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92
제392화. 내면의 이안
노을과 함께 적요가 내려앉았다.
살아남지 못한 자들의 시체가 발 디딜 틈 없이 널브러졌고, 부서진 창과 화살 그리고 검 따위가 꼿꼿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 위로 까마귀 떼가 날아들었다. 놈들은 허공을 몇 번 돌더니, 완연하게 숨 죽은 땅이라 여기고 천천히 내려앉았다.
피비린내와 까마귀 울음만이 가득한 장벽 앞 대지. 기름진 흙과 싱그러웠던 풀은 이리저리 밟히고 채여 그 모습을 잃어버렸다.
장벽 위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클리포포드 병사는 한숨을 내뱉었다. 전쟁이 끝나도 문제인 게, 저 시체들을 다 어찌 수습할 것인가? 저들 중에는 연고 모를 타국인은 물론, 자연의 섭리를 벗어난 혐오체도 섞여 있을 터인데. 이러나저러나 클리포포드의 안방은 불순물 잔뜩 섞인 구정물로 더럽혀지리라.
“움직임은 좀 있나?”
“아, 왕자님.”
노아 왕자가 천천히 다가와 망원경을 들었다. 정면에는 버고스 진영이, 그리고 우측에는 루스웨나의 진영이 자리했다.
차라리 겨울이었다면 농작물 걱정도 없었을 것이고, 클리포포드의 칼바람이 병사가 되어 저자들의 숨을 거두었을 터인데. 여름이 다가오는 게라, 밤바람에도 습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버고스와 루스웨나의 접선은?”
“이쪽에서는 아직 파악된 바가 없습니다만, 계속 정찰을 돌리는 중입니다.”
“왕끼리 필시 밤을 틈타 만날 것이다. 그들이 나눈 대화 내용은 아침과 함께 실행될 터. 특임대를 준비하라. 밤은 저들이 웅크리는 시간이지만, 되려 우리에게는 기회라.”
휴전에 들어갔다고 한들, 낮이 되면 다시금 전투가 행해질 것이다. 그 시작을 누가 먼저 하는지에 따라 전세가 달라지겠지.
지리에 익숙한 클리포포드가 두 나라 간 접촉을 막아내면서 2차 전투 시작을 끊어내는 편이 나았다. 전력의 주축이 되는 마법사와 마검사들은 또 다른 문제겠지만.
노아는 병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다음 장벽을 내려왔다.
끼이익.
문이 열리자, 마법사들과 마검사들의 시선이 노아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입 밖으로 인사를 꺼내지 않았다. 그럴 힘도 없었고, 기분도 아니었으니.
“이안 경은?”
“아직 주무십니다.”
곧은 자세로 쌕쌕거리며 자는 이안.
베릭은 여전히 그 옆을 지키며 엎드려 있었고, 마법사들은 한숨을 내쉰 채 제 붕대를 갈아댔다.
“아파, 살살 좀 해봐.”
“다들 복귀한 건가?”
“아니요. 다섯 명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생사도 모르겠고요. 마검사들이 눈에 보이는 자들은 모두 구출하였는데, 틈을 놓쳤거나 아니면… 저 시체 더미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제이럿이 궐련 연기를 잘게 내뱉었다.
다섯 명. 솔직히 이르자면 그들은 임무를 완수한 줄 알았다. 전장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자들을 모두 무사히 데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수를 세어보니 다섯이 비더라, 이는 혼란 속에서 마법부 인원 파악이 불가했던 탓이다. 제이럿이 궐련을 비벼끄며 일렀다.
“장벽 밖에서 느껴지는 마력이 희미하니, 살아있는 자가 있긴 할 겁니다.”
“루스웨나 마법사의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건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딱 마주했을 때 서로 어느 나라 출신인지 짐작하는 것처럼요.”
제이럿의 뒤로 맥심 트웰러가 모습을 보였다.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고 있었는데, 그 주름 사이에 눌어붙은 핏자국만큼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바리엘 마법부의 불능은 저들에게 기회니, 낮과 함께 행동을 보일 것입니다. 이안 경께서도 심신이 힘드시어 명령을 내리기 힘들 터. 그, 헤일 대장이라 했나?”
“예. 그렇습니다.”
이안의 옆에서 마력을 넣어주던 헤일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 전까지 이안 경이 깨어나지 않으면 그대가 대리하여 마법부를 지휘하게. 우리에게는 서로 의견 나눌 수장이 필요해.”
제국방위부, 황궁친위대, 그리고 마법부의 주요 인물이 모두 모였다.
맥심은 따뜻한 술을 단숨에 털어버리더니, 씁쓸하게 마법사들을 돌아봤다.
“그래서, 당장 내일 맞설 수 있는 마법사는 몇이나 되지?”
“더 지켜봐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외상을 입은 자들은 모두 이드갈 무기로 인하였는데, 부상 정도에 따라 회복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코렐라 대장 역시 증폭제를 새로이 만들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제이럿 대장. 황궁친위대에서 더 지원할 수 있지 않소?”
“불가합니다. 친위대는 황제 폐하를 보호하고 모시는 부서입니다. 진 황태자께서 특별히 허락하시어 파견되었으나, 이것이 최대한입니다. 삼대장 중 두 명이 황궁 밖으로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제이럿은 그리 말하며 바르사베를 쳐다봤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옆구리를 지혈하는 중이었다. 눈 마주치자 어색하게 웃긴 하였으나, 그 낯에서 고통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래. 그러면 바리엘 지원군이 도착하는 게 현재로서는 최선이겠군. 루스웨나의 배후로 오면 좋을 터. 내 생각에는 합성 마물보다는 마법사의 존재를 더 신경 써야 할 것이라. 루스웨나를 먼저 잘라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치익.
맥심이 궐련을 물며 중얼거렸다.
“게다가 본국과의 거리도 버고스보다는 루스웨나가 더 멀지 않나? 보급이 끊어지면 제일 힘든 것도 루스웨나 쪽이거든.”
스윽.
그때, 클리포포드의 장군이 손을 들었다.
“저는 클리포포드 소속 대장 사모보입니다. 장관님의 견해도 타당합니다만, 저는 반대입니다. 보급 거리가 멀다는 것은 그만큼 전쟁 수행에 있어서 시간이 걸린다는 뜻, 당장의 위협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루스웨나는 잠시 미루고, 버고스를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합성 마물을 비롯하여 다른 마물이 유입될까 우려됩니다.”
“아, 그 얘기 좀 자세히 해보지. 클리포포드 아래 균열이 있다면서? 왕궁에서는 조사를 따로 실시 중입니까, 왕자님?”
“그렇긴 하지만, 우리에게는 마법의 흔적이 끊어진 지 오래다. 지질학 관련된 전문가들이 왕궁에서 연구하고 있으나, 특별한 성과는 없다.”
맥심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 잠시 눈 감았다.
본토에서 살고 있는 당사자들조차 균열의 존재를 몰랐고, 전문가들이 조사에 착수하였으나 그 성과가 바로 나오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어찌하여 다몬 왕은 그걸 알고 있었을까? 전쟁까지 일으킨 것으로 보면 확신을 지닌 듯한데, 그에게 그런 확신을 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다몬 왕의 행보가 의뭉스럽군.”
“제정신이 아닌 자는 분명합니다.”
“바리엘이 끼었으나 물러서지 않은 것은 저만의 승산을 그리고 있다는 의미 같은데, 이상해. 아무래도 이상해.”
반평생 전장을 누비며 제일 위험했던 순간들이 바로 이런 경우였다. 늪지대에 사는 악어처럼 일면만 보인 채 다가오는 자들.
그 아래 무엇이 있는지 당최 알 수가 없으니, 경험상 이럴 때는 꽤 큰 피해를 피해 가기 힘들었다.
“제이럿 대장님. 잠시.”
바르사베가 대장에게 고갯짓하며 독대를 요청했다. 마법사들은 그들을 힐끗 보다가 다시금 치료에 열중하였으며, 맥심은 끊임없이 궐련만을 태워댔다.
“몸도 성치 않은데, 어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바르사베가 동행한 것은 마법사들의 호위와 함께 이안을 감시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쥐어 싼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피곤함에 절어 오가는 경비병들 외, 특이한 자들은 없다.
“이안 경의 언행이 조금 의아합니다.”
“어떤 식으로?”
제이럿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진 덕에 황제의 동결과 황태자의 의지를 알게 됐으나, 그것과 상관없이 마법부는 언제나 주의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바르사베는 살기를 풀라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런 의아함이 아닙니다. 제대로 듣지는 못하였으나, 황궁을 떠나려는 듯이 행동하는 모습을 몇 번 포착하였습니다.”
“황궁을 떠나?”
“예. 자세한 것은 아니지만, 헤일과 아코렐라에게 다음을 암시하는 발언을 종종 했다 합니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요. 다만, 그 뜻을 헤일과 아코렐라에게 전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의 답 또한 모릅니다만.”
“그것 외에는?”
“없습니다. 이안 경은 앞장서서 클리포포드와 바리엘의 동맹을 체결하려 했고, 이어 모자람 없이 도왔습니다. 누가 보아도 바리엘의 대표 격에 맞게 행동하였습니다.”
제이럿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한숨 쉬었다. 바르사베가 이리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터.
이안이 황궁을 떠나려 한다? 대체 왜?
고된 업무 탓인가? 문득 밤낮없이 일하던 아이의 모습이 떠오르긴 하였으나, 제이럿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안은 처음부터 제자리였다는 듯, 온전하게 제 몫을 해냈다. 황궁이 그의 품이고 그의 품이 곧 황궁인 것처럼 단기간에 잘 스며들었는데, 황궁을 떠난다?
‘혹, 진 황태자 전하를 위해서인가?’
제이럿이 주머니에서 궐련을 뒤적거리는 순간. 안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이안 님, 정신 좀 드십니까?”
끼이익.
이안이 눈뜬 것이었다.
의사는 당황해하며 간단히 진찰했다. 투약한 수면제 양대로라면 분명 내일 느지막이 일어나야 하는데, 고작 몇 시간 가지 못한 게 의아한 낯이었다.
의사는 손가락을 탁탁 튕기며 이안의 정신 상태를 확인했다.
따악.
“들리십니까? 이안 님. 말씀해 주십시오. 혹여 말하기가 개의치 않으시면 고개만 끄덕여도 좋습니다.”
이안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막 잠에서 깬 것처럼 몽롱하고 힘없어 보였다.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
“듣자 하니, 사용하신 마법이 정신 계열인지라 부작용이 그쪽으로 나왔다 합니다. 불편하시면 더 잠을 주무시어 안정을 취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제 말 들리세요?”
의사는 진찰 내용을 작성하며 연신 이안을 힐끔거렸다. 살았으나, 산 것 같지 않은 분위기. 그는 아랫입술을 작게 깨물며 증상을 기록해갔다.
‘수면제를 그만큼 넣었는데 지금 깬 것이라면… 더 투약한다 한들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마법을 제외하고 의학적으로만 따지면, 쉬이 잠들 수 없을 만큼 강한 스트레스로 가득 차 있다는 뜻인데.’
“이안아아!”
베릭이 열심히 뭔가를 적어대는 의사를 밀치곤 얼굴을 들이밀었다. 드디어 일어났구나! 눈빛이 초롱초롱,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는 듯 웃어 보이며.
이는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이안의 언질을 기다렸다.
눈물 흘리신 것은 모른 척하자, 힘들게 앓으셨던 걸 기억에서 지우자, 모두 그리 약조하였건만. 막상 이안과 대면하니 어색해서 낯선 웃음만 흘렀다.
“이안 님?”
스윽.
이안은 천천히 일어나 주위를 둘러봤다.
맥심 트웰러 장관이 궐련을 문 채 이안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아이의 고개가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으니. 저것은 필시 숫자를 세는 게다.
“…다섯 명이 없다.”
“아, 그것이…….”
“셀레나, 옌, 칸치, 토미, 쟝.”
정확히 짚어냈다. 이안은 복귀하지 못한 마법사들을 단박에 파악하여 한숨 쉬었다.
“이안 님. 새벽 동이 트면 마검사들과 장벽 앞을 훑어볼 것입니다. 아직 마력이 조금씩 느껴지는 터라, 상대측 포로로 잡혀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죽지 않았어요. 저희는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마법사 한 명이 횡설수설 다급하게 덧붙였다. 달래는 것인지, 아니면 위로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안은 침대 끄트머리에 털썩 주저앉은 채 계속해서 허공만 응시했다. 이제 울지는 않았다. 이미 흘릴 만큼 다 흘려서, 그 눈동자가 바싹 말라버린 것처럼.
솔직히 저것 또한 동료들이 보기에는 썩 좋지 않았다. 이안의 눈동자는 언제나 맑고 반짝여 하나의 보석과 같았는데.
“이안아. 조금만 더 쉬었다가 해 뜨면 다시 나가자. 저쪽에서 먼저 연락 올 수 있대. 그래서 기다리는 중이거든? 다시 전투하면 그때는 내가 진짜 잘할게. 내가 진짜 저 새끼들 목 다 따버릴게. 응?”
베릭이 옷자락을 잡으며 안절부절못했지만, 이안은 여전히 눈앞 허공만 바라봤다. 그렇게 한참이나 무언갈 생각하던 아이. 이안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명령했다.
“…노아 왕자를 불러와. 작전 변경이다.”
작전 변경?
맥심 트웰러는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까딱거렸고, 창밖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제이럿은 걱정스레 인상을 찌푸렸다. 저건 자신이 알던 이안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