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1
제41화. 돌아온 이유
정문 밖의 병사들은 여전히 검을 들고서 경계 태세를 유지했고, 안쪽에서 들려올 명령을 기다렸다.
대립하는 두 세력 간의 분위기가 극명했다. 부들거리는 손과 발로 겨우 서 있는 쪽과 여유롭게 구룻잎을 씹으며 기다리는 천려족.
끼이익.
이내 문이 열렸다. 그들은 양옆으로 갈라지며 낯선 자들의 입성을 허락했다.
“이안과 족장만 들어오라!”
“들어오라?”
“말이, X발 듣기 좋네.”
“…….”
병사는 바리엘의 중앙군 소속이었고 저들은 변방의 야만인이었다. 당연한 태도와 말투였으나, 전사 한 명이 보란 듯이 비아냥거리며 시비를 털어댔다.
그러자 다른 전사들 역시 피식 웃으며 동조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상당히 위압적이고 거친 모습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이안도 말리지 않았다.
“호위는 들이게 하라.”
“그건 아니 된다.”
“네놈이 단장이고, 대장인가?”
“…이미 위에서 명령이 내려온 것이다.”
“다시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대의 주군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않나. 우리의 마음이 바뀔 수 있듯.”
이안의 담담한 말에 병사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대항할 의지가 없다 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중앙군은 이미 데르가와의 전투로 전력 손실이 상당했기에, 추가적인 무력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만 했다.
게다가 상대는 호전적인 야만족으로 브라츠를 위협하는 천려. 훗날은 어찌 될지 모르겠으나, 지금 당장 이 저택을 밀어버리는 것쯤은 간단하지 않겠나.
이안은 카칸티르를 돌아보며 제안했다.
“카칸. 네르사른 님과 수 그리고 저. 이렇게 넷이서 들어가면 될 듯합니다.”
“나는! 이안, 나도 있어! 여기 베릭 있네?”
“그래. 경의 뜻대로 하지.”
“자. 어서 가서 다시 물어보거라.”
“이아아안! 귀먹었냐?”
짐짝처럼 매달린 베릭이 저도 데려가 달라며 몸을 꿈틀거렸으나, 열외는 열외였다.
이안의 압박에 병사가 다시금 안쪽으로 들어갔고 이내 만족할 만한 소식을 가져왔다.
“안으로 드시오.”
“다녀오겠다. 다들 여기서 기다려라.”
“네. 카칸!”
끼이익.
정문이 천천히 닫혔다. 두어 달 만에 돌아온 브라츠 저택은 기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고즈넉하고 싱그러운 기운은 온데간데없고, 패전의 기운이 짙게 물들어 있었다.
멀리 보이는 별채는 통째로 타버린 것처럼 새카맣다. 이안은 그 옆에 쌓인 형체 모를 것들을 쳐다봤다. 대체 저것들이…….
“자네가 이안 브라츠인가?”
그때, 한 여자가 부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본채에서 걸어 나왔다.
옷차림새로 보아 조사단장이다. 분홍빛 머리를 하나로 묶은 채, 온갖 곳이 붕대를 감고 있는 모습. 저택 안에서도 나름 치열한 싸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담배를 물며 웃었다.
“아. 입적이 안 되었으니 그저 이안이라 불러야겠군. 몰린 경에게 얘기 들었어. 나는 단장, 에리카일세.”
“몰린 경의 부하이십니까?”
“부하? 뭐. 따지자면 그렇다 볼 수 있지. 자, 일단 안으로 들어오게나. 누추하지만 땅바닥보다는 낫지 않겠어?”
에리카는 저택이 마치 제 것이라는 듯 앞장서서 안내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안은 저자가 몰린이 점지한 차기 영주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조사단장이라는 직위도 그렇고, 여기서 일 처리를 직접 보는 자이니 그 대가로 차기 영주 자리는 타당한 대가일 것이다.
“어찌 된 일입니까?”
응접실에 도착한 이안은 일단 시치미를 떼며 간을 보았다. 저택 안쪽은 미처 날아가지 못한 피 냄새가 가득했다.
“보시다시피, 출혈이 좀 있었지만, 정리는 거의 다 되어 간다네. 탈세 혐의도 확인하였고, 증거도 찾았어. 데르가의 팔다리만 자르면 될 일이지.”
이안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반역자의 처형은 대부분이 교수형이었다. 칼날로 인한 죽음은 귀족에게 명예였기 때문에 대부분은 밧줄을 이용하곤 했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발버둥 치는 모습 또한 세간에 보이기 힘든 수치였으니까 말이다.
에리카는 장난이라는 듯 깔깔대며 웃었다. 그녀는 정문 입구부터 응접실까지, 카칸티르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있었다. 오만하게도.
“뭐, 그냥 비유적인 표현이네. 그놈이 데리고 있는 기사들이랑 단장이 있거든. 데오라 그랬나? 실력이 꽤 괜찮아. 이런저런 놈들을 수족으로 부리면서 계속 꽁무니만 빼고 있으니, 팔다리를 잘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후우, 에리카가 담배 연기를 이안의 얼굴에 내뱉었다. 그러곤 그제야 카칸티르를 힐끔거리며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그러면 뭐,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나? 듣자 하니, 데르가에게 원한이 많다고는 하던데. 역시 처형식이 궁금해서 그런가?”
이곳은 이안이 있기에 안전하지 않았다. 브라츠라는 가문이 사라지기 직전인 지금, 아무리 입적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그에게 데르가의 피가 흐르고 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아니면, 몰린 경의 서신을 기다리나?”
그저 몰린 경에게 밀고장을 줌으로써 협조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 이리 우호적인 대접을 받는 것이다. 승기를 붙잡은 자들의 관용이기도 했다.
에리카가 쩝쩝 입맛을 다셨다.
“뭘 원하지? 나는 딱히 받은 지시가 없는데.”
“몰린 경의 안부를 전해 들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다른 볼일이 있습니다.”
“음? 그래?”
에리카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천려로 팔려간 서자가 볼일이라고 해봤자 대체 무엇이 있겠냐는 듯이.
“저에게는 브라츠가 고향입니다. 사달이 났다는 걸 알고 걱정되어 밤잠을 설칠 정도였지요. 그것은 브라츠와 동맹을 맺었던 천려족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여, 이리 동행한 것입니다.”
에리카는 카칸티르를 힐끔거렸다. 그러곤 턱을 가볍게 갸웃거리며 웃기만 했다. 아직 이안이 하는 말의 의중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다.
“야만족은 브라츠와 사이가 나쁘지 않나?”
그녀의 말에 이안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히 무시하는 비웃음이다. 에리카는 정색하며 담배를 테이블에 비벼 껐고, 이내 뒤에 서 있던 부하들이 검 손잡이를 붙잡았다.
“브라츠와 천려족은 오래전부터 화친을 맺어 교류하는 사이였습니다. 형제 그 이상의 관계지요.”
“형제? 하. 개 풀 뜯어 먹다 뒈지는 소리. 브라츠와 천려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은 중앙의 행정부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네놈이 그 증거 아니냐? 산 채로 대사막에 팔려간 천한 몸뚱이.”
“화법이 인상 깊군요. 의외입니다. 요즘에는 조사단장도 천민 출신을 뽑나 봅니다.”
“뭐!?”
이안의 담담한 말에 에리카가 꽥 소리를 질러댔다. 말하는 꼬락서니가 너무 천박하단 것을 돌려 먹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카칸 역시 웃음으로 이안의 말에 동의하는 뜻을 보였다.
“이보시게. 단장.”
“이보시게, 단장?”
“나는 대사막의 중심이다. 천박한 말 따위 그만 쏟아내고, 데르가의 탈세 혐의를 확인했으면 서둘러 처형식을 올리고 떠나라. 브라츠 영지의 뒷수습은 우리가 할 것이다.”
“미쳤나, 이것들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에리카 님! 더 들을 것도 없습니다!”
채앵! 챙!
에리카의 부하들이 검을 빼 들었다. 카칸티르와 네르사른 그리고 수는 그저 멀뚱멀뚱 보고 있기만 했다. 흥분한 그들과 달리 실로 차분한 분위기다.
“짐승 핏줄인 새끼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쉬이익!
개중 가까운 남자가 카칸티르에게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카칸티르는 맨손으로 아주 가볍게 그의 손목을 낚아챘고, 이내 무덤덤한 표정으로 힘을 주기 시작했다.
“어……?”
아드드득.
“으아아아악!”
단 한 손으로, 사람의 손목을 비틀어 버린 것이다. 그에 그치지 않고, 카칸티르는 놈의 머리채를 붙잡아 테이블에 꽂아 내렸다. 에리카가 버렸던 꽁초 가루가 남자의 얼굴에 그대로 묻어났다.
쿵! 쿠웅! 쿵!
한 번, 두 번, 세 번.
거세게 내리칠 때마다 묽은 피가 터졌고, 이내 테이블 아래 카펫이 흥건하게 젖었다.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던 에리카가 새된 고함을 질러댔다.
“미, 미쳤지? 나는 황궁의 사자다! 이건 황궁에 대한 모욕이야!”
“모욕이라니. 말은 똑바로 하는 게 좋을 거다. 내 손에 맞고 살아있는 것 자체가 영광이고 자비니까.”
틀린 말은 아닌 듯싶었다. 족장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카칸은 단 한 번의 패배도 겪지 않았으며 그가 상대했던 자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으니.
에리카는 금방이라도 눈이 뒤집힐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이안을 노려보며 경고했다.
“…아비와 함께 목이 잘리고 싶은가? 네놈 몸에 데르가의 피가 흐르고 있음은 모두가 안다! 너를 죽인다 한들 그 누구도! 내게 죄를 물을 수 없어!”
“말씀하신 대로, 저는 데르가의 피를 이었지만 브라츠 가문의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디 황궁에서도 그렇게 지껄여 보시지? 그런 잔꾀가 통하는지 말이야!”
“뭐, 황궁 노예로 전락하는 게 일반적이긴 하겠습니다만, 신중히 상황을 읽어야지요. 무엇보다 저는 접경한 천려족과 교류하는, 유일한 ‘제국인’이지 않습니까.”
이곳은 황궁에서 보름 거리나 떨어진 변경.
차기 영주로 누가 오든, 외부 세력으로부터 바리엘의 국경을 지켜내는 것이 영주의 덕목이었다.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천려를 등에 업은 자가 누구인가?
이안은 제대로 보라는 듯 고개를 가볍게 들었다.
“또한, 화친으로 인해 제 소속은 바리엘의 브라츠가 아니라 대사막의 천려입니다. 아. 검은 내리는 게 좋겠어요. 그대들의 안위를 위하여.”
일당 수십을 거뜬히 이겨내는 괴물들이다. 덩치부터가 확연하지 않나. 카칸티르의 가벼운 몸짓에도 에리카의 부하는 실신해 버렸다. 그들이 무기까지 들면 어떤 피바람이 불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리카 단장님의 임무는 데르가의 탈세 혐의 조사와 처벌이지, 브라츠 영지의 뒷수습은 아니지요. 할 일 다 하시면 올라가는 게, 그리 불쾌하십니까?”
“나는, 데르가를 잡기 위해서!”
“영지를 쑥대밭으로 만드셨더군요. 과하십니다. 데르가의 피만 흘리면 될 것을, 영지민들의 비명이 가득해요.”
“과한 것은 네놈이다! 처지를 똑바로 직시해!”
데르가의 핏줄이며, 천민이었고, 대사막의 제물인 하찮은 존재. 백작의 정식 재판이 열리면 이안이 노예로 팔려감은 기정사실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데르가가 해 처먹은 세금을 메꿔야 하니까.
“잘 압니다. 처지.”
이안의 말에 카칸티르가 안주머니에서 서신을 한 장 꺼냈다. 그리고 피가 낭자한 테이블 위에 툭, 하고 던졌다.
“우방인 천려의 입장이오. 데르가의 사정은 제국 내의 일이지만, 우리는 어쨌거나 브라츠와 동맹을 맺었소. 그 누구보다 브라츠의 평화를 원하지.”
“하! 뻔뻔하기 짝이 없군.”
“태도를 정중히 하는 게 좋을 텐데. 여기서 죽으면 제일 아쉬울 게 그대 아닌가?”
단순하지만 확실한 경고였다. 에리카는 입술을 꽉 깨물며 다시금 검을 다잡았다. 그리고 문득, 천려인들은 아직까지 아예 무기를 꺼내지도 않았음을 깨달았다. 맨손으로도 충분하다 여기는 것이다.
“동맹 서약대로라면, 우리는 데르가의 편에서 힘을 실어주어야 하오. 하지만 데르가는 죄인이고, 브라츠는 바리엘의 조각이지. 따라서 그대들을 도우려 하는데…….”
카칸티르는 이안을 힐끔거렸다.
모든 것은 미리 말을 맞춘 대로다.
“그대와 우리를 연결하는 인물로 적합한 것이 이안이라 생각해, 브라츠의 모든 권한을 이안에게 위임하였으면 하는데. 어찌 생각하나?”
“…지금 내가 잘못 이해했나? 가주가 되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들리네만?”
이안과 천려족은 대답 없이 에리카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탁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벌써부터 그러기엔 이르다는 듯이, 이안이 방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