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grave’s Bastard Son was The Emperor RAW novel - Chapter 410
제410화. 연관이 있다
이안이 다몬의 머리채를 휘어 감고 있을 때, 사실상 제일 어이없이 난감한 것은 루스웨나 측이었다.
루스웨나는 바리엘의 무역 제재를 받음과 동시에, 전격으로 그들의 본대와 격돌했다. 숲에서 끝도 없이 쏟아지는 푸른색 물결에 그들은 버고스 쪽으로 가지도 못한 채 가이아의 대군(大軍)과 맞서야 했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그런데, 마법부 수장이 왕의 목덜미를 잡아버려? 사실상 무언가를 하기 전에 승패가 갈라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버고스 내에 그를 대신할 만한 차기 후계자가 있다면 또 말이 달라지겠지만, 에리포니가 아는 한 그는 버고스 내에서 절대 왕정을 굳건히 지키는 자였다.
다몬의 부모가 살아있었을 적. 그에게 이부(異父), 이복 형제자매들이 꽤 있다는 소문을 듣긴 했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소문 아니겠나?
에리포니는 엘더트가 전해준 망원경으로 버고스 병사들 틈새를 살피기 위해 애썼다.
“다몬 왕이 붙잡힌 것 같습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에리포니는 목구멍으로 치솟는 욕설을 간신히 삼킨 다음, 한창 전투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는 대지를 둘러봤다. 이로 보나 저로 보나 루스웨나와 바리엘은 확실히 적의를 담아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만 더 늦게 명령을 내리는 건데! 버고스와 클리포포드 간의 전투에 힘을 실어주려다 완전히 말아먹게 생겼다. 에리포니는 활대를 거칠게 내려치며 머리를 감쌌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엘더트? 바리엘과 우호를 말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고, 그렇다고 계속 나아가자니 다몬의 머리채가 이안 손안에 있다. 무엇이 최선이겠는가?”
“무슨 선택이시든, 전하의 뜻이니 따르겠습니다. 다만, 제 생각에는 퇴각하여 물러나신 다음 상황을 살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버고스에 내분이 일어날 수도 있고, 아직 지진에 관한 정보가 밝혀진 게 없습니다. 바리엘 측에서 저희 쪽으로 책임을 묻는다면, 그 부분을 전면으로 내세워 면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버고스는, 정확히 다몬은 동맹 관계에 있어서 거짓된 미래를 약조했다. 이걸 이용하여 루스웨나 역시 간계에 넘어간 피해자로 둔갑할 수만 있다면, 전쟁의 보상금을 비롯하여 그들이 책임질 몫 상당 부분이 줄어들 터였다.
깐깐하고 애늙은이 같은 이안이 있는 지라 그것이 제대로 먹혀들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근데 저것들은 무엇인가? 북쪽에서 지원군이 온다 하더니, 상황 읽을 줄 모르고 계속 날뛰고 있군.”
“아탄족인 것 같습니다.”
“아탄족?”
“예. 저기 아프로 머리를 한 여인이 예전에 유명했던 마물 사냥꾼 에프디람입니다. 아탄족으로 각성하여 무리 지어 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습니다. 참고로 그녀는 마법사이며, 그녀가 데리고 다니는 최측근은 마검사입니다. 북쪽에서 단둘이 활동한 적이 있었는데, 그들이 머무는 곳에는 언제나 마물 씨가 마른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그만큼 거칠어서 반겨주는 이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에리포니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 그들에게는 흑갑옷과 마법사들이 남아있다. 아탄족이 활개를 쳐준다면,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이 되었든 이런 식으로 매듭지어지는 것은 에리포니의 선택지 중 최악이었다. 와서 얻어가는 것 하나 없는 전쟁이라니. 물론 전쟁이라는 게 패배 시 모든 걸 빼앗기는 일종의 도박과 같은 게임이지만, 지금의 그녀는 뭔갈 해보기도 전에 패를 잃어버린 것과 같았다.
지금 상황에선,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에리포니가 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카드였다.
“엘더트. 마법사들 불러와.”
“예. 전하.”
우선 마법사들을 정찰병 삼아 다시 보내보자. 이번에는 소란 피울 것 없이 정말 제 역할만을 해낼 자가 필요했다.
대지에서 기어 날뛰는 바리엘 병사들은 마법사들 선에서 정리 가능할 것이라. 저쪽, 바리엘의 마법사들이 합류하기 전에 판단 내릴 필요가 있었다.
“마법사님들!”
병사의 호출에 자이라가 고개를 틀었다.
그들은 에리포니의 명령을 기다리며 전선 대열을 유지하는 데 애쓰고 있었다. 눈먼 바리엘의 화살과 창 따위가 감히 왕의 발치에 닿지 않게끔. 그리고 루스웨나 병사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게끔.
“전하께서 급히 부르십니다. 이번에도 정찰 역이 필요하다 하십니다.”
채앵! 챙!
정찰! 마법사 중에서도 살짝 뒤로 빠져있던 자이라가 눈을 반짝였다. 클리포포드와 버고스 간의 전투에서 무언가 일이 생긴 것이라.
지금 바리엘의 본대까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마당에, 이는 자이라 입장에선 지름길이나 마찬가지였다. 루스웨나 왕궁을 비우기 위해 지원을 요청하고 바리엘로 넘어갈 수 있는.
“삼촌! 삼촌이 가!”
자이라는 자신의 앞에 있던 사내 어깨를 잡아끌며 외쳤다. 그리고 행운을 빌어주는 척, 볼을 맞대어 속삭였다.
“삼촌. 정찰 가서 무엇을 보든지, 루스웨나 지원군이 더 필요한 쪽으로 유도하여 보고해. 전하에게 희망을 심어주란 뜻이야. 무슨 말인지 알지? 우리 천막에서 나눴던 대화, 잊지 않았지?”
전투가 소강상태라면 차후를 위하여 추가 병력이 있어야 할 것이고, 최대한 빠르게 이를 전하기 위해서는 마법사가 전언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순조로워진다. 루스웨나로 돌아간 마법사는 주둔지의 자료와 가족들을 데리고 바리엘로 넘어가면 될 것이요, 이쪽에 남아있는 마법사들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리엘 진영으로 넘어가면 된다. 아주 간단하고, 쉬운 일이었다. 에리포니가 전쟁에 있어서 희망을 품을 수만 있다면!
자이라의 삼촌은 고개를 끄덕이며 병사를 따라나섰고, 이내 멀어졌다.
“자이라. 뭐래?”
“삼촌 잘 알아들었어요.”
다른 루스웨나 마법사들이 그쪽을 힐끔거리며 걱정스레 물었다. 자이라의 머릿속엔 아주 단순하고 확실한 계획만이 그려져 있었으나, 다른 자들은 세월과 경험의 얼룩으로 조금 복잡했다.
루스웨나로 보낼 전언에 마법사를 차출하지 않으면? 왕궁에서 가족들을 제대로 빼내지 못하면? 막상 바리엘로 넘어갔는데 볼모 대우를 받으면? 온갖 부정적이고 잡스러운 걱정이 가득하건만, 자이라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바리엘로 가면, 할머니 구할 수 있다. 심연으로 가서 내가 직접 손잡고 올 거야. 할 수 있어. 할머니, 조금만 기다려 줘요. 제발.’
채앵! 챙!
퍼어어엉!
자이라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화살을 보호막으로 한꺼번에 쳐냈고, 이내 그 기운은 바람을 타고 클리포포드 대지 전체로 흩어졌다.
* * *
“저게 먹히네.”
마법사 중 한 명이 장벽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미친 듯이 날뛰던 망아지들은 다 어딜 가고, 놀러 온 것처럼 옹기종기 착하게 모여있는 아탄족들. 그들은 에프디람을 중심으로 무언가 열심히 토론하고 있었는데, 격한 분위기와는 달리, 그다지 실속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러게. 식사하면서 얘기해보자는 게 먹혀. 방금까지 검 들고, 활 들고 미친 듯이 설치던 자들이.”
“다 먹고살자 하는 짓이니까 그런 거 아닐까?”
“쟤들 지금 뭐 먹을지 의논하고 있다에 한 표.”
이안이 수뇌로 뛰어들어 다몬의 목덜미를 잡아챈 덕에, 전쟁에는 평화가 깃들었다. 병사들은 더 이상 서로를 죽이지 않았으며, 버고스인들은 처분을, 클리포포드인들은 원래 일상을 고대하며 대기하고 있을 뿐이다.
버고스의 군세 또한 일단은 잠잠해졌는데, 문제는 저 아탄족들이다. 혹여 저들이 계속해서 전쟁을 이어나가겠다며 뛰어들면?
버고스 내부의 움직임이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할 수 없게 된다. 어쩌면 본국에서 새로운 지도자가 집권할 수 있고, 난세에 영웅이 탄생하듯 저 진영 어딘가에서 새로운 자가 두각을 보일 수 있지 않겠나.
“해도 안 되는데, 쟤들은 왜 저렇게 달려드나 몰라.”
“그게 종특이라잖아. 마물도 먹고, 원하는 대로 맘껏 뛰어놀고. 쟤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좋겠어?”
“의미 없다. 부질 없고. 이쪽에 마법사가 몇이나 있는데, 시간 지나서 다 회복하면 쟤들 아무것도 아니지. 솔직히 황궁친위대 선에서 정리 가능하지 않을까? 절반이 범인(凡人)이던데.”
“문 열어!”
마법사들이 이리저리 떠드는 와중, 에프디람이 장벽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천천히 좌우로 열리는 문. 그녀는 수하 한 명을 대동한 채 위풍당당 적지 안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마법사들은 그녀가 들어오는 걸 아래로 쳐다본 뒤, 자연스럽게 뒤 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바리엘 마법사들이 모두 모여 에프디람을 맞이했다.
“바리엘 앞잡이는?”
“아탄 족장. 언행이 심히 불쾌하다.”
“아, 좀 그랬나? 그러면 그, 잘생긴 애는?”
“…이안 히엘로 장관님이라 불러라. 그렇지 않으면 대화를 통한 협상 따위 없다.”
잘생긴 애? 헤일이 잠시 멈칫거렸으나, 이내 으름장을 놓아댔다. 에프디람에게는 하나도 먹히지 않았지만.
“상관이 만든 자리를 네가 뭔데 파하느니 마느니 거려? 파하실 거면 하시든가. 대신 나 말고 그쪽 문제라 꼭 일러주고. 응? 이런 거 중간에서 잘못 전달하면 진짜 짜증 나니까.”
에프디람이 헤일의 가슴팍을 꾹꾹 눌러대며 웃었다. 베릭은 계단 난간에 걸터앉아 재수 없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는데, 제삼자를 통해 스스로를 마주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에프디람은 장벽 안을 스윽 훑어보며 한 바퀴 돌았고, 이내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되는데? 계속 이렇게 세워둘 건가? 식사하자면서. 우리 애들 굶으면서 뛰어오느라 허기 엄청 지는데.”
“손가락이나 빨아 먹어!”
“쬐깐한 새끼는 그걸로 배가 차겠지만, 우리는 통이 달라서 안 된다. 빨간 대가리. 그리고 어른들 말할 때 끼어드는 거 아니야.”
“어른들 같은 소리하네! 백 살 언더는 다 친구다!”
“쟤 진짜 황궁친위대 맞아? 아까 자기 입으로 그러던데.”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걸로 보아, 진짜구나. 에프디람은 휘파람을 불며 손뼉을 쳐댔다.
아탄족이 바리엘 황궁친위대에 존재했던 적이 있었던가? 유구한 역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워낙에 많은 자들이 바람처럼 스쳐가는 터라 확언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아는 바로는 베릭이 최초였다.
에프디람는 입가심 하려는 듯 껌을 하나 꺼내 잘근잘근 씹어댔다.
“이쪽으로.”
“그쪽 상관, 몸은 좀 괜찮대? 마력 빠져나가는 게 장난 아니던데. 대체 이드갈에 무슨 짓을 했기에 그런가 몰라.”
헤일의 안내를 따르던 에프디람이 흥미롭게 중얼거리자, 마법사들이 일동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안의 상태가 영 안 좋기는 했다. 마치 몸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마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이 이드갈의 영향이라 판단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안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맹목적인 믿음으로 점철된 것이다.
“뭐?”
“왜들 그렇게 놀래? 아까 이드갈에서 나오던 마법진, 봤을 거 아니야.”
“…그게 뭔지 아는가?”
“어어? 이것들 봐라?”
되려 놀란 것은 에프디람이었다. 바리엘의 마법사란 자들이 이걸 모르나? 이래서 온실 속 화초들은 안 된다니까. 에프디람은 혀를 끌끌 차며 팔짱을 꼈다.
“「추쇄 (推刷)」잖아.”
의미 그대로 빚을 받아들이는 것. 일시적으로 강한 힘이 필요하거나 혹은 어떠한 이유로, 미래의 자신에게서 능력을 앗아오는 마법.
에프디람은 어깨를 으쓱이며 궁금해했다.
“그런데 그게 왜 이드갈에 걸려있는지는 모르겠네. 그것도 따지고 보면 적국, 버고스 왕이 가지고 있던 이드갈에서 말이지. 마법부 장관께서 과거에 뭔 연관이 있으셨는가?”
그녀의 말에 헤일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움찔거렸다. 이안이 털어놓지 않았던가.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과거가 이드갈을 만들었다고.
에프디람은 헤일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웃었다.
“이드갈이나 다몬이나. 둘 다 뭐든 연관 있으면 다들 놀랍긴 하겠어?”