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05
제405화. 자이라의 회유
“균열?”
에리포니는 궐련을 가볍게 튕기며 되물었다. 균열이라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 아닌가.
클리포포드의 가치라 하면 당연하게도 비옥한 토지와 싱그러운 이파리 그리고 짙게 깔리는 노을을 꼽아 낼 것이다. 루스웨나가 차지할 일곱 개의 도시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은데, 균열?
에리포니는 엘더트를 바라보며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를 확인했다. 그의 낯 역시 당황스러운 걸 보면, 헛들은 게 아니긴 한가 보다.
“네. 오가는 마법사들이 치료하며 내뱉는 걸 들었습니다. 클리포포드 대지 아래 거대한 균열이 일렁이고 있어, 바리엘 마법사들이 힘을 쉬이 쓰지 못하였다고요. 거의 기정사실인 듯 싶었습니다. 클리포포드의 병사들도 알고 있는 듯했으니까요.”
“잠깐. 균열이라 하면, 내가 아는 그것 맞지? 마물의 근간이라 일컫는 그것.”
“예. 맞을 것입니다.”
“균열이 일어나려면 대지진-”
대지진.
에리포니는 저도 모르게 멈칫거렸다. 생각해보니 다몬 그 개놈의 자식이 먼저 일러주지 않았던가. 클리포포드에 곧 대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에리포니는 새로운 궐련 끄트머리를 잘근잘근 씹어대며 미간을 짚어댔다.
“어이가 없네. 버고스 이것들이 지금 루스웨나를 두고 거짓된 말장난을 친 것이라.”
“전하. 고정하십시오. 아직 확실한 건 없습니다.”
“아니. 정황상 저것의 말이 맞다. 다몬과 만나서 의아했던 그 작은 조각. 그게 뭔지 몰라 꺼름칙했는데, 이제 알겠다. 어차피 대지가 오염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른 제안 없이 동맹에 재합의한 것이라. 이 쳐 죽일 놈 같으니라고.”
에리포니는 화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 탁상을 내려쳤다. 콰앙, 큰 굉음에 자이라는 놀란 척 더욱 납작 엎드렸다.
“전하. 고정하십시오. 사람을 보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클리포포드 병사들조차 알고 있는 사안이라면 알아내기 쉬울 것입니다.”
대지 오염만이 문제가 아니다. 균열로 인해 마법사들이, 특히 이안이 힘을 제대로 못 쓴 것이라면? 잊을 수 없는 거대한 화염신의 재림이, 더한 힘으로 루스웨나를 덮친다면?
바리엘에 비해 오합지졸인 루스웨나 마법사들이 견딜 수 있을까? 저들 하나하나 목숨마다 금기의 마법을 걸어내야만 겨우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에리포니는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하아, 돌겠네.”
“전하. 저희 할머니와 마지막으로 싸웠던 이안 히엘로 장관 말입니다.”
“이안이 왜.”
“마법 부작용을 겪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이것은 저 또한 확실치 않지만, 정신계열 마법 대부분 부작용을 지니고 있는 걸 근거로 하여 틀림없을 듯싶습니다.”
정말로? 에리포니는 아까 대지에서 포로 교환활 때 보았던 이안을 떠올렸다. 조금 야윈 것 같긴 했지만,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오히려 날이 바짝 선 게, 만만치 않았지. 감히 왕의 질문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무시하지 않았나. 더 재수 없었다.
“정신계열 마법은 정신적인 부작용을 가지고 오는가?”
“마법마다 달라서 확언드리기 어렵습니다. 고하 마법은 워낙에 최고위 마법이라 자료도 드물고요. 루스웨나로 돌아가면 알아낼 수 있는데…….”
자이라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한평생 할머니를 중심으로 함께 살고 연구했던 주거지로 돌아가면 자료를 가져올 수 있었다. 아는 것이 힘이니, 앞으로 마법사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 자료가 꼭 필요할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살아있었다면 필요 없는 일이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녀는 심연으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지금은 단 한 명의 마법사도 본국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
하지만 엘더트가 선을 그었다.
루스웨나가 현 전쟁에서 존재감을 보이고 있는 연유는 딱 두 가지였다. 흑갑옷과 마법사. 그중 하나라도 제하게 되면 힘의 균형이 깨지고, 이는 곧 전세의 기울기를 가져올 것이다.
엘더트는 절대 안 된다는 뜻으로 에리포니에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절대 안 됩니다. 전하.”
“글쎄. 균열로 인해 마법사들이 사리고 있다면, 우리 쪽 마법사가 나서지 않는 이상 특별한 반응이 먼저 오지는 않을 것 아닌가? 흑갑옷은 마검사들이 주로 대응하였고, 이안이 부작용을 지니고 있다면 더더욱 먼저 나설 것 같지는 않은데.”
“행하는 것만이 힘은 아닙니다. 지니고 있는 것 자체가 힘입니다. 그리고 전하, 우선은 제가 저 마법사의 말이 맞는지를 확인해보겠습니다. 시간을 조금만 주십시오.”
‘저것’. 그리고 ‘저 마법사’.
자이라는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새삼 많다는 걸 깨달았다. 클리포포드 장벽 안에서는 꼬맹이니 아가니, 별별 소리를 다 들었는데.
“다만 버고스에서 온 마법사의 머리통으로 인해, 그들의 행보를 예측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클리포포드 전체가 술렁이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 하여간 개놈의 새끼. 내가 이 전쟁 후에는 도륙을 내버리고 말 것이다.”
에리포니는 궐련을 지그시 문 채 중얼거렸다.
어차피 예견된 일이었다. 바리엘과 클리포포드를 격파하여 이 땅을 차지한다고 한들, 그다음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득을 위하여 루스웨나와 버고스가 다툴 게 분명했다.
버고스는 보란 듯이 루스웨나를 속였으니까. 이는 예견할 수밖에 없는 미래요, 숱한 역사가 일러주었던 길이다.
“바리엘이 버고스를 어찌 대하는지 주시하는 게 좋겠다.”
“예. 전하. 정찰병을 더욱 늘리겠습니다.”
“또, 더 없는가?”
왕은 아이에게 보고 들었던 것을 모두 일렀는지 확인했다. 자이라는 납작 엎드렸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운 다음, 제안했다.
“있습니다.”
“그래. 계속 일러라.”
‘자신의 가치를 아는 자는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자이라는 이안의 말을 되새기며 잠시 고민했다. 장벽 안에서 보았던 마법사들은 가히 그 문장에 알맞은 자들이었다. 마법사라는 존재 자체만으로 빛나, 모두가 경외하여 높이 모시는 분위기지 않았나.
하지만 이곳은? 왕의 휘하 아래 모든 자가 도구처럼 이용되고 있었다.
자이라는 눈을 똑바로 뜬 채 잠시 멈췄다. 이어질 보고가 들려오지 않자, 에리포니와 엘더트가 눈썹을 동시에 까딱거리며 아이를 내려다봤다.
“제가 아주 뛰어나답니다.”
“뭐?”
갑자기 무슨 소리? 황당해하는 두 사람을 두고, 자이라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읊었다.
“나이로 마력의 한계와 그 깊이를 가늠할 순 없지만, 이안 경이 그리 말했습니다. 제가 아주 특출나다고요. 하여 그 자리의 마법사들과 비견하여 반짝인다 하였습니다.”
조금 거짓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전에 기속으로 자신을 구속할 때, 이안은 오직 자신의 마법만이 유효할 것이라 단언하였으니까.
에리포니는 피식 웃으며 한쪽 어깨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알아두셨으면 좋겠습니다. 저쪽에는 이안 경이 있듯, 이곳에는 제가 있다는 것을요.”
“그래. 내 아주 든든하구나. 이리 말해주면 되겠니?”
가소롭고 귀엽구나. 에리포니는 피식 웃으며 그리 말했고, 자이라는 대답 없이 고개만 잠깐 숙였다. 그때, 바깥에서 부하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전하. 클리포포드 장벽이 크게 열렸습니다.”
“장벽이 열려?”
“예. 아무래도 병사들을 내보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나와서 확인해 보심이 좋겠습니다.”
차악!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에리포니는 천막을 걷어내어 망원경을 집어들었다.
부하의 말대로 장벽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이내 촘촘하게 대열을 짠 클리포포드 병사들이 절도있는 모습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전방의 각도로 보아, 저자들의 목표는 루스웨나가 아니라 버고스인 듯싶었다.
바리엘의 마법사 목을 베었으니 그 반응이 오겠거니 했어도, 이리 빠를 줄은 몰랐다. 방금 전, 포로 교환을 마치고 돌아오지 않았던가.
에리포니는 손짓으로 엘더트에게 지시했다.
“버고스 측으로 전령을 보내보아라. 클리포포드가 버고스와 맞붙으면 장벽의 후미와 우측이 완전히 비게 되는데, 이는 우리에게 기회라. 하지만 망할 균열이 실제라면 생각할 여지가 많아지지.”
“예. 전하. 빠르게 전언하겠습니다.”
“전하. 저는 그만 돌아가봐도 되겠습니까?”
자이라는 무릎을 툭툭 털며 허리를 꼿곳이 세웠다. 다소 무엄하게 결린 어깨까지 돌렸으나, 에리포니는 망원경에 시선이 꽂혀 보지 못했다.
“그래. 돌아가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거라.”
“예. 전하.”
자이라는 총총거리며 뒤돌아 천막을 나섰다. 그리고 마법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들어섰다. 쟝이 남기고 간 피비린내가 아직 여전했다.
“자이라. 전하께서 뭐라 하셔?”
“이리 와봐. 마력 좀 넣어줄게. 바리엘 쪽에서 험한 짓은 안 했지? 겉으로 봤을 때는 다친 곳 없어 보여.”
“응. 나 괜찮아. 하나도 다친 곳 없어.”
자이라는 마법사들 품으로 가볍게 안겨든 다음, 몸을 떼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곧 있으면 바리엘하고 버고스가 크게 붙을 거거든.”
“자이라?”
“잘 들어봐. 그런데 에리포니 전하는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어. 지금 와서 발 빼자니 너무 깊이 들어섰고, 그렇다고 온 힘을 다하여 버고스를 지원하자니 속은 것도 괘씸한 데다 마법사들을 전면으로 내세울 수 없으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건데?”
“가만 들어봐. 듣고 결정해.”
자이라는 마법사들에게 가까이 모이라는 듯 손짓했다.
“바리엘 마법사, 그러니까 이안 경을 비롯한 상대측 마법사는 다몬에게 떠 넘기는 게 제일 낫겠지. 어차피 저쪽은 마법사를 참수해서 맞붙을 명분도 뚜렷하니까. 그렇다면 루스웨나는 클리포포드를 상대할 수밖에 없네? 더 많은 병력과 지원이 필요하겠지.”
“전쟁은 원래 병력과 물자 싸움이야.”
“왕궁 비면, 우리 돌아가자.”
“어?”
자이라의 말에 마법사들이 눈을 끔뻑였다.
“왕궁 가서 우리 가족들 데리고 바리엘 가자. 내가 그쪽이랑 말 다 해놨어. 우리, 가서 금기의 마법 연구하자. 할머니 구할 방법, 바리엘이 찾도록 도와주겠대. 우리는 적당히 상황 보면서 움직이다가 도망가자.”
지금 아이는 자신이 내뱉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걸까? 탈영? 그것도 왕궁에 붙잡힌 가족을 되찾고서 귀화까지?
마법사들이 자이라의 이마를 짚어주자, 자이라는 제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여기서 계약 마법 아는 사람?”
“계약 마법. 들어본 적은 있어.”
“어? 정말? 난 몰랐는데. 이거 봐봐.”
지이잉. 지잉.
자이라는 마력을 발동해서 제 몸 깊은 속에 새겨진 계약을 끌어냈다. 손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수많은 동심원.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며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냈다.
“우리가 바리엘로 돌아갈 수 있다는 증거. 그쪽 마법사랑 맺은 계약이야. 루스웨나에 남고 싶은 사람은 남아도 돼. 되는데, 가능하면 같이 가자. 우리, 가족이잖아.”
자이라가 마법사들의 손을 붙잡으며 회유했다. 함께 숲에서 평생을 지냈던 가족이자 동료며, 친구인 자들.
볼모로 잡혀있는 자들만 아니면 어차피 귀국하여 깊은 숲으로 숨어들 생각이었다. 깊고 깊은 숲이라면, 그것이 루스웨나의 땅이든 바리엘의 땅이든 알게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게 되겠어? 전쟁은 말처럼 쉽게 흘러가는 게 아니잖-”
콰아앙! 쾅!
마법사의 말을 반박하여 끊어내듯, 굉음이 터졌다. 자이라는 히죽 웃으며 두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창공에서 난 소리라. 그 근원이 어디인지는 모두가 알겠지.
“쉽게 흘러가지는 않아도, 원하는 대로 흐르게 할 수는 있어. 내가 봤을 때, 이안 경은 그래.”
“자이라. 너 혹시 세뇌당했니?”
애가 포로로 잡혀갔다 오더니, 어찌 이리 이안에 대한 언급을 계속해? 마법사가 다시금 자이라의 이마에 손을 올리자, 아이는 그 손을 붙잡으며 긍정했다.
“응. 나 세뇌당했어. 그래서 무슨 말 해도 안 들을 거거든. 할머니 살릴 수 있다는데, 내가 왜 거절해? 그러니까 다들 나랑 같이 가자. 안 그러면 우리, 왕의 이름 아래 영원히 짓눌리게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