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
제4화. 족쇄
“오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이안 님.”
정문에는 몰린이 타고 왔던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노인이 모자를 벗으며 인사하자, 하인이 그의 지팡이를 가져왔다. 이안 역시 가슴에 손을 올리며 경의를 표했다.
“결례에도 불구하고 그리 말씀해 주시니, 아버지께서 참으로 기뻐하실 겁니다.”
격식 있고 우아한 몸짓이었다. 황족의 예절을 담당하는 선생처럼 흐트러짐 없이 완벽한 자세. 몰린은 다시금 아이의 눈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짙은 녹안이 유리구슬처럼 맑았다.
“이안 님은 참으로 백작님을 위하시는군요.”
진심인가? 아니다.
칭찬을 가장한 질문이었다. 비꼬는 것인지, 한번 찔러보는 것인지 모를 모호한 의도. 몰린은 대답을 기대하는 눈치였으나, 이안은 노인네의 욕망을 충족할 생각이 없었다.
“조심히 가십시오.”
애매한 미소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뿐이다.
말의 의도를 모르니 대답도 그에 따르게 던져줄 수밖에. 몰린은 그런 이안의 태도에 더욱 흥미를 느끼는 것 같지만.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입적 절차는 하루 만에 끝나는 게 아니었다.
일주일 간격으로 총 네 번. 한 달 정도 몰린과 이런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 후에나 수도로 보고서가 올라갈 것이고, 다시금 보름에 걸쳐 파발이 내려오겠지.
이러나저러나 별일 없다면 두어 달 이상은 시간이 있다는 뜻이다. 이안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유를 확인하고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기민한 대처가 몸에 밴 상태다.
“그럼. 안녕히.”
끼익.
마부가 몰린을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작은 창틈으로 끝까지 이안과 눈을 맞춘 채 사라졌다.
마차가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비로소 브라츠 백작저의 전체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변경백 치고는 고풍스럽군.’
“이안 님. 방으로 모실까요?”
“아닐세. 응접실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뒤에 서 있던 하인이 조심스레 묻자, 이안은 가로저었다. 첼의 뒷수습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아직 상황 파악이 완벽하지 않은 지금, 자신의 힘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예상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 직접 봐야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만 했다.
“먼저 가보시게나.”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이안 님!”
하인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주뼛거리는 얼굴이 어딘가 낯익다. 응접실에서 첼의 패악질을 받아낸 아이였다.
“손은 괜찮나?”
하인은 살짝 부은 손등을 잡으며 꾸벅 인사했다. 제대로 치료한 것은 아니지만, 열기는 가라앉은 듯 보였다.
“…감사합니다.”
“됐네.”
뭐 그리 대단한 친절이라고.
이안은 하인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마자, 제 손을 내려다봤다. 확인할 것이 있었다.
‘마력이 느껴지는군.’
마력은 육체가 아닌 영혼과 감응하는 것이라더니. 낯선 몸뚱이일지언정 힘을 불러낼 수 있나 보다. 이런 경우 아는 바가 없어 당황스럽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본체와 비교할 수는 없으나, 훈련을 한다면 훨씬 수월하게 마력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설령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마력이 있는 한 그것만은 면하리라.
똑똑.
어느새 응접실에 다다른 이안이 응접실 문을 두드리며 막 들어서려는 순간.
안쪽에서는 백작 가족 대신 낯선 하인들의 잡담만 들려왔다. 분명 엉망인 바닥을 청소하는 모양이다.
“어휴. 참. 대체 이게 무슨 일이니.”
“그러게 말이야. 열일곱이나 되어서는.”
“쉿. 조용히 해. 마님께서 당부하셨어.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고. 경을 친다고 하셨으니 조심해.”
“차라리 이안 님이 실수했다면 믿겠다. 저번에는 소백작님께 머리가 죄 뜯겨서 혼절했잖아. 오줌이라길래, 나는 이번에도 뜯겨서 실수하신 줄 알았다!”
깔깔깔. 하인들의 웃음이 청명하게 울렸다. 이안은 문틈으로 기척을 숨기며 엿들었다. 아주 쥐 잡듯이 잡고 산 듯싶다. 쯧쯧.
“근데 오늘 정원에서 나올 때 보니 진짜 놀랍더라. 몸가짐이 바르신 것이, 마님보다 더 우아해 보였어.”
“손님 있으니까 정신 바짝 차려 그런 거지. 아니라면 백작님께서 가만뒀겠어? 피 어디 안 간다. 제 어미처럼 반지르르한 걸 보면 창것 피 확실히 섞였다. 얘.”
“근데 어미가 코르티잔 아니라며. 왜 창것이라 해?”
“맞아. 따지고 보면 백작님 잘못이지. 잘사는 여인을 왜 건드냐고.”
“잘 살기는. 손가락 빨며 사는 게 잘사는 거니?”
끼익.
이안은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는 걸 알고 문을 열었다. 난잡한 발언을 일삼던 하인들이 모두 굳어버렸다.
“…어, 저기. 이안 님?”
“부모님과 형님은 어디로 가셨지?”
변명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인들 역시 꼬박꼬박 존대하며 예의 차리고 있긴 하지만, 이안의 출신이 천한 것과 곧 천려족에 팔려간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시 물어야 하나?”
“아! 죄송합니다! 마님과 첼 도련님은 방으로 돌아가셨고, 백작님은 집사님과 정문으로 향하셨는데요.”
정문엘 갔다면 뒤늦게나마 몰린 경을 배웅하려는 거겠지. 너무 경황이 없었던 거다. 다 큰 아들의 실수에 몰린과 이안, 둘만 보내다니.
능구렁이 같은 노인에게 무슨 책이 잡혔을지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길이 엇갈렸군.’
“알겠네.”
이안이 담담하게 문을 닫고 나가자, 하인들이 안도의 한숨을 토해냄과 동시에 한 여인을 질책했다.
“어우, 진짜! 벨라! 넌 그놈의 입이 문제야.”
“치이. 뭐 어때? 두어 달 있으면 팔려갈 아인데.”
“입조심 안 하지? 혼나고 싶어?”
백작이 특별히 신경 쓰는 부분이었다. 화친을 위해 이안의 신분 세탁을 대대적으로 하는 중 아니었던가.
황궁에서는 자국 일이니 별말 않더라도, 천려족에서 알았다간 어떤 꼬투리가 잡힐지 모를 일이다. 저택의 사용인 모두가 이안을 귀하게 모시는 이유가 따로 있었던 거다.
“아, 아버지.”
이안은 멀리 복도 끝에서 돌아 나오는 데르가 백작을 발견했다. 그는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이안에게 다가왔다.
“몰린 경은 떠나셨는가?”
“예. 타고 온 마차가 나가는 것까지 보았습니다.”
“함께 가며 무슨 얘기를 했느냐?”
“특별할 것 없는 사담이었습니다. 첼 형님의 실수에 대해 한마디 하셨지만, 그저 우려스러운 걱정이었습니다.”
첼의 얘기가 나오자, 데르가는 낭패라는 듯 더더욱 눈썹을 찌푸렸다. 이안은 그 모습을 하나도 빼놓지 않았다. 반응으로 봐서, 첼이 금빛 눈에 대해 함구한 것이 분명했다.
“…가서 마차를 준비해.”
백작은 스트레스가 치솟는 것을 느끼며 집사에게 지시했다. 그리고서 옥으로 만든 물부리를 입에 물었다. 아이가 앞에 있든 말든, 독한 궐련 연기를 시원하게 내뿜었다.
그러다 대뜸.
“퓔른이라는 자작은 어떻게 알았지?”
오찬을 찬찬히 되짚다 걸린 의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도 몰랐던 수도의 학자를 천하디천한 사생아가 알고 있었으니까. 이안은 별 고민 없이 대충 둘러댔다.
“집안의 누군가가 하는 말을 주워들었습니다.”
“누구의 말을?”
“이름은 잘 모르겠습니다.”
밖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아이다.
저택 사람들을 일일이 다 알 리가 없다는 판단에서 나온 임기응변이었다. 꽤 그럴듯했는지, 데르가는 알아서 공백을 추측했다.
‘첼의 가정교사인가? 그자가 바리엘 대학을 나왔다고는 하더니만.’
뭐. 그리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데르가는 일부러 엄하게 목소리를 깔았다.
“다음 주에는 실수 없이 하거라. 또 핑거볼 물을 처마셨다간 걸레통에 머리를 박아버리겠다.”
황제 이안이 빙의하기 전, 아이가 실수한 부분인가 싶었다. 이안은 별 덧붙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르가는 연기를 입에 머금고는 물끄러미 이안을 내려다봤다.
‘흠.’
확실히 어미를 빼닮아서 얼굴이 볼만했다. 처음 데리고 왔을 때는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데다가 종일 울어 젖히는 바람에 뜯어 볼 기회가 없었거든. 보고 싶은 마음도 굳이 안 들었고.
“왜 그러십니까?”
본적 정리만 잘 된다면 필시 천려족에서 반길만한 외모다. 게다가 이제 겨우 열여섯. 족장 쪽 가족과 혼인을 맺을 수도 있을 것이다. 국경 넘어가는 즉시 생명이 어찌 될지는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잘만 하면 형식적인 화친에 도움이 되겠지.
“오늘 네 형이 실수한 것은 머리에서 지워버려라.”
“네. 알겠습니다.”
저택 아랫것들에게도 민망한데, 천려족이 알게 된다면? 차기 변경백의 위엄이 우스워질 게 빤했다. 그가 담배를 거의 다 태워갈 때쯤. 집사가 외투를 들고서 나타났다.
“백작님. 준비되었습니다.”
“가지.”
그러곤 매몰차게 돌아서는 백작.
이안은 창문 너머로 그가 마차에 오르는 것을 확인했다. 사용인들이 보고서도 배웅하지 않는 걸 보아, 비밀스러운 외출인 게 분명했다.
“쯧.”
별 볼 일 없는 자다. 이안은 머릿속에서 그에 대한 생각들을 말끔히 지우곤 돌아섰다. 일단 저택 전체를 머릿속에 그려놓는 게 좋겠다. 아니면 첼을 만나 확실하게 단속을 하거나.
그렇게 거대한 저택을 휘젓고 다니다, 중앙 부엌에 다다르고 말았다. 하인들과 그 식솔들이 삼삼오오 모여 뒤뜰에서 먹고 남긴 음식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이안 님?”
“무슨 일이십니까?”
“별거 아닐세. 산책 중이었어.”
거참 희한하시다. 평소에는 불이 나도 밖에 안 나올 것처럼 굴지 않았나. 하인들이 우물우물 음식을 주워 먹자, 이안은 희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가축이 아닐 텐데, 어찌 먹다 남긴 것을…….’
자신이 있던 바리엘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최하 빈민가가 아닌 이상, 대체 누가 먹다 버린 음식을 먹는단 말인가?
전반적으로 풍족해진 생활 수준과 별개로, 타액으로 옮기는 전염병이 창궐한 이후로는 빈민가에서조차 금기되는 생활 습관이었다.
하지만 브라츠 백작저에선 익숙한 일인지, 전혀 거리낌이 없다.
“허기지십니까? 좀 드릴까요?”
“이봐! 어찌 작은 도련님에게 그런 막말을!”
“앗,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괜찮네.”
천려족의 터전은 들끓는 대사막 한 가운데였다.
그와 제일 가까운 브라츠 영지 역시 그 영향을 받았으니 타지와 비교하면 메마른 땅이라 볼 수 있었다. 농지 자체가 풍족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접경이라는 이유로 군사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깨진 지 오래라, 아랫것들은 언제나 배를 곯는 중이었다.
“그럼 드시게나.”
“예에. 들어가십시오.”
이안은 그들이 편히 식사할 수 있게끔 자리를 비켜주었다. 근데 계속 생각할수록 뭔가 이상했다. 괴리감이라고 해야 하나? 황제 이안의 시대와 시간적 간격이 크니 당연하겠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뭔가 빠진 것 같았다.
‘뭘까. 뭐가 허한데…….’
“저기. 이안 님.”
그때, 누군가 뒤에서 그를 불렀다. 검은 머리칼을 땋은 제 또래 여자아이였다. 아까 식사하던 식솔 중 한 명이었다.
“무슨 일이지?”
“저기, 한 시각 후에 시장에 가려 하는데요.”
…왜 그걸 자신에게 말하는 걸까? 이안은 다정한 미소 아래 열심히 머리를 굴려댔다.
뭘까? 설마 이안이 시장 일도 보는 것인가? 저택의 식료품 채우는 일은 어른도 힘든 것인데?
“저기, 어머님께 전하실 말씀은······.”
“아.”
여자애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하자, 그 의중을 알아챘다. 나갈 때마다 이안의 친모에게 안부를 전해주었나 보다. 글을 읽고 쓸 수 없으니 사람의 입을 통할 수밖에.
‘그렇다면 나는 저택을 못 나간다는 뜻이군.’
화친을 위한 귀한 제물이었다. 아마 천려족이 당도할 때까지는 제 발로 백작저를 나갈 수 없으리라. 여자아이는 단 한마디로 이안의 발에 채워져 있는 족쇄를 일깨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