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9
제39화. 전투의 시작
“우에에엑.”
베릭은 발작하듯 일어나 헛구역을 해댔다. 옆에서 책을 읽던 이안이 물을 챙겨주며 그를 지켜봤다.
막사에 돌아왔을 때는 의원의 말대로 ‘정신만’ 겨우 차린 상태였다. 몸에 구멍 뚫린 것치고는 그것도 대단하다 싶었는데…….
“괜찮나?”
“속 울렁거려…….”
“대체 왜?”
“몰라. 의원이 약에 술 탄 거 아님?”
시간이 갈수록 놀라울 정도로 호전되는 몸 상태. 여전히 침대 아래로 내려올 수는 없었지만, 말하는 본새나 태도로 보아 목숨은 확실히 건진 것 같다.
“허리는 좀 펼 수 있겠어?”
“아예 힘이 안 들어가는데. 한번 줘볼까?”
“안 돼. 상처가 터질 수 있다.”
“윽. 무슨 약초를 이렇게 많이 쑤셔 넣었어?”
베릭은 손끝으로 느껴지는 풀 찌꺼기에 질색하며 꿍얼댔다.
이안은 빈 컵을 든 채 그를 찬찬히 살폈다. 마검사가 일반인보다 전투력이나 회복력이 월등한 건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는데…….
‘이 정도였나?’
의아하다 못해 경이로울 정도로 쾌유하는 속도가 엄청났다. 의원도 놀란 눈치였으니, 천려족도 이러진 않을 터.
“베릭. 너 부모의 얼굴을 알고 있느냐?”
“응? 알고 있지. 다 죽었지만, 기억은 해.”
날 때부터 천애 고아가 아닌지라, 제 어미와 아비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추억이라 하기에는 더러운 기억도 확실히 간직했고.
베릭의 대답에 이안은 더더욱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았다. 차라리 모른다고 하면 인외의 피가 섞이지 않았나 의심이라도 할 터인데 말이다.
“…그랬어.”
“응?”
이안이 골똘히 생각하는 동안, 베릭이 중얼거렸다.
“왼쪽 오른쪽 둘 다 쑤실 걸 그랬다고. 시발 새끼, 내 옆구리에 구멍 홀라당 내놓고 지는 편히 눈감았다 이거지. 이름이 뭐더라? 벨?”
베릭은 서로 한방씩 주고받은 게 억울해 보였다. 벨은 죽었고, 저는 살았으면서. 이안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베릭은 더더욱 이를 갈았다.
“기사 새끼들, 평소에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구먼. 훈련을 하긴 했나 봐. 그나저나, 브라츠로 언제 돌아가?”
“곧.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어.”
“응.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중앙군이 내려오고 있고, 데르가가 병사를 결집했다는 정보까지 들었다. 수가 접경지에서 정보를 보내주고 있지만, 실시간이 아닌 터라 자세히 알 수가 없어. 그래서 최대한 빨리 떠날 것이다.”
“좋아좋아. 여긴 너무 덥다고.”
“베릭. 널 데려갈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뭐?! 왜?!”
베릭이 고개를 휙, 돌렸다가 반사적으로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일반인이었다면 죽는 게 당연할 정도로 깊은 상처 아니던가.
“걷지도 못하니까.”
“이거 내일이면 걸을 수 있을 듯.”
“걷는 게 능사가 아니다. 검을 쥐어야 해. 브라츠의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이곳에서 치료에 전념하거라.”
“싫어!”
이안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리치는 베릭. 하지만 이내 고통스럽다는 듯 발라당 누워 몸을 말았다..
“아오, 씨…….”
“싫어도 어쩔 수 없다.”
“어어어? 이거, 나 이용하고 버리네. 파렴치한, 배신자, 똥 덩어리.”
이안이 희미하게 웃자, 베릭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영락없이 고집 피우는 아이의 모습이다.
“혹시 네가 신세 졌던 주점의 주인이 걱정된다면, 내가 따로 알아보마.”
떠나올 때 저택 일을 그만두라 이르긴 했지만, 해나와 사용인들이 그리했는지 모르겠다. 분명 전투가 나면 암묵적으로 중립 구역인 은행가 근처로 피신할 터. 이안의 위로에 베릭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러면?”
“중앙군! 백작 사병! 거기에 천려까지 껴서 한판 제대로 붙는데 나 혼자 여기서 손가락이나 빨라니. 거, 너무 한 거 아니냐고!”
전장을 누비며 지르는 기합, 시원하게 썰리는 칼맛, 온몸으로 부딪히며 생사를 오가는 짜릿함. 그 모든 걸 기다리고 기다려왔단 말이다.
“절대 반대. 반박 안 받음. 나 들고서라도 가. 솔직히 따지면 너랑 나, 엉? 사제지간 아니냐? 선생이 어떻게 제자를 버려어!”
“베릭. 상당히 놀랍구나. 선생 대접이 이딴 식이라니. 엄밀히 따지고 보면 주종관계인데…. 뭐 그것도 놀라운 건 마찬가지다.”
“마력 쓰게 해준다 했잖아! 하루하루가 아깝다고!”
“기억 안 나는 건가?”
“뭐가? 딴소리 하기만 해봐, 콱 씨…….”
“벨과 싸울 때, 스스로 마력을 냈다.”
“…누가?”
“네가.”
이안의 말에 베릭이 눈만 끔뻑거렸다. 전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보아, 필름이 중간중간 나간 게 분명했다.
이안은 웃으며 그의 이불을 정돈해 주었고, 이내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네르사른을 발견했다.
“이안 경.”
“네르사른 님.”
“잠시 바깥으로.”
서둘러 밖으로 나가자 카칸티르가 매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리고 깊게 들이쉬는 숨. 비릿한 피 냄새가 역력했다.
“시기가 완벽하다.”
“카칸티르 님?”
“이안 경. 데르가가 사병으로 저택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하오. 조사단에서는 농성하는 중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중앙지원군을 기다리며 기회를 노리는 것 같네만.”
“조사단은 말 그대로 조사를 위해 먼저 내려온 선발대입니다. 전면전으로 대응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지요. 중앙군도 지금쯤이면 당도했겠습니다.”
“문제는 영지민들의 기류인데.”
“영지민들이오?”
이안의 물음에 카칸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영지 중심으로 모여 무기를 잡았다 하네만.”
“아아. 그곳에는 은행이 있어 그렇습니다.”
“은행?
덩달아 긴장했던 이안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 그들끼리 내부 분열이라도 일어난다면 정세를 읽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삼파전이 아닌, 사파전으로 가면 그만큼 불확실성도 높아질 터.
“바리엘의 금융 인프라를 담당하는 하이만 뱅크라는 곳입니다. 어느 지역이든 무조건 하나 이상씩 입점해 있습니다. 아마 디온이란 지역일 겁니다.”
“우리는 브라츠 뒤쪽의 지역을 잘 모르네.”
“디온에서 반란이 일어난 적 있는데, 소란 속에서 은행이 아주 박살 난 적이 있습니다. 그에 따라, 하이만 뱅크는 디온 반란과 관련 있는 자에게 은행 업무를 거부하였죠.”
반란 가담자들은 예치해 두었던 재산들은 물론이고, 모든 경제적 활동을 현물로만 쓸 수밖에 없었다. 동전닢 수백 킬로그램을 지고 옮기거나, 소실되어도 추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바리엘에는 은행업을 하는 가문이 딱 거기뿐이지요. 반란 가담자들도 별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덕분에 몇 년 안에 반란군의 기세가 기울었고, 바리엘은 반란군 진압에 성공했습니다.”
“그 은행이 성역이라 이거군.”
“그렇습니다. 신전과 더불어 불가침의 영역입니다. 영지민들이 그곳으로 몰려든 연유가 바로 그것일 겁니다.”
그 말은 곧, 브라츠 영지에 물드는 피 냄새가 만만치 않다는 걸 뜻했다. 이안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은행의 가호를 받지 못한 영지민들은 시간이 갈수록 데르가의 편으로 돌아설 것입니다.”
바리엘의 중심은 황궁이었으나, 브라츠의 중심은 데르가였다. 백작의 사병이 가족이었고, 이웃이었으며, 친구였으니. 터전이 망가질수록 이전의 삶을 찾으려는 욕구가 강해질 것이다.
“바리엘로 들어간다.”
“바리엘로 돌아가겠습니다.”
카칸티르와 이안이 동시에 말하자, 네르사른을 비롯한 부하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다시금 시선을 나누며 같은 말을 내뱉었다.
“바로 내일.”
* * *
“메렐로프에서는?”
“서신 전달도 거부했다 합니다.”
“개새끼들. 이래서 장사치들은 상종할 게 못 돼.”
데르가는 이를 바득거리며 이웃 영지인 메렐로프 백작을 떠올렸다. 변경을 책임지고 있는 데르가처럼 메렐로프 역시 그러했다.
다만, 천려족과 대립하고 있는 브라츠와 달리, 메렐로프는 하완 왕국이라는 이국의 교류지로서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그쪽은 어차피 병사도 시원치 않습니다. 다들 상업에 종사하는지라 일꾼도 영 별로고요. 이참에 중앙군 밟고 독립하면 그쪽도 밀어버리는 게 낫겠습니다.”
데오가 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독립하면 필연적으로 영지의 몸집을 불리기 위해 주변 영지를 잡아먹어야 했다. 이를 잘 아는 메렐로프 백작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으나, 데르가는 뻔뻔하게도 배신감을 느꼈다.
병사를 보내지는 않더라도 중재하기 위해 나설 수는 있을 터인데, 메렐로프는 불똥이라도 튈까 봐 모르쇠, 이쪽으로는 눈길조차 안 주는 상황이다.
“부숴라! 더 큰 나무를 가져와!”
“화살촉에 기름을 묻혀! 불을 붙여!”
“쏴라! 계속 쏴라!”
“와아아! 나와라, 개새끼들아!”
“나아가라! 계속 나아가라!”
“으아아악!”
쿵! 쿵쿵!
천려족을 상대할 생각만 해왔지, 이렇게 저택을 함락해야 할 처지가 될 줄은 몰랐다. 데르가는 공성기 하나 없는 상황에 어이없어하면서도 계속해서 불화살을 쏘아 올렸다.
부우우. 부우우우.
그때였다. 묵직한 뿔나팔 소리가 브라츠에 닿았다. 모두 일제히 멈칫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먼 언덕 지평선, 개미처럼 뭔가가 바글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황궁의 깃대를 든 중앙지원군이었다. 데르가는 인상을 찡그리며 사병들을 더욱 거세게 닦달했다.
“서둘러라! 서둘러!”
“저쪽 끝부터 이쪽까지 구덩이를 더 깊게 파라!”
“이쪽으로 오는 다리를 막아버려!”
“빨리, 빨리!”
중앙군이 당도했다는 걸 저택 안에서도 인지했는지, 드디어 안쪽에서도 반응이 보였다. 브라츠의 깃발이 내려가고 황궁 조사단의 깃발이 걸린 것이다.
“개새끼들이…….”
데르가는 끓어오르는 분노에 이성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다 죽여버리겠다. 자신의 영지에 밀고 들어온 외부인을 깡그리 산 채로 태워버리겠노라.
“가자! 다 죽여라!”
“이쪽 고지를 최대한 끼고 움직여!”
“죽여라아아아!”
한평생을 살아온 터전. 지형에 관해서라면 눈 감고도 훤했다. 제아무리 중앙군이라 한들, 전투에 있어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쉬이이익.
거대한 매들이 브라츠 영지 상공을 크게 돌았다. 하지만 사병들은 죽음을 몰고 오는 적군을 보느라 알아채지 못했으며, 오직 신을 바라보고 있는 영지민들만 매의 존재를 확인했다.
“들여보내 주시오! 은행 문을 좀 열어주오!”
“아아. 밀지 말라니까!”
“야! 나 여기 직원이야! 시발롬들아!”
“청소부가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어? 비켜!”
“살려줘! 중앙 놈들이 저택 사람들을 죄다 죽였대! 불태워 죽였다고! 군대가 오면 사지를 찢는다 했어!”
“아아악! 밟지 마!”
하이만 뱅크가 들어서 있는 포트로가. 불가침 성역으로 들어서려는 영지민들의 절박한 소리가 곳곳에서 울렸다. 집을 떠날 수 없는 자들은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그고 기도를 올릴 뿐이다.
“누나.”
“응?”
두 손을 맞잡은 채 기도하던 해나가 동생의 부름에 눈을 살며시 떴다. 손바닥만 한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줄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동생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엄청 커다란 새다.”
“새…….”
해나 역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 해나는 곧이어 저택에서 봤던 천려의 새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