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02
제402화. 의지를 잡다
톡, 토옥.
이안은 창가에 놓여있는 상자를 반쯤 끌어안은 채 손끝을 두드렸다. 차갑고 서늘한 새벽이 그의 눈동자에 깃들어있었다.
마법사들은 머리만 돌아온 제 동료를 차마 보지 못하고 한 걸음 떨어진 채로 침묵했다. 이안이 내어주지 않았다. 시체를 어찌하면 좋을지 물어도 답하지 않았으며, 그저 깊은 우주에 포옥 잠긴 것처럼 사념에 제 몸을 내던지고 있었다.
저 끝, 해가 떠오를 때가 되자 이안이 중얼거렸다.
“…루스웨나에서 쟝을 버고스로 넘겨주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나?”
“예?”
갑작스러운 물음에 다들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틀었다. 하지만 이안은 여전히 그 자세 그대로다. 창문으로 희미하게 새어나오는 햇빛이 그의 속눈썹 위에 내려앉았다.
이안이 다시금 입술을 떼었다. 물음이라기보다는 사실상 혼잣말에 가까운 투였다.
“루스웨나가 쟝을 버고스로 넘겨주었을까?”
“아, 그, 글쎄요. 꼬마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 아래, 저는 아닐 것 같은데요.”
“나도 그리 생각한다. 로브 정도는 혼란 목적으로 넘겨줄 수 있어도, 마법사의 신병 확보는 바리엘을 직접적인 대상으로 한 행위. 버고스에게 쉬이 넘겨주었을 리 없지.”
지금까지 저걸 생각하고 계셨던 것인가? 마법사들이 서로를 힐끔거렸다. 어제 낮부터 지금에 이르는 새벽까지, 이안은 참으로 많은 눈물을 흘렸고 그로 인해 스스로 침몰하는 듯 보였다. 비록 마법 부작용에 따른 것이었지만 말이다.
부하의 잘린 머리만 돌아온 상황에서, 침묵을 깬 이안의 말이 의아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안 님.”
“루스웨나에서는 아직 답신이 없다 하는가?”
“예. 오면 노아 왕자님과 함께 확인하실 수 있게끔 준비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면 누구보다 먼저 받아보시겠지요. 이안 님. 그런데 말입니다. 괜찮으십니까?”
마법사들이 주춤주춤 이안에게 다가왔다. 그가 안고 있는 상자. 셀레나의 머리가 담긴 그것이 마치 이안을 해하려는 흉기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안은 냉랭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이?”
“그, 셀레나요.”
“…….”
“괜찮으시면 주시겠습니까? 장례를 치를까 합니다.”
“아니. 셀레나의 몸이 없는데 어찌.”
이안은 단호한 손짓으로 거절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창틀에서 내려와 마법사들에게 다가갔다. 꼿꼿하여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이안은 가장 가까운 마법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일렀다.
“나는 괜찮다. 착잡하여 마음에 찬바람이 들지만, 지금 할 것은 남은 내 부하들을 무사히 데려오는 것이고, 다몬을 참수하여 버고스에 거룩한 뜻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내 걱정을 입에 담지는 말아라. 그대들의 말은 나에게 닿아.”
나에게 닿아, 나를 변화하게 해. 그러니 걱정, 불안, 심려 따위의 알량한 감정을 숨기라는 뜻이었다. 평온하고, 차분한 낯과 음성이었으나 마법사의 어깨를 쥔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안은 잠시 숨을 고르며 몸을 빙글 돌렸다.
“자. 다시 해볼 것이다. 혹여 의견을 덧붙일 자가 있다면 언제든지, 그리고 부담 없이 더하라.”
자신의 상태가 안 좋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혹여 부족한 점이나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면, 지체 없이 언질하여 모자람 없게 해달라는 부탁이다.
마법사들이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몬의 숨을 직접 가져오기로 맹세한 이안. 이것이 그가 행하는 복수의 서막임이 느껴졌으니.
“하아.”
따악!
이안은 숨을 가볍게 들이쉰 다음 다시금 손끝을 튕겼다. 맥없이 풀어져 있던 정신이 아주 조금 움찔거리는 듯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더 차분하고, 더 고요하게, 저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신과 같은 시선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버고스와 루스웨나가 은밀히 접선한 것은 기정사실로 보인다. 그런데 어찌하여 두 나라의 답신 속도가 이다지도 다를까?”
이안의 물음에 마법사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이렇게 늦어지는 것이면 루스웨나에서는 답신을 아예 안 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버고스와 뜻을 함께하니, 움직일 필요가 없다 판단한 것입니다.”
“기각. 아니다. 버고스와 뜻을 함께한다고 하여 그 입장 표명을 버고스에 맡긴다면, 전쟁의 주도권과 훗날 있을 우선협상권 따위에서 후순위로 밀리게 된다. 에리포니의 성격상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렇다면 의견 조율의 문제일까요?”
“어디와?”
“음, 버, 버고스랑 의견 조율이 안 되었다거나… 아니면 에리포니 왕과 그 아래 부하들 사이에서요.”
“그건 일리가 있지.”
이안이 인정한다는 듯 고갯짓하자, 마법사가 살짝 기쁘게 웃었다.
그들은 가만히 앉아 이안이 오가는 것을 지켜봤다. 탁자 주위를 서성이며, 홀로 머릿속에서 그만이 볼 수 있는 세계를 가늠하는 듯했다.
“자이라를 우리가 데리고 있잖은가. 분위기로 보아하니 루스웨나 마법사들은 왕궁과 협력한 적이 없어 보이던데. 노인도 죽고 자이라까지 포로로 잡혀 와 있으니 내부적인 불만이 그 끝을 찍었을 게라. 그것과 관련하여 협의하는 과정이 길어지는 걸 수도 있다.”
“그러면 다시금 전언 보내는 건 어떻겠습니까? 자이라와 쟝을 교환하자고요.”
“그건 저쪽에서 제안할 내용이다. 우리가 할 것이 아니라. 왜냐면, 저들이 마법사를 구금함으로 인하여 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였기 때문이지. 바리엘의 중립 입장과 퇴각이 절실한 지금, 우리는 이미 한 번의 전령을 보낸 것으로 제 역할을 다 했다.”
이안은 알고 있다. 이제 저들은, 특히 버고스의 다몬은 마법사들을 인질로 삼아 원하는 바를 얻고자 할 터였다.
바리엘의 중립 선언.
혹은 이안의 폭주로 인한 대지 균열.
자신의 화를 돋구듯이, 그리고 짐작하여 제 수를 헤아려보라는 듯이, 그 어떠한 서신 한 장 함께하지 않았다. 이안은 이것이 명백한 도발이고, 다몬이 강하게 내려놓은 수임을 머리로 이해하고 있었다.
꽈악.
하지만 이해한다고 하여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감정이겠는가? 이안은 소매 속에서 주먹을 꽉 쥐며 잠시 멈칫거렸다.
의욕적으로 이런저런 주장을 내던지던 마법사들 역시 이를 기민하게 알아채고 숨죽였다.
“…내가 그대들에게 한 가지 허락 구할 것이 있다.”
“허락을 구하시다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안 님이 어찌하여 저희에게 그런 걸 하세요.”
“예. 맞습니다. 그렇게 이르시면 저희가 무섭습니다.”
이안이 희미하고 안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니. 내 구할 것이다.”
‘무엇을’이라는 목적어가 빠져있어 애매하게 들리는 선언이다. 허락을 구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남은 마법사들을 구한다는 것인지.
“나는 내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 옌, 칸치, 토미, 쟝이 돌아올 수 있다면 나의 모든 것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있어. 하지만 우리는 마법부. 그것도 바리엘의 마법부다. 전시 중 상대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나라 대 나라의 입장으로 응해야 하는 것이요, 이는 사사로운 감정으로 감히 내릴 수 없는 황제 폐하의 뜻과 같다. 그러니. 그 과정 속에서 또 누군가-”
죽어 돌아오더라도 모두들 나처럼 슬퍼하지 말라. 나를 탓하여 부덕을 논하되, 자신들이 바리엘의 마법사라는 걸 잊지 말라.
이안은 목적을 거대하게 가질 것이다. 다몬의 죽음 그리고 바리엘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대륙의 평화 같이.
마법사들이 다시금 조금 더 다가왔다.
“이안 님. 이미 닳고 닳도록 말씀드렸습니다. 저희에 관한 위험은 이안 님이 지실 게 아니라고요. 모두 저희의 선택이고 뜻이니, 존중해주십시오.”
“그리고 원래 사람 목숨으로는 협상하는 것 아닙니다. 옌, 칸치, 토미, 쟝 모두 적지에서 수모를 당하고 있지만, 잊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들이 바리엘의 마법사라는 것을요.”
“그러니까, 저희는 이안 님만 보고 가겠습니다. 이안 님은 무엇을 보고 가시렵니까?”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손을 모았다. 그들은 서로를 껴안으며 각자의 존재를 느꼈다.
“셀레나가 저리 돌아온 순간부터, 모든 건 예견되어 있었습니다. 모두가 살아 돌아오는 것을 꿈꾸되 현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지금은 전쟁 중이니까요.”
최선을 다하자. 하지만 그리해도 안 되는 것에는 미련을 두지 말자. 큰일을 위하여 희생을 희생으로 받들 수 있는 자세를 지니자. 마법사들이 이안에게 눈빛으로 그리 일렀다.
이안은 그들의 손등에 손을 올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바리엘의 마법부 장관으로서, 바리엘과 마법부의 영광을 좇아갈 것이다.”
“함께합니다.”
“그러니 이제 자책 같은 거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저, 퇴사하겠습니다.”
“저도요. 전쟁 끝나고 퇴직금 들고 도망갈 겁니다.”
“알 수 있습니다. 셀레나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필시 함께하여 손을 잡았겠지요.”
장난스러운 위로 속에서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굉장히 바람과 동시에 그를 놓아야만 할 때가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러했다. 네 명의 마법사가 무사히 돌아오길 그 누구보다 원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단호하게 협상 우위를 점하는 게 중요했다. 소중하지 않은 것처럼, 마법사 다섯 명의 죽음 정도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가 있을까.
베릭은 벽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이안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눈을 부릅뜨며 앞니를 보였다.
‘내가 딱 보고 있다. 또 울면 물어버림.’
그리고 그 옆, 상태를 계속 확인하며 무언가를 기록하는 아코렐라.
이안은 탁자 위에 놓여있는 가죽 장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단단히 착용하였고, 이내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앞으로 한 시간.”
한 시간 안에 루스웨나 측에서 답신이 오지 않으면, 이안을 선두로 한 마법사들이 버고스 본진에 공격을 퍼 부을 것이다.
비록 그 수가 확 줄어들었고 이안의 몸 상태 또한 최적이 아니었으나, 다몬이 선을 넘어오지 않았나. 넘어온 발은 잘라내는 게 맞았다.
‘다몬이 거친 수법으로 나를 자극하려 함은, 아직까지 원하는 만큼은 균열에 자극이 가지 않았다는 뜻. 또한 대지진의 시기가 상당히 가까워졌다는 걸 시사한다. 오늘밖에 시간이 없어. 군더더기 없이, 아주 간결하게 적군의 수뇌를-’
“모두 다몬의 목덜미에서 눈을 떼지 마라. 그리고 똑똑히 보아라. 내가 셀레나와 같이 그자의 숨을 짓밟을 것이다.”
처억.
마법사들은 가슴팍에 손을 올리며 바리엘 황궁식 예법으로 인사를 올렸다.
되었다, 그리하면 되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인 채 등을 돌렸고 계속해서 장갑을 매만졌다.
마법사 네 명의 죽음을 각오하고 가는 것이지만, 막상 그것이 닥칠 것만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혀왔다.
하지만 티 낼 수 없다. 해가 뜨면 자신은 바리엘의 장관 이안 히엘로가 될 테니까. 마치 황제였던 그 시절처럼, 가슴 아래 무언가 부서져도 버텨야만 했다.
똑똑.
“이안 님.”
바깥의 기별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루스웨나에서 답신이 왔나? 마법사들의 눈빛이 살벌하고 이글거려 시종이 뒷걸음질 쳤다.
“루, 루스웨나 건 아닙니다.”
“아, 아닙니까? 괜히 눈에 힘줬네요.”
“무슨 일이시죠?”
“어린 마법사 말입니다. 감금 중인.”
“자이라?”
“예예.”
시종이 허리를 납작 숙이며 전언했다.
“밤새 생각을 많이 해보았다고, 이안 님을 뵙고자 한답니다. 격식을 차려 인사 올리고 싶다 하는데… 어찌, 마력봉인석을 채우고 들일까요? 자세한 것은 전해 듣지 못했으나, 루스웨나의 에리포니 왕에 대해 서로 긴밀히 이야기 나눌 거리가 있다 했습니다. 마, 마법을 걸어두었다는데, 이안 님에게만 직접 말하겠다 합니다.”
“들여라.”
여전히 영리한 아이였다. 그 행동이 현명함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이안은 허한다는 뜻으로 손을 까딱거렸다.
의지를 단단히 잡은 가죽 장갑이 부드럽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