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399
제399화. 미심쩍은 동맹
어둠 속에 숨어 은밀히 움직이는 자들.
에리포니를 선두로 한 루스웨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다몬과 만나기로 한 숲을 앞두고 있었고, 자그만 기척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중이었다.
그때, 클리포포드 장벽에서 터지는 빛과 굉음. 에리포니는 천천히 뒤를 돌았고, 엘더트는 자연스럽게 망원경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은밀히 하라니까, 말 참 안 듣지. 이래서 애들은.”
클리포포드 장벽 좌측. 너무 멀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으나, 허공에서 전투가 일어난 게 분명했다. 자이라라는 아이겠지. 나이가 너무 어려 잘 해내려나 싶었건만, 역시나는 역시나다.
엘더트가 고개를 숙이며 왕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그래도 제 역할은 다했습니다.”
에리포니와 엘더트는 자이라가 은밀히 다녀오지 못할 것을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다.
클리포포드는 분명 버고스와 루스웨나 왕끼리의 접선을 끊어내려 할 것이고, 정찰병 중엔 마검사라는 정예들까지 끼어있을 터.
그러니 저리 소란 떨어 잠시 눈과 귀를 막아주는 것이 자이라의 진짜 임무였다. 장벽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좌측에 간 마법사가 알아 올 터이니.
그녀는 혀를 쯧쯧 차며 등을 돌렸다.
“바리엘 측에서 자이라와 마법사 포로 교환을 신청하겠지?”
“예. 생포한다면 그러할 것입니다.”
밑지는 것은 없었다. 자이라가 잡힌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쟝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다몬과의 조율에서 그자의 가치가 어찌 변할지 알 수 없다는 것. 무엇이 되었든, 루스웨나는 결코 손해 보지 않으리라.
“버고스는 전쟁 중에 말(馬)이라도 잡아먹었는가? 왜 이리 늦어.”
에리포니는 한껏 예민해진 투로 중얼거렸다.
전시 중인 늦은 밤, 낯선 곳인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장벽에서 자이라가 소란을 피우는 동안 접선을 마치는 게 좋지 않겠나? 그녀의 재촉에 엘더트가 시간을 확인하려는 순간이었다.
바스락.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병사들은 창과 검 따위를 겨눈 채 경계했고, 에리포니 역시 활을 집어 들었다. 망할 마검사가 전용 활을 망가트린 바람에, 활대 잡는 느낌이 영 이전과 같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에리포니 왕이시여.”
달빛에 보랏빛 머리칼이 드러났다. 얼마 전, 바리엘에서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창백해진 볼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의 눈빛이 더 짙어져서일까.
에리포니는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했다.
“그리 오랜만은 아니지요. 무사하신 듯하여 다행입니다. 나눌 것이 많지만, 클리포포드 쪽에서 정찰병을 돌리고 있으니 중요한 것만 나누고 물러섬이 좋겠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동맹을 맺었다고 한들, 각자의 진영에 왕이 들어서는 것은 위험 부담이 컸고, 클리포포드의 정찰병은 계속해서 인근을 돌고 있을 것이니. 마검사의 습격이라도 일어난다면 퍽 곤란해질 게 분명했다.
에리포니는 엘더트에게 서신 뭉치를 받아서 다몬에게 건넸다.
“우선 바리엘에서 무역을 금한 것, 알고 계시지요?”
“예. 알고 있습니다. 덕분에 재상들 아래로 아주 난리가 났지요. 뭐든지 득과 실이 있는지라, 전쟁 옹호론에도 조금 힘이 실렸고요. 루스웨나도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일 큰 무역 상대인 바리엘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부족한 물자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클리포포드 침략에 대한 열망이 급격하게 올라왔다.
에리포니는 어깨만 까딱인 채 웃어 보였다.
“저희는 수출을 주로 하는 입장이라, 아쉽기는 하지만 크게 반응 없습니다. 확실히 버고스는 반응이 뜨겁겠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탓에 보급로가 모두 막혔습니다. 바리엘 길도 막히고, 죽은 땅에도 추격자가 붙었지요. 보내주신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새로이 보내 달라, 마검사들이 눈엣가시긴 하지만 흑갑옷만 대량으로 보급할 수 있다면 육탄전에서는 우위를 확실히 점할 수 있으리라.
에리포니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잠시 웃었다.
“저희는 이미 요청한 것을 성실히 수행하였는데, 그것을 받지 못했다고 하여 새로이 보내달라 하시면 조금 곤란합니다. 다몬 왕이시여.”
“루스웨나 측의 보급병들은 버고스 국경 근처에 오지도 못하고 잘라 먹혔소. 그런데도 성실히 수행하였다? 진실로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아시지 않습니까. 전쟁에 돌입하면 물자는 눈 녹듯 사라질 것인데, 무한정으로 내어드릴 수 없음을 짚는 바입니다. 동맹 조약을 조금 수정하면 또 모르겠지만요.”
동맹. 하나의 이익을 두고 함께 움직이는 자들이었으나, 막상 당도하였을 때는 누가 더 많은 것을 떼어 먹는지가 중요했다.
다몬 왕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클리포포드를 점령할 시 북동쪽 다섯 개 주요 도시를 루스웨나 쪽에서 관리하기로 했던 것, 그것을 일곱 개로 변경합시다. 그리하면 내 당장 흑갑옷 재료들을 내줄 수 있습니다. 바리엘도 막히고, 죽은 땅도 쓸모가 없으니 이리할 수밖에요.”
버고스만큼이나 루스웨나도 새로운 개척지에 대한 필요성이 커졌다. 자국의 보급품을 챙기기도 모자란 마당에, 동맹국을 위하여 그 자리를 내놓지 않았나. 이에 대한 대가를 분명히 얻을 필요가 있었다.
“일곱 개…….”
협상의 여지는 없다. 에리포니의 눈빛이 그리 이르고 있었다. 다몬은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이내 수용하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대신 인접 도시 중에서 골라야 할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그것이 저희에게도 편하지요.”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다.
어리석은 것. 어차피 클리포포드에 균열이 벌어지면 그 대부분 땅은 흙먼지로 전락할 것이었다. 루스웨나가 바라는 기름진 땅 따위 볼 수 없을 터인데, 다섯 개면 어떠하고 일곱 개면 어떠한가?
“그리고 바리엘 마법사 말입니다. 저희 쪽에서는 한 명 생포하였는데, 그쪽은 어찌 됩니까?”
“네 명이 있습니다.”
오, 버고스 병사들이 빠릿빠릿하게 잘 움직였군.
에리포니는 저것 좀 보라며, 엘더트를 질책하듯 쳐다봤다. 루스웨나는 흑갑옷으로 인하여 마검사들의 견제를 상대적으로 더 받아 그런 것이었음은 무시한 채.
“전부 살아 있습니까?”
“하나 빼고는요.”
“이런.”
하나는 죽었다. 에리포니가 전혀 안쓰럽지 않은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쪽에서 데리고 있는 자도 거의 죽어가는데, 어쩌시겠습니까? 사령술사가 마법사의 시체를 조종 가능하다 하더이까?”
“시도는 중인데, 아무래도 시행착오가 조금 있어 보입니다. 그쪽에서는 일단 최대한 살려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일반적인 시체처럼 움직이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마력을 구현하는 데 있어 상당한 어려움을 보이는 듯했다. 마력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에 각인되는 것임을 모르는 자들이라, 아둔한 실험이 계속되는 중이었다.
에리포니는 그 말을 듣자마자 엘더트에게 눈짓했다. 죽어있을 때의 가치보다, 살아있을 때의 가치가 더 크다. 그러니 진영에 전언하여 바리엘 마법사에게 마력을 나눠주라는 명령이었다.
처억.
히이잉!
왕명을 품은 병사 둘이 먼저 말을 타고 숲을 빠져나갔다.
밤하늘의 달이 점점 아래로 기울고 있었다. 곧 있으면 날이 밝아올 터라, 지금부턴 다음 전투에 관해 머리를 맞대는 게 좋겠다.
에리포니는 아까보다 빛이 희미해진 클리포포드 장벽을 바라봤다. 자이라가 빠져나왔거나 혹은 잡혔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마검사는 우리가 상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아하니 여섯이서 두 합을 치면 흑갑옷이라도 금이 가는 것 같은데, 저희 쪽에서 흑갑옷 쓰는 자를 최정예로 다시 구성하여 내보낼 것입니다. 각개전투로만 이끌 수 있으면 확실히 승산 있을 것 같은데, 합성 마물을 저희 쪽으로 돌리면 어떻겠습니까?”
“현재 사령술사 중 하나가 바리엘로 넘어갔습니다. 남은 마물은 저희가 해체하여 그 핵을 부쉈으나, 그자 또한 클리포포드에 적지 않은 힘을 보탤 것입니다. 하필이면 사령술로 유명한 아스타나 출신인지라.”
첩첩산중이로다. 전체적으로 관망하였을 때, 버고스와 루스웨나에게 유리한 지점이 하나도 없었다. 이래서는 곤란한데.
이드갈의 보급으로 인한 마법사 무력화 전략이 생각보다 더디게 돌아가는 듯했다. 에리포니가 미간을 찌푸리자, 다몬이 덧붙였다.
“괜찮습니다. 북쪽에서 지원군이 더 오기로 하였으니까요.”
“북쪽이라 하시면?”
“셀 수 없습니다. 온갖 자들이 다 모여들 것입니다.”
“아, 그 얘기는 들었습니다. 마물을 푸셨다고요. 클리포포드 농지에 적합하지 않은 처사인 것 같은데, 수습 가능하시겠습니까?”
“버고스와 맞닿아있는 서쪽 부근 국경지에 한한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음-”
다몬 역시 달을 바라봤다. 저것이 기울고 나면 이제 남은 것은 일주일. 전쟁에 있어서는 굉장히 짧은 시간이지만, 장벽 하나를 허무는 데 쓰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다.
“일주일 안에 장벽을 넘어서 수도까지 도달할 예정입니다.”
“말처럼 쉽지 않아요. 다몬 왕이시여. 장벽 안에 누가 있는지 아실 터인데요.”
“루스웨나 마법사 덕분에 그 힘이 상당 부분 날아갔겠지요. 날이 밝아오고 전투를 개시하면, 보다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일주일.”
에리포니는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일주일. 그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데? 보급품의 수인가? 그것도 아니면 설마 주술사들의 길일(吉日), 그따위 것은 아니겠지?
그런 거라면 당장 동맹을 파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미신 따위에 정신을 빼앗긴 자를 어찌 믿고 함께하겠나.
“지진이 일어날 것입니다.”
다몬은 에리포니의 마음을 읽어내린 것처럼 설명했다.
“지진?”
“그것도 대지진이지요.”
“장벽 안에서 말입니까?”
다몬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리포니는 인상을 찌푸렸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뭔가 중요한 단서 하나가 어긋난 것처럼.
“그렇다면 일주일 안에 쳐들어갈 게 아니라, 그때까지 버티면 될 일 아닙니까? 가만있으면 건물이 무너지고 병사들이 죽어 나갈 것인데, 무엇 하러 피를 흘립니까?”
“모든 것이 폐허로 변하기 전, 왕가의 보물들을 내오는 것이 목적입니다. 클리포포드 왕실의 정통성을 깨는 것이 우선이요, 북쪽의 동맹군들 손에 금을 쥐여주는 것이 그다음입니다.”
다몬의 단발 머리칼이 살짝 흔들렸다. 다음으로 말할 것이 특히 중요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린 탓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리엘의 지원군이 당도하기 전 승부를 보려는 게지요.”
흐음. 에리포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대지진이 일어나면 확실히 왕실의 보물들이 손실될 가능성이 있다. 그 전에 야만인에 가까운 북쪽 부족들을 만족시킬 필요성도 있었고.
하지만 여전히 뭔가 미심쩍다. 에리포니는 일주일이란 기간에 동조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주제를 돌렸다. 완전히 납득하기 전까지는 동참할 수 없었다.
“하완국에서도 반응이 있습니다.”
하완 왕국. 작지만, 대사막을 비롯하여 이 대륙의 모든 것들이 오가는 금빛 길목.
하완은 루스웨나와 우호적인 입장이었기에, 정세를 살핀 다음 참전하겠다는 뜻을 보내왔다. 아마 바리엘 쪽에도 비슷한 서신을 보냈을 수 있지만, 어쨌거나 기세를 잡기만 한다면 따라붙어 줄 세력이 존재한다는 게 중요했다. 그게 하완이 아닌, 다른 나라라 할지라도.
“단기적으로나마 대외적인 성과를 보이는 게 좋겠지요. 사냥감이 거대하면 거대할수록 힘을 모으는 게 맞으니. 그럼, 여기 서명해 주십시오. 동맹 조약에 관한 수정 조항입니다.”
차락.
에리포니가 서신을 펼쳐 건네주자, 한 신하가 받아서 다몬에게 전해주었다.
에리포니는 그때 깨달았다. 언제나 옆에 있던 티모시라는 자가 없다는 것을.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는 더더욱 번득였고, 이내 서명하는 다몬 왕을 천천히 훑어봤다.
* * *
콰아앙!
“으앗, 깜짝이야!”
“뭐, 뭐, 뭔데!”
갑자기 열린 작전실 문.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이안이 고개를 돌렸고, 마법사들은 깜짝 놀라 심장을 부여잡았다. 아코렐라였다.
베릭은 코를 훌쩍이며 심상치 않은 몰골의 그녀를 바라봤다. 왜 옷에 구멍이 나 있지?
“왜 저래?”
“후. 후후후…….”
아코렐라가 맛 간 눈으로 비커를 들어 올렸다. 기분 나쁘게 끈적거리는 액체가 찰랑였다.
마법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애써 아코렐라를 쳐다보지 않았다. 저거, 분명히 그거다.
“위대한 마법사 아코렐라 님을 경외할 시간입니다. 와나, 진짜 내가 이걸 해낸다. 헤일 대장! 네가 만들어보라던 마력증폭제다!”
“헤일 대장! 대장 찾아와, 빨리!”
“아, 아코렐라 대장… 또 눈이 맛 갔어…….”
이안은 클리포포드 간이 지도를 덮으며 아코렐라를 불렀다.
“벌써? 준비된 것도 없었을 터인데. 역시 대단하구나, 아코렐라.”
“어허, 이안 님 일어나셨구나! 꺄하하하! 이안 님이 인정하는 위대한 마법사 아코렐라입니다.”
“그럼 음용하면 되는가?”
“아, 이안 님은 안 돼요.”
이안이 온화한 미소를 그리며 묻자, 아코렐라가 반대쪽 손을 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거 부작용 무조건 있거든요. 자자, 이안 님 말고, 이거 마셔볼 사람!”
“우, 우리는 마셔도 된다 이겁니까? 너무하잖아요!”
“어? 너 나랑 눈 마주쳤다. 이리 와.”
“무슨 소리세요? 저, 저 계속 땅만 보고 있었는데.”
그때, 손을 번쩍 드는 베릭.
“그거! 내가 마셔보면 안 돼? 냄새가 맛있는데.”
“냄새가 맛있다고? 진짜?”
“응. 고기 냄새 나.”
이상하다. 그럴 리 없는데? 아코렐라가 슬쩍 냄새를 다시 맡아봤지만, 속에서 헛구역질만 올라올 뿐이었다. 그녀는 이안에게 허락을 구하듯 고갤 까딱였다.
“어찌, 베릭이 먹고 싶다는데. 먹여도 될까요? 이안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