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90
제390화. 별채에서 울었던 날
황제께서 별채에 들어간 뒤 나오지 않는다 하였다. 나움은 읽던 책을 덮은 뒤 창문 밖을 쳐다봤다. 황제의 시종들이 줄지어 별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모두가 눈짓으로 그를 재촉했다. 황제께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으니, 나움 그대가 한번 들어가보라고. 황제가 그어놓은 선을 유일하게 오갈 수 있는 자가 그대라면서.
‘황제 폐하께서는?’
‘기별이 없으십니다. 나오기 전까지는 들지 말라 명하셔서, 이리 있습니다.’
‘얼마나 되었지?’
‘두어 시간이 지나갑니다. 무슨 일이 있을까 걱정되온데 방도가 없는지라…….’
‘비켜라. 내 들어가보겠다.’
‘하오나 폐하께서-’
‘폐하가 경을 치시면 내 직접 받아내리라.’
겉으로는 말리는 척하지만 시종들은 나움의 등장을 반갑게 여기며 길을 터 주었다. 조용한 별채. 나움은 이곳저곳을 확인할 것 없다는 듯 바로 걸음 하여 안쪽으로 들어섰다.
이안이 황제가 되기 전부터, 함께 공간을 나누었던 곳.
통창을 통하여 사계절의 변화가 그림처럼 들어오는 곳.
끼이익.
나움은 무릎을 모은 채 고개 숙인 이안을 발견했다.
이안은 몸을 움찔거리긴 하였으나,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자신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이곳에 올 자는 세상에 둘밖에 없었으니까. 크로니, 아니면…….
‘나움.’
‘폐하, 어찌 바닥에서 그러고 계십니까.’
‘…나가라.’
하지만 나움은 자연스럽게 그 맞은편에 앉아 책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실까. 잘 견디시던 분이 어찌하여 이번에는 슬픔을 이리 쏟아내고 계실까. 나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술이라도 한잔 갖고 올까요?’
‘업무 시간이거늘.’
‘뭐 어떻습니까. 바리엘의 기둥이신 폐하께서 상심에 잠겨있는데. 이럴 때를 위하여 신께서 술을 만드신 것입니다.’
장난스러운 나움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었다. 볼에는 자국이 나 있었으나, 이미 오래전에 말라버린 듯했다. 이안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뱉어냈다.
‘왜 그러십니까. 크로니 그 작자가 또 무어라 하더이까? 확 혼내버릴까요.’
‘…그대가 어떻게.’
‘우리는-’
나움이 정정했다. ‘그대’가 아니라, ‘우리’라고.
‘우리는 마법사지 않습니까. 게다가 폐하는 바리엘의 주인이시고요. 천하에 폐하께서 못 하실 일은 없습니다.’
이안이 어깨에 턱을 고정하며 창밖을 쳐다봤다. 싱그러운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렸다. 안 그래도 반짝거리는 햇살이 그 움직임으로 인해 끝없이 빛났다.
날이 이렇게 좋은데, 이안의 세상은 침몰하는 중이었다. 가슴 한쪽, 황제로서의 무게를 잔뜩 실은 채.
‘…웰빌라 전투에서 죽은 자들이 천 명을 웃돈다.’
‘폐하.’
‘대부분이 어린아이였어. 시체를 잡아드는 병사들의 손이 가벼운 게, 나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
‘폐하. 기습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살이었고요.’
이안이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국경에서 세력을 확장 중인 도적 떼가 벌인 사건이었고, 이안이 사찰을 나갔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난 사안이었다.
흉흉하다며, 모두가 수군거리긴 했어도 이안을 입에 올리는 자는 없었다. 몇몇 반대파 세력을 제외하고.
‘바리엘에서 내가 못 할 일이 무엇 있는지 물었지. 나움. 그 말인즉, 바리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나로 인해 일어난다는 뜻이다. 내가, 내가 조금만 더 주의했다면, 도적 떼를 그때 모두 소탕하였다면-’
‘폐하.’
‘모든 게 내 부덕이니, 죽음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나움, 제국민의 슬픔이 너무 버거워.’
이안이 다시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적요한 한숨만이 계속 흘러나왔다. 나움 역시 그 맞은편에서 함께할 뿐이었다.
작은 아이여. 황제의 자리는 그런 것이라고, 미리 이르지 않았던가요. 그대는 잘해냈고, 잘하고 있었으며, 결과와 상관없이 그 무게를 느끼는 것 역시 황제의 자질 중 하나이니, 앞으로도 잘하실 것입니다.
나움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참아냈다. 지금은 황제 이안이 슬픔을 쏟아낼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해주고 싶은 것은 단 하나.
‘무게를 짊어지심은 좋습니다. 다만, 반대파의 맹목적인 비난은 흘리십시오. 그들이 폐하의 탓이라고, 폐하께서 부덕하여 일이 이리되었다고, 민심이 흉흉해졌다고 지껄이는 모든 소리는 헛소리로 치부하십시오.’
‘언제는 상대측의 의견도 수렴할 줄 아는 자가 되라더니.’
‘의견과 개소리는 다릅니다. 폐하.’
이안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자, 나움 역시 싱긋 웃었다. 나움이 가져온 책을 펼치며 물었다.
‘책, 읽어드릴까요?’
‘밖에서 기다리는 자들이 많아.’
‘기다리는 자들은 염려치 마세요. 마땅히 해야 할 저자들의 일입니다. 하오나, 강건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오롯이 폐하의 일입니다. 아직, 폐하의 눈가가 붉습니다.’
나움이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러곤 다정하면서도 단단한 어투로 마법서를 읽어갔다.
높낮이가 잔잔하여 이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지러이 섞여드는 잡념들을 나움의 목소리로 지워내 갔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나움은 계속해서 책을 읽었고 이안은 그저 들었다. 가끔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순간이 필요하다는 걸, 이안은 깨달았다.
* * *
“흐아아압!”
채앵! 챙!
크게 흔들거리는 몸. 이안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을 살짝 떴다.
베릭이 자신을 안은 채 몰려드는 적군을 베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베릭을 도와 호위하는 클리포포드 병사들. 자신을 에워싸고 삼국(三國)이 혈전을 벌이고 있는 게라.
하지만 이안은 손끝조차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그저 튀어오르는 피와 고함, 그리고 먼지 따위의 틈새로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과 노인의 힘으로 어지러웠던 하늘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맑고 밝았다. 마치 그날의 별채에서 보았던 하늘과 같다.
“어? 이안아아! 정신 들어?”
“…….”
베릭은 이안이 눈뜬 것을 확인하고 소리쳤으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안의 눈가에서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정작 자신은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말이다.
힘없이 축 늘어져, 마치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베릭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걸 애써 무시하며 연신 검을 휘둘렀다.
“이안이 눈떴다! 어서! 어서 길 터!”
“바리엘의 마법부 장관이 정신을 차렸다! 서둘러라!”
“서둘러 죽여라! 힘을 되찾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
“저리 꺼져! 젠장!”
“으아아악! 죽어! 죽어!”
채앵! 챙! 챙!
촤아아악!
이안은 그저 베릭에게 몸을 맡긴 채 멍하니 있었다.
정신계열의 마법을 쓰면 모두 저런 것인가? 고하(苦河)라는 마법을 시전할 때, 마법사들의 반응으로 보아 적잖은 후유증이 있을 게 분명했다. 노아는 병사들에게 연신 명령했다.
“길을 터라! 장벽 안으로 피신시켜! 그리고 잠시 후퇴한다! 퇴각! 퇴각을 일러라!”
“하지만 왕자님. 바리엘 측에서 마검사들이 왔습니다! 힘을 더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마검사의 대장도 뜻하는 바가 있을 게다. 요청하면 들어주되, 우선은 이안 경과 마법사를 모두 확보하는 게 먼저다! 절대 마법사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들은 바리엘인, 우리를 위해 그리고 타국을 위해 희생한 자들이다! 클리포포드는 이에 보답할 의무가 있어!”
“예! 왕자님! 물론입니다!”
“왕궁에 기별을 넣어라! 남은 마법사들을 모두 결집하라 일러!”
“저쪽! 왼쪽에 마법사가 끌려갑니다!”
“잡아라! 버고스 측으로 마법사가 넘어갔다!”
“추적해! 놓쳐서는 안 된다!”
아수라장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마법사들을 차지하기 위하여, 세 나라가 격돌했다.
그 소란에 마법사들도 조금씩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몇몇은 이드갈 창에 몸이 꿰였고, 몇몇은 머리채가 붙들려 끌려갔으며, 또 몇몇은 자신의 몸이 누구 손에 쥐어진 지 모른 채로 기절해있었다.
“뭣들 해!”
에리포니가 멍하게 서 있는 자신의 마법사들을 재촉하였으나, 그들은 꼼짝 않고 지옥을 지켜봤다. 마법사들을 대하는 저들의 태도가 무궁한 두려움을 가져온 것이다.
게다가 무리의 지도자 격이었던 노인이 금기의 마법으로 죽어버려 한 줌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
루스웨나를 위해 참전하였으나, 정작 그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어린 자이라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에리포니에게 대들었다.
“전하! 아무도 죽지 않게 할 거라 하셨잖습니까! 전쟁에 나가기만 한다면, 우리를 모두 일상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요! 할머니를 살려내십시오!”
“어린 것이-!”
짜악!
에리포니의 부하가 자이라의 볼을 내려쳤고, 마법사들이 아이를 감싸 안았다. 그들의 눈매에 분노가 일렁였다.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는가? 죽고 죽이는 게 전쟁이다. 네 할미는 맡은 바를 다하여 죽었으니 루스웨나의 영광을 가져갔으나, 네놈은 감히 왕께 대들어 그에 흠을 내는구나!”
“우리는 그저-!”
“그리고 누가 죽으라 하던가? 노인이 스스로 결정하여 루스웨나에 숨을 바쳤다.”
“개소리 마시오! 스스로? 이 자리에 스스로? 그걸 정녕 말이라고 하는 건가?!”
“어허, 소란 떨 틈 없다.”
에리포니가 그만하라는 듯 활대로 격앙된 분위기를 잘랐다.
그녀는 마법사들을 힐끗거리며 혀를 차댔다. 왕궁 소속이 아니다 보니, 이런 식으로 문제가 생길 줄 알았다. 바리엘은 황궁 직속 부하들인지라 명령 이행에 이의가 없건만. 쯧.
전쟁이 끝나면 왕궁 조직부터 개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안을 비롯한 마법부 전체를 무력화하였으니, 되었다. 시간 없으니, 전진하라.”
“예. 전하!”
에리포니의 명령에 흑갑옷 병정들이 성큼성큼 뛰어나갔다. 혼란을 잠재울 거대한 힘이다.
하지만-
콰아앙!
쿵!
그 앞을 막아서는 제이럿과 황궁친위대. 대지가 갈릴 만큼 강력한 착지였다.
제이럿은 마력을 개방하여 자신의 검을 불러들였다. 그의 손 위로 먹구름이 몰려들며, 한 줄기 번개를 만들어냈다. 이윽고 손 틈으로 번쩍이는 긴 물체. 마검이었다.
“다들 잘 들어라.”
처억.
다른 마검사들 역시 마찬가지. 몸을 낮게 하고 저마다의 마검을 불러냈다.
“우리의 현 목적은 마법사들의 무사 귀환. 그리고 흑갑옷의 절멸이다.”
“예. 대장!”
제이럿이 손짓하자, 마검사 다섯이 등을 돌려 혼돈 속에 몸을 던졌다. 유독 발놀림이 빠른 자들이었으니, 마법사들을 쉬이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남은 자들은 흑갑옷과 대적하며 살벌한 미소를 지었으니. 모두의 눈빛이 반짝였다.
“흑갑옷은 체투르 구역에서 본 적 있지. 사사건건, 바리엘의 앞길에 방해되는 것들이로다.”
“뭣들 하는가! 흑갑옷으로 마검사를 제압할 수 있다! 두려워 말고 나아가라!”
“일동-!”
처억!
제이럿은 흑갑옷과의 각개전투가 무리라는 걸 알았다. 마검은 흑갑옷을 뚫지 못하기에, 다른 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제이럿은 그 수가 무엇인지 잘 알았다.
바로 경험.
경험이야말로 최고의 무기요, 전술이다.
‘대원 여섯이 동시에 두 합을 치면 갑옷이 박살 난다.’
하여, 자신을 중심으로 목표 대상을 동시에 파괴하는 것. 경험에서 비롯한 과거의 작전을 다시금 펼칠 것이다.
촤아악!
제이럿이 앞서자, 마검사들이 일제히 따라 올랐다. 바람이 날카롭게 갈렸다. 눈 깜짝할 사이 그들은 수십 미터를 도약해 흑갑옷 바로 앞에 다다랐다.
제이럿은 번개와 같은 기세로 검을 내려쳤고, 이어서 부하들도 그 뒤를 따라 연달아 타격했다.
채앵! 챙! 퍼억!
동서남북 사방에서 일제히 쏟아지는 하나의 공격. 간결하면서도 완벽하게 흑갑옷을 타개해갔다.
에리포니는 어이없는 낯으로 그걸 지켜봤고, 이내 부하들에게 소리쳤다.
“새로운 활을 가져와라!”
“아, 네!”
망할 바리엘 놈들 같으니라고.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든다. 에리포니는 새로운 활대를 잡고서 전장을 둘러봤다. 이안이 어디 있지? 이안, 이안, 이안…….
‘저기다!’
혼란의 중심. 베릭이 이안을 안아 든 채 클리포포드 진영으로 막 들어서려는 순간이다. 에리포니는 집중하여 한쪽 눈을 감았고, 정확히 이안의 심장을 겨누었다.
꽈아악!
“화살 마력을 넣어라! 마법사!”
에리포니가 소리쳤으나 반응이 없다. 그녀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뒤돌아, 이내 화살을 아이의 머리에 겨누었다. 자이라의 머리였다.
“뭐 해? 마력 넣으라고.”
“…전하! 아직 아이입니다!”
“알고 있다. 그래서 내 친히 두 번 말하고 있잖은가.”
“제가, 제가 넣겠습니다. 부디 자이라를 물려주십시오.”
마법사가 비틀거리며 자이라를 보호하려고 하자, 아이가 그 손길을 쳐냈다. 그러곤 눈을 날카롭게 뜨며 화살촉을 꽉 움켜쥐었다. 손 틈으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지이잉. 지잉.
금빛으로 물드는 눈.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중얼거렸다.
“예. 넣어드리지요. 마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