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04
제404화. 살아 돌아온 자의 가치
루스웨나의 진영은 언덕을 장벽 삼고 있었다.
제 나라의 대지가 저런 식으로 쓰이다니, 클리포포드 병사들은 인상을 찌푸린 채 언덕바지를 올려다봤다. 루스웨나의 깃발이 여기저기 꽂혀 휘날리는 게,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잠시 후, 움직이는 깃발이 보였다. 루스웨나 진영에서 포로 교환을 위해 아래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게다.
이안은 고개를 왼쪽으로 틀어 저 먼 대지 끝을 힐끔거렸다. 버고스는 바리엘과 루스웨나가 접선하고 있음을 알고 있나? 그것 또한 하나의 변수가 될 것 같은데…….
“이안 님. 저기 옵니다.”
“에리포니 왕입니다.”
“쟝은? 보여?”
“병사들은 모두 결집하여 기습에 대비하라!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뱀과 같은 자들이다!”
말을 타고 내려오는 에리포니. 그녀는 활대를 시원하게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마치 오랜만에 보는 친우를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왕은 호위대와 함께 위엄있는 걸음을 이어나갔다.
탁 트인 평야에서 이루어지는 포로 교환. 마법사들은 하늘로 살짝 날아올라 망원경을 꺼냈다.
타앗!
“마차가 있긴 있습니다.”
“쟝 대장의 기운이 느껴져?”
“글쎄다, 잘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루스웨나 마법사들도 함께해서 그런 것 같아. 아니면 우리가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쟝의 마력이 희미하다거나.”
자이라가 마력봉인석으로 구속된 자신의 손목을 매만지자, 이안이 아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안의 시선은 가까워지는 에리포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자이라. 네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 무엇인지, 다시금 읊어보라.”
“왕궁에 남아있는 가족의 안위와 마법 연구 기록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당장 돌아가면 에리포니는 너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을 것이다. 클리포포드 장벽 안에 있었던 모든 것을 상세히 이르라 하겠지.”
“잘할 수 있습니다. 맹세를 함구하는 것이요.”
“루스웨나는 흑갑옷 외, 마법사들이 없으면 상당히 난감해지는 처지다. 그리고, 항상 명심하렴.”
자이라는 부어오른 제 볼을 어깨로 문지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장군이라는 작자에게 맞았던 것, 절대 잊지 않으리.
“자신의 가치를 아는 자는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음을.”
타닥타닥!
히이잉!
에리포니는 상당히 가까운 거리까지 말을 몰아 다가왔다. 그녀의 옆을 지키고 있는 건 일반 병사가 아니라 마법사들. 그들은 자이라를 알아보고 반가운 기색으로 손을 흔들어댔다.
“이런, 이안 경. 혹시나 싶었는데 아주 멀쩡히 잘 살아있군.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다친 곳 하나 없어 보여. 내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러게 말입니다. 화살이 모두 눈먼 것처럼 저 하나를 꿰지 못하였으니. 아무래도 저희 쪽은 다행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요.”
활을 그렇게 쏘아대더니, 어찌 원하는 바 하나를 얻지 못하였나 비꼬는 말이었다. 에리포니는 미간을 찌푸리며 제 손에 든 화살을 들어 보였다.
“누구 덕분에 내 전용 활이 망가졌거든. 바리엘의 마검사였는데, 그쪽으로 책임을 물어도 되려나 모르겠어.”
“물으십시오. 하나부터 열까지 잘잘못을 따져가며 물읍시다. 그리하면 루스웨나는 국민들 가죽까지 벗겨가며 보상금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환영한다. 이안은 두 손을 살짝 펼치며 웃었다.
저것이 죽다 살아난 것 맞나? 에리포니는 짜증스러운 낯으로 자이라를 쳐다봤다. 두 손이 마력봉인석으로 묶여있었다.
‘하여간에.’
역시나 어린것은 어쩔 수 없단 말이지. 에리포니는 긴 청록색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고갯짓했다.
“루스웨나 마법사를 이쪽으로 보내라. 그리하면 우리 또한 바리엘의 마법사를 보내주겠다.”
“생사 여부를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엘더트!”
“예, 전하.”
엘더트는 마차 쪽으로 다가가더니, 이내 꽁꽁 묶인 성인 남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왔다. 고불거리는 머리칼이 힘없이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희게 질려 심장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는지 의문일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마법사들이 놀라서 쟝의 이름을 불러댔다.
“쟝 대장! 정신 좀 차려보십시오!”
“쟝! 쟝! 괜찮아? 눈 떠 봐!”
스윽.
에리포니는 여기까지라며, 부채로 그의 얼굴을 가렸다. 서로 간의 포로를 확인했으니, 이제 진행할까?
이안이 먼저 마력봉인석 열쇠를 루스웨나 측으로 던졌고, 이내 자이라의 어깨를 툭 쳤다.
‘가거라.’
자이라가 마지막으로 이안을 올려다봤다. 그러곤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천천히 걸어갔다.
쟝도 마찬가지. 밧줄을 풀고, 터덜터덜 쓰러질 듯이 바리엘 진영으로 내달렸다. 정신없이, 그저 본능적인 몸짓과 같았다.
자이라와 쟝이 가까워지는 그때. 에리포니는 보란 듯이 소리쳤다.
“바리엘의 작은 황제께 꼭 전해주거라. 내 그대들의 마법사만큼은 존중하여 살려 보내주었다고.”
버고스에서는 머리를 잘라 보냈다지? 에리포니는 혹여 전쟁이 불리한 쪽으로 흘러갈 때를 대비하여 숨구멍을 뚫어놓는 중이었다. 버고스와 동맹 맺어 함께하긴 하나, 바리엘을 대하는 자세만큼은 다르다고.
이안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쟝을 보며 대꾸했다.
“예. 제 친히 전해드리겠습니다. 진 황태자 전하께서는 분명 그에 상응하는 걸 내드리겠지요.”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다.”
“대답할 의무는 없다는 걸 알아주십시오.”
“혹시 말이다. 티모시 사절이 바리엘로 귀화하였나?”
이안이 차가운 눈빛으로 반응하자, 에리포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몬 왕의 곁에 항상 있던 자가 갑자기 없어졌으니, 에리포니는 수소문을 진행했다. 그러던 중, 티모시가 전장에서 탈영했다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혹여 그가 바리엘로 귀화하였다면, 버고스 측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라.
“답할 가치가 없군요.”
“왕의 물음이 가치가 없다라. 확실히 지금이 전시 중은 전시 중인가 보다! 하하하! 그러면 하나 더. 바리엘은 정녕 이번 전쟁에서 철수할 의지가 없는가? 클리포포드와 버고스는 오래전부터 사이가 안 좋아. 이번이 그리 특별한 사태도 아니지 않나. 바리엘이 물러선다면 루스웨나 역시 물러설 뜻이 있는데.”
“이미 너무 먼 길을 왔습니다. 그리고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전쟁에 있어 제일 늦게 참전한 것은 루스웨나 그쪽입니다. 적당히 낄 곳을 보셨어야지요. 어딜 감히 바리엘의 행보에 이리저리 말을 붙이십니까?”
이안이 단호하게 일갈하자, 엘더트를 비롯하여 루스웨나 병사들이 검집에 손을 올렸다. 클리포포드 병사들 또한 마찬가지.
“왕께서 질문하셨으니 저 또한 하나 하겠습니다. 얻어먹을 게 뭣 있다고 이리 어슬렁거리십니까? 다몬 왕이 클리포포드를 반으로 나뉘어 가지자 하더이까?”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은 언제나 기대 이상의 것을 얻지.”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니 감히 새겨들으십시오. 클리포포드가 마물로 범람하면 이는 클리포포드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리엘은 무사히 국경을 지켜낼 것이고, 북진하지 못한 마물은 필시 옆으로 새어 루스웨나 쪽으로 흘러갈 것입니다.”
“잠깐, 그게 무슨 말이지?”
에리포니의 되물음에 이안이 속으로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마법사들 역시 시선을 주고받으며 사달의 작은 틈을 발견한 것처럼 침묵했다.
진짜 모르고 있구나. 하긴, 다몬의 입장에서는 당장 루스웨나에게 내어줄 만한 것이 클리포포드 영토밖에 없었다.
자이라와 쟝이 서로를 지나쳐갔다.
“쟝.”
이안은 에리포니를 무시하며 쟝을 불렀고, 그는 고개를 겨우 든 채 반응했다. 온몸이 팅팅 부어올라 있었다. 개중 어느 자상이 그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쟝이 비틀거리며 앞으로 쓰러지려고 하자, 이안이 내달렸다.
“이안 님!”
“쟝 대장!”
그와 함께 움직이는 마법사들. 이안은 베릭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쟝을 받아내며 꽉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루스웨나 병사들이 움찔거리며 경계했고, 클리포포드 병사들 역시 섣불리 나서지 말라는 듯 검을 겨누었다.
지이잉. 지잉.
이안은 쟝을 붙잡자마자 마력을 불어넣어주었다. 한데는 차고, 한데는 너무 뜨거워 이것이 살아있는 자의 몸이 맞는가 싶을 정도다. 이안은 쟝의 머리칼을 넘겨주며 그의 의식을 붙잡았다.
“쟝. 내 말이 들리는가?”
“…다. 이안 님.”
“힘들더라도 마력을 끊임없이 받아내라. 장벽 안까지 움직일 것이니. 헤일!”
“이안 님. 여기서 먼저 마력을 불어넣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쟝 대장 상태가 너무 안 좋아요. 한시가 급합니다.”
지이잉. 지잉.
쟝은 헤일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깊고 나지막한 숨을 들이쉬었다. 마력이 들어오자, 숨통이 조금씩 트이는 기분이다.
이안은 그의 식은땀을 손수 닦아주며 물었다.
“쟝. 살아있음을 느끼는가?”
“예. 이안 님. 아, 이거 머리가 팽팽 돕니다. 저 새끼들, 마력봉인석만 아니면 한 주먹거린데. 쩨쩨하게 마력 하나 안 넣어주고…….”
“말 많네. 이안 님, 쟝 대장 걱정 안 해도 되겠습니다.”
“…나 계속 재갈 처물렸다.”
“알았으니까 좀 다물어봐요.”
지이잉. 지잉.
대지 한가운데서 몽글몽글 떠오르는 빛. 마법사 동료를 살리기 위해 발하는 마력이었으나, 병사들이 보기에는 져버린 달이 그들에게 떨어진 것처럼 보였다.
넋 놓고 구경하는 와중, 에리포니가 소리쳤다.
“이안! 마물이 무슨 말인지를 물었다!”
대답하라고, 새되게 내린 명령. 이안은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 쟝을 내려다봤다.
살아 돌아왔다. 셀레나는 주검으로 돌아왔지만, 남은 자들 중 한 명인 쟝이 이리 살아서 돌아왔다. 쟝은 면목 없다는 듯 어설프게 웃으며 눈 감았다.
“죄송합니다. 이안 님. 진영 안쪽까지 들어갔는데, 뭐 해온 게 없네요.”
“아니. 되었다. 쟝, 너는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그 역할을 다했어.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네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조금 더 버틸 수 있어.”
“무슨 소리십니까. 저 없는 사이 뭔 일 있었어요?”
“쟝 대장. 가만히 있어요. 이안 님 보기 좋게 계속 웃으시고. 응. 잘하네.”
대놓고 무시당한 에리포니가 화살을 집어 들자, 클리포포드 병사들이 단숨에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팽팽하게 맞서는 기운 가운데, 루스웨나 마법사들 또한 자이라를 맞이하며 있는 힘껏 껴안았다.
“자이라. 괜찮아? 다친 곳은?”
“난 괜찮아. 미안해. 잘 해낼 줄 알았어.”
“아니아니. 무사한 것만 해도 감사하다. 어린 너를 보낸 우리 잘못이지.”
자이라도 식구들의 환대를 만끽하는 와중, 에리포니가 신경질적으로 활대를 내렸다.
대답 없는 물음을 계속 던지는 것은 왕으로서의 체면에 금 가는 행동이다. 여기서 더 망신 치를 수는 없으니, 에리포니의 시선은 단숨에 자이라 쪽으로 기울었다.
“자이라.”
“예. 전하.”
“아주 대단하구나. 네 덕에 우리는 바리엘 마법사 인질을 잃었어. 증명해주렴. 너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리고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저 장벽 안에서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하라. 그리고 이안이 흘린 ‘마물’이 대체 무엇인지도.
자이라는 순진하게 눈망울을 굴리며 대답했다.
“예. 전하. 제 기억 속 모든 것을 전해드리겠습니다.”
“대답은 잘하는군. 역시 한 번 죽었다 살아나는 게 갱생에는 도움 돼. 엘더트! 철수하자!”
자이라는 마법사들과 함께 말에 올라탔고, 여전히 쟝을 둘러싼 채 웃고 우는 자들을 뒤돌아봤다. 곧, 언젠가는, 자신과 자신의 식구들 또한 저리될 것이다. 전쟁이라는 배경 속에서도 안락을 찾는 관계.
자이라는 함께하는 마법사를 꽉 껴안으며 이안의 지시를 복기했다.
‘왕궁에 잡혀있는 가족을 구하고 모든 걸 뜻대로 하기 위해서는, 현 진영의 분열을 유도해야 한다. 왕궁에서 계속 병력이 차출되게끔 말이지. 그리하면 왕궁이 빈단다. 자연스레 네 가족을 지켜보는 눈도 줄어들 것이라. 전쟁에 있어 우리에게는 부담되는 전략이지만, 자이라 너의 목표를 위해서는 그만한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