔 것이었다.
그것이 하루, 아니 단 몇 시간만이라도 시간을 벌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값어치를 다한 것이라.
“그쪽에서 수도로 접근하는 진군 속도만큼은 정확히 파악하십시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을 선점하기 위함이니, 그 속도와 거리 또한 우리가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장교가 멈칫거리며 이안을 돌아봤다. 지금 상황에선 별것 아니나, 클리포포드와 바리엘을 ‘우리’라는 말로 엮은 것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각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한들, 지금으로써는 등을 맞댈 수 있는 유일한 아군이었다 장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히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클리포포드의 그림자들은 훌륭합니다.”
“좋습니다. 창공에서 진영의 변화를 보고 오겠습니다. 아마 해가 뜨면 움직일 가능성이 있으니, 장교께서도 준비해 주십시오. 그런데 노아 왕자님은 대체 어딜 가셨답니까?”
“아, 그것이 잠시-”
“메이 사절 보러 갔습니다.”
난감해하는 장교 대신 아코렐라가 대답했다. 왕궁에서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메이가 다시금 전선으로 뛰어들기 위해 복귀한 것이다.
왕자는 돌려보내려 하고, 그녀는 남으려 하고. 아코렐라는 아주 볼만하다는 말과 함께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다녀오지.”
“직접 가십니까?”
“그래. 전해 듣는 것보다 그것이 나을 터. 마력석은?”
“현재 제 기준으로 왼쪽으로 살짝 치우쳤습니다.”
“음. 왼쪽이면 노아 왕자가 유격전을 펼쳤던 숲과 가까운데. 우선 알겠다.”
드르륵.
이안이 창문을 열자, 베릭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심심하고 몸이 찌뿌둥하니 자신도 데려가달라는 듯이 말이다. 창틀에 걸터앉은 이안은 그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무거워서 안 될 것 같은데.”
“뭐래. 나 가벼워.”
“나는 소란 피우면 손 놓을 게다.”
“응. 이안이가 하는 말은 진짜가 있지.”
그러자 아코렐라가 끼어들었다.
“진짜가 아니라 진정성이겠지. 똥강아지야.”
“알고 있어, 또라이!”
“저저! 저런 성질머리로 어떻게 먹고 사려나. 쯧.”
며칠 같이 있었다고 부쩍 친해진 모습이다.
이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베릭을 데리고 마력을 개방했다. 금성과 같이 아름답게 물드는 눈동자. 마력의 힘으로 휘날리는 머리칼. 마치 달의 신께서 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모습처럼 보였다.
장교들은 이안이 하늘로 날아오를 때까지 넋을 놓다가, 저 멀리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곤 창문을 닫아버렸다.
타앗.
똑똑.
“이안 님. 왕궁에서 무기가 도착했습니다.”
“이안 님은 방금 나가셨습니다. 무기 이쪽으로 갖고 들어오세요. 그거 어차피 우리 마법사들이 쓸 거니까.”
“앗. 넵. 그,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라고 방금 말했는데?”
“마력석 움직이면 호, 혼내시니까.”
“아아. 괜찮아요. 괜찮아.”
병사의 전언에 아코렐라가 고개를 내밀며 일렀다.
이어서 들어오는 장검과 단검 그리고 초소형 날붙이까지 아주 다채로운 무기들. 어찌하여 제조가 늦어지나 했더니, 이것 때문에 그런 것이라.
헤일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자였다. 특히나 마물 전투에 있어서는 더더욱. 합성 마물의 핵이 두꺼운 가죽 아래 있음을 알고 있는 터, 무기의 다양성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생각한 게였다.
아코렐라는 완벽하게 제련된 검 하나를 집어 들곤 찬찬히 살폈다.
“잘되었죠? 클리포포드는 무기보다 농기구가 주력이라 조금 걱정했는데, 예상보다 아주 매끈하게 잘 빠졌습니다. 대장장이들이 한숨 안 자고 혼을 태우고 있어요.”
서른 자루 남짓한 것 중, 흑색 검은 단 세 자루. 마력봉인석으로 만든 것이었고, 나머지는 다 호박색에 가까운 금빛을 띠고 있었다.
조명에 더욱 짙어지는 아름다움에 아코렐라는 무기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드갈의 냄새가 완벽하게 스며들어있었다.
혹여 다치기라도 할까 걱정한 병사들이 말리려 했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얼굴을 가까이하여 모난 곳이 없는지 살폈다.
“…헤일. 안 짤라도 되겠네.”
“네?”
마법사들은 나뉘어 배치될 것이다. 장벽을 지키는 이안 측과, 보급을 담당하며 최후의 전선을 막아내는 헤일 측으로.
아코렐라는 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여명이 터오는 것을 지켜봤다.
쉬익.
“소리 좋고. 닿기만 해도 베이겠다. 그쵸?”
한편, 이안은 베릭과 함께 조용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버고스의 진영에 횃불이 드문드문 켜졌다. 원래라면 상대 측에게 위치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한밤중이라도 최소한의 불만 피우는데 이리 대놓고 번져가는 것으로 보아, 움직임은 확정인 듯했다.
그 말인즉, 조만간, 아니 나아가 몇 시간 안에라도 장벽에 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안아. 근데 쟤들 왜 저렇게 갈라지냐?”
좌익과 우익이 완연히 나뉘고 있었다. 마치 가운데를 비워두려는 듯이 말이다.
이안은 더더욱 높게 날아 전체적인 움직임을 살폈고, 이내 눈썹을 까딱거렸다.
“이안아, 이안아아.”
“왜, 놓아달라고?”
“아니. 쟤들 왜 저렇게 갈라지냐고!”
베릭이 흠칫 놀라며 이안의 팔을 더욱 세게 붙잡았다. 다른 마법사들은 찡얼거려도 봐주는데. 이안이라면 혹시 모른다는 마음이 아주 조금 피어오른 게다.
이안이 등뒤로 해가 터오는 걸 보며 중얼거렸다.
“자리를 만드는 게지.”
“자리?”
“조금만 더 국경 쪽으로 가보자. 아마 버고스의 지원군이 들어설 자리를 만드는 것일 터.”
그들은 서쪽으로 날았다. 베릭은 자신의 발치 아래, 검은색 갑옷 입은 자들이 일렁이는 것을 새삼 신기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이안을 따랐다.
점령당한 바키 마을을 지나 국경 쪽에 가까워지니, 저 멀리 새까만 무엇인가가 보였다.
군단이다. 버고스에서 내려온 정식 군단. 그저 지원군이라 보기에는 그 수가 만만치 않다.
“와 개미 떼 몰려오는 것 같다.”
“베릭. 더 올라간다. 꽉 잡아.”
“…더? 왜? 이만하면 됐잖아.”
상대측이 얼마나 몰려오는지 보았으니까, 되돌아가서 준비하는 게 좋지 않겠나? 베릭이 그리 물었으나 이안은 대꾸 없이 더욱 서쪽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군단 한가운데, 크게 펼쳐진 버고스의 국기를 발견했다. 사람 수십 명이 받쳐 들며 옮기는 거대한 천. 검은색에 금실로 수놓은 버고스 왕가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왕이 직접 오는구나.”
장군, 바리엘로 치자면 장관일지라도 군기(軍旗)는 병사가 직접 드는 깃대까지만 허락된다. 저리도 장엄한 걸음은 오직 나라의 존엄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으니. 수많은 마차 중 어딘가에 필시 다몬이 타고 있으리라.
“단발이가 직접 온다고?”
“베릭. 여기서도 냄새가 나는가? 마물의 냄새 말이다.”
“음. 너무 먼데.”
베릭은 눈을 감고 집중했다. 하지만 특별히 맡아지거나 심장을 뛰게 하는 무언가는 없었다.
이안이 보기에도 합성 마물처럼 거대한 개체는 안 보였으니, 그게 의문이다. 왕이 직접 전선에 나설 정도라면 이전에 보았던 합성 마물 따위는 비교할 수 없을 만한 전력을 갖추는 게 일반적이지 않겠나? 수도를 뚫어버릴 셈인데, 바리엘의 마법사들이 주둔하여 지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 말이다.
이안은 점차 하늘이 밝아지는 걸 느꼈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동쪽으로 고개를 틀자, 산 사이로 터오는 태양과 분홍빛의 구름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몬 왕이 온다면, 에리포니 역시 올 것이라. 바리엘에 다시 전언해야겠다.’
이미 바리엘에서는 에리포니의 출정 정보를 입수하였지만, 아직 클리포포드에 있는 이안에겐 닿지 않았다.
진의 답신이 잉크를 먹은 채 그대로 말라버리지 않았던가. 혹여 답신이 오는 중일지, 아니면 황태자께서 사사로운 이유로 펜을 들지 않은 것인지, 이안은 알 수 없었다.
“이안아. 그런데 나 하고 싶은 게 있다.”
“무엇인데?”
“왕 모가지, 내가 따도 돼? 버고스든 루스웨나든 상관없어. 살면서 언제 또 왕한테 칼질 해보겠어? 안 그래?”
“글쎄. 나는 상관없는데 베릭 네가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구나.”
“어어? 나 바리엘 1등인디.”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왕. 그자들을 지키는 자는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자들이지.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거라. 대신 명령에 한하여서. 독단적인 행동은 위험하다. 네가 아니라, 무고한 자들이 말이다.”
“오케오케. 사실 나 그 단발이가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재수가 없달까.”
솨아아악!
베릭이 쫑알대며 연신 다몬을 씹어대는 동안, 이안은 웃으며 클리포포드 장벽으로 되돌아왔다.
해가 완전히 터왔고, 이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뉜 공간에 새로운 군단이 들어섰다. 단 한 순간에, 버고스의 전력은 수 배로 늘어났다.
* * *
“그래서, 여기서 멈췄다고?”
에리포니는 어이없는 눈빛으로 장교들을 노려봤다.
텅 비어있는 국경선. 저지하는 이 하나 없건만 무언의 폭발로 인하여 발걸음 하나 내딛지 못했다고 하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에리포니는 긴 머리를 하나로 높게 올려 묶은 다음, 금갑을 착용했다.
“아무래도 마법사님들이 오셔서 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 아래, 대기하였습니다. 섣불리 들어섰다가 괜히 전력에 손실이 있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전하께서 명령하신 것은 장벽을 허물라는 것이었기에…….”
“다물라. 변명은 그대를 더욱 하찮게 만들어.”
왕이 이끄는 군단이 도착할 때까지 어떠한 조치가 없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에리포니는 당장이라도 장교의 목을 베고 싶다고 생각하며, 엘더트를 불렀다.
“엘더트, 마법사들을 데려와.”
“예. 전하.”
스윽.
마차 뒤를 바짝 따라붙고 있던 루스웨나의 마법사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다양했다. 그들은 정복을 갖춰 입은 채로 고개 숙여 에리포니 왕 앞에 나섰다.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는가? 바리엘에 이안이라는 작은 마법사가 있거든. 근데 그 힘이 예사롭지 않은 자라. 혹여 함정인지 살펴보라.”
“실례하겠습니다.”
지이잉. 지잉.
노인 여성이 먼저 앞으로 나서며 땅을 두 손으로 짚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과 맞붙은 곳부터 시작하여 빛이 퍼지더니, 형체를 알 수 없는 나무들까지 타올랐다.
“음.”
“함정인가?”
“함정이라기보다는 속임수입니다. 지나갈 때 폭발이 있을 수 있으나, 문제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나저나, 이자의 힘이 정말 강하다는 게 느껴지는군요. 전하.”
“말했잖은가. 작은데 예사롭지 않다고.”
에리포니는 거대한 황금빛 활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놓아버리는 활시위.
화살은 엄청난 바람을 가르며 눈속임용 구조물로 내다 꽂혔고, 이내 반짝, 하는 작은 폭발과 함께 나무가 박살 났다.
그녀는 제 키만 한 활을 가볍게 들어 올리며 명령했다.
“…전진한다. 클리포포드 수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