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95
제395화. 불을 지펴라
사모보가 작전실 문을 열어주며 노아를 안내했다.
안에서 지도를 살펴보던 장군들이 일어서 그를 맞이했고, 이내 미세하게 구겨진 미간으로 왕자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사모보는 뒤따라오지 않는 제이럿을 힐끗 쳐다보곤 문을 닫았다. 마법부 장관 상태가 이상하니, 아마 황궁친위대는 친위대 나름대로 회의를 진행한 후 작전실로 들어서려는 듯했다.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아 왕자님.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이안 경이 제안했다. 내일 하루, 마법사들의 무사 귀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클리포포드와 동맹 맺어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바리엘 마법사들을 위해 싸울 것이란다.”
“네? 갑자기요?”
“아직 부작용에서 덜 깬 것 같아서 시간 끌려 했는데도 완강해. 버고스와 루스웨나 측 진영은 여전히 반응이 없나?”
클리포포드 땅에서 저들을 위해 싸운다는 것, 장군들은 그 뜻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클리포포드 대지 아래 잠든 균열과 자국민의 희생 그리고 나아가 파괴될 영토 따위를 염두에 두지 않겠단 말 아니겠나.
장군들은 당황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예. 루스웨나 측에서는 아직 진영 구축이 끝나지 않았나 봅니다. 혹여 저희가 놓친 게 있나 싶어 특임대를 더 조직해 볼까 고민 중이었습니다. 북동쪽 숲길 말입니다. 그쪽으로 접촉도 가능하긴 하지만, 저들이 그걸 알까 싶어서 아래로만 돌았잖습니까.”
그들 나름대로 버고스와 루스웨나의 틈을 계속 노려보고는 있었다. 성과가 없어서 문제지.
노아는 상석에 앉으며 이마를 짚었다. 아까 이안이 보였던 것과 비슷한 자세였다. 사모보는 어쩐지 노아가 안쓰러워 그 맞은편에 앉으며 일렀다.
“왕자님. 징집령은 전하께서도 극히 꺼리는 부분입니다. 곧 있으면 수확할 시기인데, 때를 놓치면 올해 겨울 모두가 굶어나갈 수도 있고요. 무엇보다 바리엘에서 지원군이 오고 있다 하니, 제 생각에는 이안 경을 설득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게 좋겠습니다. 부작용만 가시면 이전과 같은 입장을 보일 것 같은데요.”
그건 노아도 같은 의견이었다. 이안은 없어진 부하들의 이름을 외우고 있지 않았나. 온전한 정신에도 그것을 감당하기 힘들 터인데, 정신 계열 마법의 부작용으로 그것이 증폭되었다.
시간만 끈다면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이안이 제시한 시간이었다. 고작 하루. 그 하루 동안 마법이 풀리길 기도할 순 없지 않나?
노아는 한숨을 깊이 쉬며 종이와 펜을 가져오라 명령했다.
“전언을 작성해두겠다. 여명이 터올 때까지 버고스와 루스웨나 측의 움직임이 없다면, 우리가 먼저 접촉을 시도할 것이다.”
마법사를 포로로 데리고 있는지, 그들의 생사는 어떠하며 무엇을 내어주면 그들을 내줄 수 있는지 등등.
혹은 더 나아가 종전을 논의할 여지도 있다. 저들은 두 눈으로 똑똑히 이안의, 마법사들의 힘을 보았으니까. 전력에서 차이가 난다는 걸 인지했을 테니,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도 저들에겐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마법사들이 클리포포드에 등을 돌릴까 말까 하는 중요한 순간이니.
노아가 펜을 잡고서 인상을 찡그렸다.
“메이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쪽으로 오라 할까요?”
“아니다. 치료받게 두어라.”
노아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전언을 작성하여 이안에게 검토를 받는 것이 나을 터. 이것은 그와 그의 마법사들을 위한 방안이니 말이다.
이를 알아챈 사모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왕자님. 아무래도 전하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습니다. 아까 이안 경의 작태를 보셨지요. 제 생각에는 이미 관계가 일그러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트웰러라는 제국방위부 장관과 이쪽의 전략적 의견 차이도 있으니, 전하께 결단을 맡기심이 어떠신지요.”
“아버지가 내게 맡기신 걸, 다시 아버지께 맡겨라? 참으로 훌륭한 왕자의 모습이로다.”
“그런 뜻이 아니오라.”
“사모보. 되었다. 말을 거두어라. 지금은 아버지가 오신다 한들 달라질 것이 없어. 그러니 차라리 내 선에서 이리 정리하는 게 낫다.”
갑과 을이 완전히 그어졌다. 왕이 나섰음에도 이안의 태도와 입장에 변화가 없다면, 되려 곤란해질 것이다.
“게다가 당장 징집령을 내리라는 것도 아니니. 기회는 있겠지.”
노아가 그리 말하자,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제이럿 대장이 몇몇 부하들과 함께 작전실로 들어서는 소리였다.
끼이익.
제이럿은 왕자와 장군들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하며 자신의 소속을 밝혔다.
“안녕하십니까. 정식으로 인사 다시 드립니다. 바리엘 황궁친위대 삼대장(三大將) 제이럿입니다. 이안 경의 결단을 차치하고, 저희는 황태자 전하께 마법부의 안전 귀환을 명받았습니다. 클리포포드에 최대한 협조할 터이니,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편히 일러주십시오.”
“아, 감사합니다.”
그나마 다행이로구나. 장군 몇몇이 호쾌하게 악수를 청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법사들만큼 마력이 강하진 않지만, 전투에서는 바리엘에서 제일가는 자들이 모인 집단 아닌가. 황제를 지키는 것이 임무이니, 일당천 이상을 기대하는 바다.
제이럿은 자리에 앉으며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별반 특별할 것 없는 내부. 노아가 왜 그러는지 묻는 투로 그의 시선을 따랐다.
“혹시 황궁친위대가 오기 전에, 이안 경에게 무언가 따로 들으신 말은 없으십니까, 왕자님?”
“따로 들은 말이라니?”
“전투에 있어서나 앞으로의 계획이나 뭐, 그런 것들이요. 보시다시피 이안 경의 정신적 피로가 극심하여, 그것들에 대한 공유를 제대로 받지 못하였습니다. 하여, 혹 아시는 게 있는지 여쭙습니다.”
제이럿은 바르사베가 보고했던 걸 은근히 노아를 통하여 떠보았다. 그렇다고 거짓말도 아니었다. 자고 일어난 이안은 확실히 자신이 알던 자와 달라, 어떠한 말을 섞을 수도 없었으니까.
노아는 의아하다는 낯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딱히. 논의했던 전략․전술은 오늘 전투에서 모조리 행하였다. 루스웨나 마법사의 돌발 행동은 예외였지만.”
“그렇군요. 그렇다면 앞으로의 일만 논의하면 되겠습니다. 특임대를 구성하셨다고 들었는데, 저희 쪽 인원을 한 명씩 배치하면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마력을 감지하는 자들이니, 수색 및 전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해주면 고맙지. 이안 경이 준 하루 안에 우리끼리 해결하기에는 조금 곤란했거든.”
“이해해 주십시오. 아까의 무례 또한요.”
“클리포포드를 위해 싸우다 그리된 것이니 개의치 않는다.”
사실은 개의했다. 하지만 괜한 객기로 개의하다 말했다간, 자국민의 고혈만 더욱 흘리게 될 게 빤하지 않나?
노아가 펜에 잉크를 먹이며 전서 내용에 대해 논의하려는 찰나.
똑똑.
“제국방위부 맥심 트웰러 장관입니다.”
“들어오시오.”
“실례하겠습니다.”
노인이 들어서자 제이럿과 노아가 눈을 반짝였다. 남아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궁금하다는 눈치다. 하지만 트웰러는 별것 없었다는 듯 어깨만 으쓱거리며 맞은편에 앉았다.
“이안 경이 혼자 쉬고 싶었나 봅니다. 대화가 일찍이 마무리되어, 전해드릴 것도 없습니다. 죄다 개인적인 궁금증이어서요.”
제국방위부와 황궁친위대. 역사적으로 두 부서는 창과 방패요, 물과 기름 같은 존재였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진이 각자의 사람을 배치함에 따라, 그 관계성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길 것이라.
그걸 잘 알고 있는 트웰러가 제이럿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진실로, 별 대화 없었다는 걸 맹세라도 하듯.
“그래서, 무슨 말씀들을 나누고 계셨습니까?”
“아, 특임대에 마검사를 배치하여 움직일 예정이고, 나는 버고스와 루스웨나 측으로 보낼 전언을 작성할 것이네. 여명이 틀 때까지 별다른 소식 없다면 먼저 접촉할 생각인데, 문제는-”
“문제는 상대측에서 클리포포드 입장을 알지 못하게 서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트웰러가 단숨에 문제를 꿰었다. 이안의 마법 부작용 및 각종 이해관계로 인해 바리엘과 클리포포드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적에게 알려선 안 되었다.
그 사실을 모두 철저히 숨기면서도, 포로의 상태를 알아내고, 나아가 우위를 선점하여 교환 및 협상까지 이끌어낼 내용이 필요한 것이다.
노아가 얼떨떨하게 맞노라 대꾸하자, 트웰러가 손끝으로 수염을 쓸어넘겼다.
“아아. 잠시만요. 비슷한 상황이 이전에도 있었습니다.”
“장관님. 혹시 플뤼에 전투 말씀이십니까? 그때는 상대 동맹이 와해된 것을 우리가 못 알아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물론 승기를 잡아채셨지만, 당시 상대측의 전언이 명문이라 장관께서 직접 칭찬하셨다는 소문이 기억납니다.”
“아, 맞습니다. 플뤼에 전투. 그 서문이 이러했습니다.”
이러쿵저러쿵, 주거니 받거니. 노련한 두 사람의 대화를 가운데서 지켜보는 노아였다. 그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다가도, 이내 전혀 거절할 필요가 없는 호의이자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두 사람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이안의 무례를 우회하여 사과하고 있는 게다. 바리엘에서 이안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만큼 현 실세와 밀접하게 연관된 부분이라는 것.
“저도 종이와 펜을 주시겠소? 기억나는 대로 옮겨 적어보리다.”
“아, 예예. 여기 있습니다.”
“동맹이 굳건하다는 걸 알리는 게 우선입니다. 아, 물론 현재 클리포포드와 바리엘은 이리 같은 작전실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지만, 이안 경이 말한 내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니까요. 구구절절 여러 문장을 쓰는 것보다는, 단 하나라도 확실한 증거를 보이는 게 효과적일 것입니다.”
“예. 예를 들어, 보내는 사신을 바리엘 사람으로 한다든지, 아니면 전서를 묶는 방식이나, 그 통을 바리엘 것으로 쓰십시오.”
노아가 두 사람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허겁지겁 기록했다. 장군들은 바리엘 풍의 전서 통을 찾으려, 또 전령에게 바리엘 복식을 준비하라 이르려 급히 움직였다. 반쯤 열린 문으로 바깥의 소란이 그대로 들려왔다.
타닥타닥!
쿵! 쿠웅!
무어 저리 소란인가? 노아가 인상을 구겼으나, 트웰러의 조언이 끊이질 않아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때, 당황해하며 모습을 보이는 시종.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고했다.
“저기, 노, 노아 왕자님.”
“무슨 일인가? 바깥이 소란스러워.”
“식사가, 그러니까 지금 마법사분들이 요청한 식사를 모두 내오려면 불을 사용해야 합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밤중에는 상대에게 노출되는 것을 고려하여 최소한의 불빛만을 두고 모두 암흑 속에서 숨죽였다. 달빛이 밝긴 하지만, 오늘도 그것은 변함없는 상식이자 규칙이었다.
시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금 머리를 조아렸다.
“식사를 만들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마법사님들이 마, 마력으로 고기 굽는다 하십니다.”
트웰러와 제이럿이 의아해하면서도 재밌다는 투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식사?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보다 더한 청신호가 없다. 식욕이란 무릇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욕구. 침몰하는 자에게서 이런 욕구가 피어오른다는 건,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확실한 의지가 고개를 내민 것과 같았다.
“…허락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왕자님.”
트웰러가 살며시 웃으며 덧붙였다.
“마법사들의 귀한 마력을 고기 굽는 데 낭비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아, 그…….”
“사실 아까 남은 저녁을 올려드렸는데, 베릭 님이 너무 많이 드십니다. 간에 기별도 안 간다고, 어후.”
시종의 울상에 제이럿이 못 들은 척 눈 감았다. 베릭의 식성은 황궁의 모두가 알고 있으리라.
노아가 당황하여 잠시 좌우를 둘러봤다. 트웰러와 제이럿,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요청을 반기는 듯 보였다. 자세한 의미는 모르지만, 노아 역시 그리 나쁘지 않은 부탁임을 느꼈다.
“그래. 불을 지펴라.”
“감사합니다.”
“그-!”
“예?”
“좋은, 좋은 고기로 해서 올려.”
“아, 네네. 알겠습니다.”
타닥타닥!
우당탕탕! 콰앙! 쾅!
시종이 허둥지둥 뛰어나가자, 다시금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취사실을 점령한 마법사가 취사병들을 닦달하는 소리였다.
털썩, 노아가 황당한 얼굴로 자리에 앉자, 트웰러는 종이 끄트머리를 두드리며 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왕자님. 저희는 전서를 계속 작성하시지요.”
“아, 그러지.”
전쟁, 고난, 상처, 누군가를 파괴하는 그 모든 것들이 어떨 때는 아주 사소한 것에서 위로받는다. 곧 있으면 저 우당탕탕 소리가 웃음으로 바뀔 것이라고, 트웰러는 그간 전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확신했다.
“이안아아!”
“…저런.”
“아아아악! 먹지 마! 내 거, 먹지 마!”
“닥쳐! 양심 없어? 미친놈아!”
“이안아아! 말려줘! 빨리 말려줘! 아아악! 죽인다!”
아니나 다를까, 장벽 주위가 환해지면서 생기 돋는 비명과 고함이 들려왔다. 이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분명 저 속에 녹아있으리라.
* * *
한편, 그 시각.
클리포포드 장벽을 주시하던 에리포니는 망원경을 눈에서 떼며 중얼거렸다. 밤중에 갑자기 불이 피어오른다? 장벽 안에서?
“뭔 수작들이지? 저것들?”
“…마법사들을 정찰 보내겠습니다.”
엘더트의 말에 왕이 그리하라 고갯짓했다.
“장벽이 시끄러우니, 우리도 서두르는 게 좋겠다. 버고스 왕에게 시간을 앞당겨 만나자 전언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